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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컨시어지(Concierge)라고 적혀 있는 곳 보이시죠? 처음 들어오면 저기를 거쳐서, 그 옆에 있는 프론트에 있다가 객실 판촉팀으로 가요."

세종호텔 로비 한켠에 자리잡은 농성장. 조주보(43, 세종호텔 노조 부위원장)씨는 20여 년 전 자신이 처음 호텔일을 시작했던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컨시어지(안내원)'에서 1년, 프론트에서 10여 년, 객실 판촉팀에서 7년을 일하던 조씨는 지난해 9월 26일, '벨' 담당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과장이었던 그는 자신보다 낮은 직급인 계장이 팀장으로 있는 부서의 팀원이 되었다. 사실상 '좌천'이었다. 조씨는 "모멸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2009년 8월 25일. 박정희(51)씨는 세종호텔에서 처음으로 일하게 된 날을 정확히 기억했다. 박씨는 신라호텔에서 룸메이드로 함께 일했던 다른 두 명과 함께 세종호텔로 옮겼다. "계약직으로 1년만 일하면 면접 후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믿고서였다. 박씨는 "신라호텔은 룸메이드가 외주화 돼있어서 용역회사에서 일했는데 정말 힘들었다"면서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일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입사한 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씨는 계약직이다. 박씨는 "2010년 단체협약 체결 당시, 분명히 사측이 그 해 말까지 입사 1년이 넘은 비정규직들은 면접 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노조 설립 37년 만에 파업...호텔 로비 한켠에서 숙식  

서울 명동 세종호텔 로비에서 세종호텔 노조 조합원들이 파업 농성을 하고 있다.
 서울 명동 세종호텔 로비에서 세종호텔 노조 조합원들이 파업 농성을 하고 있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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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일 세종호텔 노조(이하 세종노조) 조합원 50여 명은 노조 설립 37년 만에 처음으로 파업에 돌입했다. ▲ 부당전보 철회 ▲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 인원충원 ▲ 실질임금 인상 등이 주요 요구사항이다.

파업 26일째인 지난 27일, 서울 명동에 위치한 '특2급 호텔'인 세종호텔을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호텔 로비를 드나드는 투숙객들 사이로 파란 조끼를 입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조합원들이 보였다. '세종호텔 노동조합 총파업 승리 농성장'이라는 현수막 아래 은박 돗자리. 세종노조 농성장이다. 벽 한 면에 '연대동지'들이 남기고 간 '지지의 글'이 붙어있었다. 현재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조합원은 30여명. 이들은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조주보씨는 사우나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날 오전 프론트 대체인력 투입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사측·연합노조 측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인 탓이다. 조씨는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 나오니 근육 뭉친 게 조금 풀린 것 같다"고 했다. 2명의 조합원은 응급실에 실려갔다. 조씨는 "연합노조 간부들이 구사대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차라리 용역을 쓰면 마음이 가벼울 텐데"라며 착잡해했다. 

지난해 7월 복수노조가 허용된 이후, 세종호텔에는 '세종연합노동조합(이하 연합노조)'라는 이름의 새로운 노조가 생겼다. 세종호텔 전체 직원 270여 명 가운데 180여 명이 연합노조에 가입했고, 세종노조는 조합원 70여 명의 '소수' 노조가 되었다. 그러자 지난해 6월부터 세종노조와 임금협상을 진행해온 사측은 연합노조 설립 이후 기존 노조였던 세종노조의 교섭권을 인정하지 않고 지난해 10월 연합노조와 임금협상을 체결했다. 이에 세종노조는 교섭응낙 가처분 신청을 통해 지난해 12월 법원으로부터 단체교섭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한 달여 간의 교섭기간 동안 사측은 '부당전보 철회,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은 교섭대상이 아니다'라며 노조와 평행선을 달렸다. 임금 역시, 이미 연합노조 측과 합의한 것보다 낮은 수준을 제시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중재 또한 결렬됐다.

프론트에서 11년 일한 노조간부, 커피숍 서버로 발령 

서울 명동 세종호텔 입구에 들어서자, 세종호텔 노조 측의 요구를 담은 대자보와 피켓이 보인다.
 서울 명동 세종호텔 입구에 들어서자, 세종호텔 노조 측의 요구를 담은 대자보와 피켓이 보인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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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노조 측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사측이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조주보씨가 말했다.

"제가 인사발령을 받은 건 9월이지만 사측은 이미 지난해 1월부터 노조 간부에 대한 부당한 인사 조치를 해왔어요. 노조 회계감사였던 조합원이 있었는데, 프론트에서 11년을 일했어요. 이 분을 호텔 커피숍 서버로 발령내린 거예요. 심지어 임신 중이었는데... 결국 지노위(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전보를 인정받아서 원직 복귀했고, 지금은 육아휴직 중이에요."

