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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수양이 앉고 좌우에 대소신료들이 시립했다. 사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는 경복궁 편전으로 관악산 숭례문 광화문 흥례문 근정전 사정전 숙정문 삼각산으로 이어지는 남북 축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 사정전 중앙에 수양이 앉고 좌우에 대소신료들이 시립했다. 사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는 경복궁 편전으로 관악산 숭례문 광화문 흥례문 근정전 사정전 숙정문 삼각산으로 이어지는 남북 축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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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내려앉은 사정전 앞뜰에 환하게 불이 밝혀졌다. 수양이 앉은 자리 양 옆으로 의금부 제조 파평군 윤암, 병조판서 신숙주, 호조판서 이인손, 이조참판 어효첨이 대간과 함께 시립하고,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 전원이 참석했다. 의금부 옥에서 하룻밤을 보낸 성삼문을 비롯한 상왕파들이 결박당한 채 의자에 앉았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상왕께서 타의에 의해 손위(遜位)하셨으니 다시 세우려 함은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상왕께서 물러나 앉으셨으니 이 나라의 임금은 과인인데 상왕을 다시 세우려 함은 대역이라는 것을 모르나?"
"나으리가 상왕 전하의 보위를 뺏으니 신하된 도리로서 제자리로 돌리려 함을 어찌 모반이라 하십니까?"

"선위하셨잖은가?"
"나으리가 평소에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대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수양의 말문이 막혔다. 주나라 문왕의 아들 주공은 조카 성종을 도와 왕실을 튼튼한 반석위에 올려놓은 사람으로 공자와 후세의 사가들이 높이 평가하는 인물이다.

"성왕은 선위하지 않았고 상왕은 선위하지 않았는가? 선위를 인정하는 것이 시대의 소명이 아닌가?"
"도적질한 보위를 어찌 선위라 호도하십니까? 군자는 도적놈에게 예를 다하지 않은 것이 예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나으리에게 경어를 쓰지 않음에 예를 탓하지 마소서."
"뭣이라고? 이런 발칙한 놈이 있는가? 이자의 주둥이를 문질러 놓아라."

형졸들이 달려들어 성삼문의 입을 짓이겨 놓았다.

때로는 주리를 틀기도 했다
▲ 죄인을 다스리던 의자 때로는 주리를 틀기도 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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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번 양보하여 선위를 인정한다 해도 상왕전하가 시퍼렇게 살아계신데 두 임금을 모시란 말인가? 성삼문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짓 못한다. 성삼문이 상왕 전하를 복위하려 함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신하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다."

성삼문의 입에서 목소리와 함께 피가 튀어나왔다. 경어는 사라지고 막말이다. 죽기를 각오했으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선위를 받을 때는 방관하며 내게 붙었다가 왜 이제 나를 배반하는가?"
"솔직히 그때는 사세가 불가능해서 그랬다. 도적질을 저지하지 못할 바에는 한발 물러서서 기회를 엿봐야지 공연히 일을 그르쳐 죽을 수야 없지 않은가? 속이 쓰리지만 참고 견디며 지금까지 이른 것은 만전하게 일을 도모하려 함이었는데 이렇게 되었다. 뼈아프다."

"네가 신이라 일컫지 않고 과인을 나으리라고 하는데 네가 내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반역이다. 겉으로는 상왕을 복위시킨다고 하지만 실상은 네가 왕위를 탐한 것 아니냐?"
"성삼문은 나으리처럼 보위를 탐하는 몰염치한 소인배가 아니다. 나으리의 할아버지 태종대왕의 백성으로 태어나서 상왕의 신하로 죽을 것이다."

"이런 발칙한 놈."

수양의 분노가 이글거렸다.

"이 자에게 작형(灼刑)을 가하라."

