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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버림받았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로부터, 처음부터 철저하게. 어머니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거부하고, 혐오한다. 어린 소년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없어져 버리는 것일 뿐.

절망에 빠진 이 '지상 최악의 소년'은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는 불행하다>에서 기어이 1위를 차지하고, 신은 그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기로 한다. 소원은 다름아닌 '지구 멸망'이다.


하지만 또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나는 행복하다>에서 7위씩이나 한 '오덕희'와 12사도가 신의 계시를 받고 소년의 마음을 돌리고자 나서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년을 구하고, 소년의 세상을 구하라.' 과연 소년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 '슈퍼 불행 소년'을 창조한 주인공, 정필원 작가를 1월 11일 작업실에서 만났다.


"불행한 나, 우주에서 몇 등이나 될까"

<지상 최악의 소년>은 연재가 종료된 상태.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든다"며 그가 미소짓는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작업 저장분이 없이 시작했고, 무겁고 우울한 내용에 유난히 지치기도 했다. 마감 전날까지 늘 야근을 권했던 <지상 최악의 소년>의 단초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우연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당시의 제 모습이 좀 불행한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문득 내가 불행하면 지구상에서 과연 몇 등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죠. 그 '대회'에서 1등할 정도의 애가 있다면 대체 어떤 애일까. 그리고 그 소원은 뭘까. 거기서 지구 멸망까지의 설정이 한 번에 나왔어요."


임신거부증인 어머니로 인해 태어나면서부터 존재를 거부당한 소년 '이현'을 주인공으로, 이 소년의 소원인 지구 멸망, 그리고 오덕희와 12사도들에 대한 설정이 차례로 이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소년이 소원하는 '지구 멸망'. 이 무거운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은 일부러 가볍고 경쾌하게 시도했다. 극 초반에는 학원물답게 발랄함도 살렸고, 소년물다운 그림체로 지금까지의 정필원과는 다른 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여기에 마치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완성도 높은 비주얼은 극의 완성도를 더하고 있다. 코끼리가 하늘을 날고, 찢긴 꽃잎이 흩날리고, 삼라만상이 솟아오르다 끝내 내려앉으며 처참히 파괴되는 종말의 '환상적인' 비주얼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물론 그가 말하려는 것은 결코 멸망이나 파괴 그 자체가 아니다. 소년이 스스로를 인정하고 행복해졌으면 하는 것. 멸망을 멈추는 열쇠인 동시에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다.


"사람의 행복은 사람의 수만큼 여러 가지가 존재하겠죠. 그 시작은 마음가짐이 될 거고요. 자기를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결국 소년이 자기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제가 생각한 마지막이에요.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게 하는 것."


가족을 그리는 만화가


"사실 제 작품을 보면서 울었다는 분들은 좀 이해가 안 돼요. 울 정도는 아닌데……."


그는 이렇게 말하지만 데뷔 후 수년이 흐르면서 그는 '울리는' 만화가가 된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작품의 면면만 봐도 그렇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후 가족 곁을 몰래 지키는 아버지(<패밀리맨>),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사춘기를 맞은 소녀(<마음이 만든 것>), 치매에 걸려 버려진 할머니와 동병상련을 느끼는 청년(<나와 함께>) 그리고 최근에는 어머니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아 힘들어 하는 소년까지. 그의 작품에는 유난히 가족에 의해 트라우마를 겪는 인물의 이야기가 많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주로 하는 데는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혹시 어떤 개인적인 결핍 때문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도 많았다.


"정작 저 자신은 가족이라는 테마가 왜 계속 등장하는지 그 특별한 이유는 잘 못 찾겠어요. 작가가 작품을 하면서 가장 먼저 알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이겠죠. 자기도 모르던 자기를 알아가는 것이고, 지금도 알아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사실 그의 아버지가 자신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일찍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든든히 그의 마음을 채워 주셨다. 돌아보면 특별히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게, 여느 아이들처럼 지내온 시간이다.


그가 2010년, <패밀리맨>으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받았을 때, 항상 "남자란 모름지기 직장생활로 안정적인 밥벌이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어머니는 그날만은 자랑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다시 걱정을 하시죠.(웃음) 하지만 별 신경 쓰지 않아요. 만화만큼 제 이야기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매체가 드무니까요. (안 풀릴 때면) 불행하지만 만화로 행복해요. 가장 신날 때는 새 작품 기획에 들어갈 때예요. 구상하면서 이것도 그려야지, 저것도 그려야지 하면서 신이 나죠."


10년 후의 정필원을 기대한다


고등학교 때 "멋모르고 만화가가 되고 싶던" 그는 세종대 만화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는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함께 배웠는데 그때 차츰 영상제작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다.


"본래는 <슬램덩크>나 <배가본드> 식의 실사체 그림이었어요. 지금이랑은 연결이 좀 안 되죠? 군대 제대 후 애니메이팅을 위해 일부터 그림체를 바꿨죠."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길은 절대 녹록하지 않았다. 원·동화를 그리면서 그림이 아닌 '노동'을 경험했고, 오랜 도제 시스템에도 회의가 들었다. 그러다 재학 중 그렸던 단편 <별이 내리는 날>이 인연이 돼 한 포털 사이트 관계자의 눈에 띄었고,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제작지원까지 받게 됐다. 그때 제작한 <마음이 만든 것>으로 작가 생애 첫 연재가 시작됐다. 본격적으로 정필원이라는 이름 석 자가 세상에 알려진 순간이다.


첫발을 내딛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경쟁은 거칠고 뜨겁다. 현재 연재중인 포털 사이트 네이버만 해도 100개 이상의 작품이 걸려 있고, 한 요일에만 20개 넘는 작품이 나오니 매일 한 권의 <소년 점프>가 쏟아지는 셈이다. 한때 인기가 있었다 해도 3개월만 연재를 쉬면 금세 잊혀지기 십상이고, 온갖 악플까지 난무하는 이 전쟁터에서 나를 기꺼이 내놓을 때면 차라리 두려움마저 느낀다. 


하지만 팬들과의 소통이 있어 그는 힘을 얻는다. 어느 사인회에서인가 연세 지긋한 할머니가 스케치북을 내밀며 손자에게 선물할 사인을 부탁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주인공들의 이름까지 줄줄 외우는 모습은 언제까지고 그의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작가가 되고 싶냐고요? 사실 전, 작가관이 뚜렷하지 않아요. 그래서 선뜻 대답을 못하겠어요. 지금은 그냥 10년 후를 기대하면서 매번 작품을 하는 것 같아요. 뭔가 작정하기 보다 이렇게 쌓인 것들로 나중에 발견되는 것, 그것이 제 작가관이 되지 않을까요."


지금, 그의 눈에 들고 귀에 닿는 모든 것이 작품의 씨앗이 된다. 좋은 작품을 내보이고픈 욕심은 쉴 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그의 '다음'을 언제나 기대할 수밖에.


"다음 작품은 좀 가벼운 것을 하고 싶어요.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것만 하다 보니 작가가 지치더라고요. 다음엔 좀 안 울리는 작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규장각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필원, #지상 최악의 소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규장각, #패밀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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