지난해 9월 조씨와 함께 전보조치를 받은 직원 가운데는 20여 년간 '교환' 파트에서 일하다 '룸메이드' 파트로 가게 된 사례도 있다. 조씨는 "이 분 역시 노조 간부였는데 이전에도 부당전보 인정을 받아 원직에 복귀했다가 또 다시 이런 일을 당했다"면서 "이 분은 결국 호텔을 나갔다"고 전했다. 이외에도 노조 대의원이었던 직원은 판촉팀에서 객실 정비팀으로, 또 다른 조합원은 프론트에서 객실정비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이후 지난해 12월 말, 노조는 사측이 그해 1월 자본금 1억 원을 들여 '㈜세종서비스'라는 이름의 용역회사를 설립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세종호텔을 운영하는 ㈜세종투자개발 최승구 대표이사와 주명건 회장이 사내이사로 등록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사측은 '다른 계열사의 인력수급을 원활하기 위해 용역회사를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노조 측은 이를 '외주화를 위한 수순'으로 보고 있다. 이미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주명건 회장은 지난 2003년에도 ㈜세종호텔이라는 용역회사를 만들어 세종호텔 직원 일부를 전직시키는 등 '용역화'를 추진하다가 노조 측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세종대·세종호텔 관련 비리 혐의로 2005년 세종호텔 회장직에서 물러났던 주명건 회장은 2009년 경영진으로 복귀했다.

정규직 함께 나서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요구

27일 세종호텔 노조가 사측의 대체인력 투입을 항의하는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해 조합원이 부상을 당한 것과 관련해 노조가 사측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27일 세종호텔 노조가 사측의 대체인력 투입을 항의하는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해 조합원이 부상을 당한 것과 관련해 노조가 사측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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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측은 '고용안전협약' 준수도 거부하고 있다. 지난 2009년 세종노조와 사측은 '회사는 고용안정 협약 체결일로부터 5년까지 외주, 아웃소싱, 정리해고 등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일체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고용안정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노조 측은 이번 교섭당시 고용안전 협약준수를 요구했지만, 사측은 '단협 사항은 2년 동안만 적용된다'고 맞섰다.

현재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30여 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5명. 나머지는 정규직이다. 하지만 이들은 비정규직 동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외주화'가 진행될 경우, 자신들도 비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었다.

세종호텔에서 6년간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민주노조'가 들어서면서 정규직이 됐다는 박춘자(43)씨는 "세종호텔에 오기 전에 다른 호텔에 있었는데 월급 제 때 안 줘서 직원들 내보내놓고는 용역화해 버렸다"면서 "지금 신라, 롯데, 로얄호텔 직원들 다 외주화됐다. 세종도 민주노조만 없애버리면 6개월도 안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호텔에서 16년째 룸메이드로 일하고 있다는 이기원(50)씨는 "비정규직이나 정규직이나 하는 일은 똑같고 월급도 몇 만원 차이 안 나는데 왜 단협을 안 지키나"라면서 "우리가 몇 푼이나 받는다고... 용역회사를 미리 다 차려놓고"라며 가슴을 쳤다. 정규직인 이씨는 "이 싸움은 미래를 위한 싸움"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박정희씨는 "우리가 나쁜 선례를 남기면 비정규직은 다 무기계약직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측 "용역화, 외주화는 허황된 이슈"

세종호텔 측이 호텔 로비에 붙여놓은 경고문.
 세종호텔 측이 호텔 로비에 붙여놓은 경고문.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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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싸움은 쉽지 않다. 이아무개(56)씨는 이날 오전 발생한 몸싸움을 떠올리며 "팔이 막 왔다갔다 그러는데, 저게 다 나한테 날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무서웠다"면서 "아직도 속이 벌렁벌렁한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그래도 같이 일하던 직원들인데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게 할 줄 몰랐다"면서 "사측이 어린 직원들 시켜서 욕하게 하고, 폭력 휘두르고. 노노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라고 분노했다. 정년 29개월을 남기고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씨는 "처음에는 며칠 하면 끝나겠지 생각했는데 파업이 오래가니까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것 같다"라며 고개를 저었다(당시 상황을 촬영한 동영상).

한편, 사측은 '직원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통해 부당전보 철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교섭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다.

최승구 대표이사는 "일부 인원에 해당하는 부당전보 철회 건과 비정규직 전환 건 등 교섭대상이 아닌 사항을 2011년도 임금교섭의 주된 목적으로 삼아 이를 관철할 목적으로 파업을 하고 로비점거 등 불법행위를 저질러 자신의 삶의 터전인 일터를 황폐화 시키고 결국 고객들을 떠나게 만드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노조 집행부가 명분 없는 파업을 지속시키기 위해 영업장 외주화, 용역화 등 허황된 구조조정 이슈를 내세워 파업 참여 조합원을 현혹시키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현재 세종호텔 로비에는 ▲ 로비 농성장에서의 취사행위를 엄격히 금지 ▲ 제3자의 무단출입을 엄격히 금지한다는 내용과 함께 "이와 관련해 민, 형사상의 모든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태그:#세종호텔, #주명건, #세종호텔 노조, #외주화, #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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