시뻘겋게 달구어진 불인두가 성삼문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살가죽이 지글지글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과인의 신하로 거듭나면 살 수 있다."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내가 준 녹을 먹지 않았는가?"
"나으리가 실망하겠지만 성삼문은 나으리가 준 녹을 먹지 않았다. 만일 믿지 못하거든 나의 집을 뒤져 보라."
"이런 고얀 놈 같으니라고? 더 달구어진 불 인두 없느냐?"

형졸들의 손이 바빠졌다. 달구어진 불인두가 성삼문의 두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으~윽!"

성삼문은 고통에 못이기는 비명소리도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참으려 해도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나으리의 형벌이 참 독하구나."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던 성삼문이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성삼문의 충혈된 눈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의 흐릿한 시야에 신숙주가 잡혔다.

나으리가 내려준 녹은 결코 먹지 않았다

신숙주는 여기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사정전 뒷 계단 신숙주는 여기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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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번 들 적에 세종대왕께서 원손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내가 죽은 후에 너희들이 이 아이를 잘 보살피라'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한데 네가 어찌 잊었는가? 너의 뻔뻔함이 이 정도에 이를 줄은 몰랐다."

성삼문의 눈빛이 경멸과 저주로 불탔다. 섬뜩함을 느낀 수양이 신숙주를 불렀다.

"뒤편으로 나가 있으라."

사정전 뒤뜰로 신숙주를 내보낸 수양이 박팽년을 신문했다.

성삼문을 비롯한 상왕 복위파들이 갖은 악형을 당했던 곳이다
▲ 사정전 앞마당 성삼문을 비롯한 상왕 복위파들이 갖은 악형을 당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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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과인에게 항복하고 삼문과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다."
"이렇게 엄정한 국청자리에서 '한 것을 안 했다'고 하라니 나으리도 참 웃기십니다. 푸하하하! 나으리는 도원군을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박팽년이 호탕하게 웃었다. 도원군은 수양의 맏아들로 훗날 세자에 올랐으나 요절했다. 그의 부인이 인수대비다.

"저런 고얀 놈 같으니라고… 저자의 주둥이를 문질러 놓아라."

형졸들이 달려들어 박팽년의 입술에서 피가 터지도록 매질을 가했다.

"네가 이미 과인에게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이라 일컫지 않는다고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나는 상왕의 명령으로 충청 감사가 되었으니 상왕의 신하다. 그리고 나으리가 조카의 보위를 빼앗아 위에 오른 후에는 현지에서 올린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니 하늘을 우러러 한줌 부끄러움이 없다. 그것뿐이 아니다. 나으리가 내려준 녹은 뱃가죽이 들러붙어도 먹지 않았다."

"고얀 놈 같으니라고, 너의 뱃가죽이 얼마나 두꺼운지 불 인두 맛을 보여주겠다. 이봐라, 뭣들 하는 게냐?"

능멸감을 느낀 수양의 분노가 폭발했다. 시뻘겋게 달구어진 불인두가 박팽년의 아랫배를 파고들었다.

"이 자가 올린 장계를 가져와라."

불호령이 떨어졌다. 승정원 관리가 박팽년이 충청감사로 있으면서 올린 장계를 대령했다. 수양이 박팽년의 장계를 살펴보았다. 신(臣)자는 하나도 없고 그 글자가 들어갈 자리에 거(巨)자가 있었다.

"이런 우라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수양이 장계를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저자의 눈구멍에는 불인두가 안 들어 간다더냐?"

시뻘겋게 달구어진 불인두가 박팽년의 얼굴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수양이 유응부를 신문(訊問)했다.

성삼문을 비롯한 상왕 복위파들이 갖은 악형을 당했던 곳이다
▲ 사정전 앞마당 성삼문을 비롯한 상왕 복위파들이 갖은 악형을 당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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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맡은 역할은 무엇이냐?"
"잔칫날에 족하(足下)를 한 칼로 폐하고 상왕을 복위하려 했는데 불행히도 간인의 고발로 불발에 그쳤다.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라."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족하가 뭐냐?"
"뭐긴 뭐냐?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놈을 족하라 부르지…."
"괘씸하구나."

수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틀린 말 했나?"
"이놈이 그래도…."
"내가 존숭하는 임금은 전하라 부르지만 내 발바닥의 때만큼도 못 한 자는 족하(足下)라 부른다."
"뭣이라고?"

수양의 뇌를 감싸고 있는 그릇이 열렸다.

"이 자의 살가죽을 벗겨라."

예리한 칼날이 유응부의 목덜미에 닿았다. 섬뜩했다. 유응부가 눈을 감았다. 살을 찢는 통증과 함께 살가죽이 어깨위로 벗겨져 내려갔다.

"네가 상왕의 이름을 내걸고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구나?"
"사직 같은 소리하지마라. 인간 유응부는 너처럼 도적놈이 아니다."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는 유응부의 충혈 된 눈이 성삼문과 하위지를 쏘아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생과는 일을 꾀할 수 없다'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잔칫날, 내가 칼을 뽑으려 하니 너희들이 '만전의 계책이 아니다'라고 만류하여 오늘의 화를 당하게 되었다. 너희들처럼 결단력이 없으면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한 호흡 숨을 고른 유응부가 수양을 노려보았다.

"더 물을 일이 있거든 저 어리석은 선비들에게 물으라.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건방진 놈! 저자의 다리에 불 인두를 놓아라."

자존심 상한 수양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시뻘겋게 달구어진 불 인두가 유응부의 사타구니 사이에 내려앉았다. 살가죽이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견디던 유응부가 소리쳤다.

"쇠가 식었다. 다시 달구어 오라."

말을 마친 유응부가 혼절했다. 수양의 시선이 이개에게 향했다.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강희안만큼은... 그는 진실로 어진 이다

수양이 이개를 내려다보던 곳
▲ 사정전 수양이 이개를 내려다보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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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도대체 무슨 형벌이냐?"

누가 누구를 신문하는지 모르겠다. '법에도 없는 형벌이지 않느냐?'는 준엄한 항의다. 절대왕권 사회에서는 왕의 말은 곧 법이다. 하지만 형벌은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법에도 없는 형벌을 가하는 것은 찌질한 자의 분노의 배설이며 권력을 가진 자가 법을 지키지 않으면 '무지렁이 백성인들 법을 지키겠느냐?'는 반어다. 궁색한 수양이 하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 반역이란 죄명을 쓰면 마땅히 베는 형벌을 받게 되는데 다시 무엇을 묻는가?"

수양이 묻기 전에 먼저 따돌렸다. 궁지에 몰린 수양이 단근질을 멈추라 명했다. 살이 타고 기름이 지글거리며 피어오르던 연기는 멈추었지만 노린네는 진동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수양이 성삼문에게 물었다.

수양이 앉아 있던 자리
▲ 사정전 수양이 앉아 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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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말로 하자. 모의한 자가 누구누구냐?"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우리 이제 힘들게 밀고 당기지 말자."
"우리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그 얘기는 나오지 않아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또 있겠는가?"
"강희안도 있지 않느냐?"

깜작 놀랐다. 토설하지 않았는데 수양이 어떻게 강희안을 알고 있을까?

"나으리가 세종이 이후 나라의 재목을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그자는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남겨두어 쓰거라. 강희안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

강희안은 세종이 창제한 정음(正音) 28자에 해석을 붙인 유일한 학자다. 조선의 준재들이 모여 있는 집현전에서도 군계일학처럼 돋보이는 당대의 동량이었다. 성삼문과 동갑인 강희안은 성삼문이 닮고 싶은 동료이며 동지였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도 강희안을 보호했다.

"이 자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야심한 밤, 이경(二更). 국청이 끝났다. 살이 타고 살가죽이 벗겨지는 잔혹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태그:#사육신, #성삼문, #수양대군, #사정전, #낙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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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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