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동화다. 슬프고 처연한 동화. 아니 실화인가. 뭐라고 해도 좋다. 어른은 없고 아이들만 있는, 그래서 슬픈 이야기라는 것만은 분명하니까.

스웨덴 영화인 <천상의 릴리아>가 끝나고 나면 화면에 자막이 뜬다. "성매매로 착취를 당하는 세계 도처의 수백만 어린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십년 전에 만들어진 <천상의 릴리아>는 저열하고 추악한 어른들, 곧 기성세대에게 온갖 착취를 당하다가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는 가여운 아이들을 그린 작품이다.

열한 살 남자아이 볼로디아는 집에서 쫓겨나 노숙을 하고, 열여섯 살 여자아이 릴리아는 엄마한테 버림을 받은 뒤 남의 나라로 끌려가 성적인 학대를 당한다. 진정 아이들을 보살피고 감싸는 어른은 거기 없다.

천상의 릴리아(2002), 루카스 무디슨 연출, 옥사나 아킨쉬나 주연 아이의 인권유린을 진지하게 다룬 문제작.

▲ 천상의 릴리아(2002), 루카스 무디슨 연출, 옥사나 아킨쉬나 주연 아이의 인권유린을 진지하게 다룬 문제작. ⓒ 루카스 무디슨


<천상의 릴리아>의 첫 장면은 그래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다. 릴리아는 포주한테서 간신히 도망쳐 나와 거리를 마구 내달리지만 어디에도 구원의 손길은 없다. 경찰을 발견하곤 더욱 겁을 집어먹는다. 도움을 청해야 할 경찰을 보고 외려 공포심을 느끼는 릴리아. 부조리한 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릴리아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가 결국은 출구 없는 벽에 갇힌 듯, 난간에 올라 찻길로 뛰어내리고 만다. 이것이 영화의 첫 장면이다. 우리는 릴리아의 참혹한 고통을 똑똑히 마주한 채로 <천상의 릴리아>를 끝까지 봐야 하는 것이다.

세월은 흘려 이제 <줄탁동시>이다. <줄탁동시>도 세상으로부터 상처받고 학대받는 아이들을 그리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온 준, 조선족 여자아이 순희, 동성애자인 현. 이들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이다.

준은 주유소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탈북자란 이유로 돈을 받지 못하고 쫓겨난다. 순희는 주유소 사장한테 성추행을 당하기 일쑤다. 현은 부르주아 게이의 연인 노릇을 하지만 그 남자랑 잘 섞이지 못하고 이따금 노래방 같은 데서 늙은 남자의 놀이 상대가 된다. 주유소에서 쫓겨난 준은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팔고, 몸을 팔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수치스러워 빗속을 하염없이 걷는다. 현은 부르주아 남자의 고급 오피스텔에 얹혀산다. 인형처럼 거의 갇혀 살다시피 하는 현은 자주 창밖을 내다보고 자유를 꿈꾸는 듯이 춤을 추기도 하지만 차마 그 고급 오피스텔을 벗어날 용기는 없다.

어느날 현은 부르주아 남자와 심하게 다툰다. 남자는 현더러 자기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그도 모자라 현이 틈틈이 쓴 일기장을 찢어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일기장은 현의 유일한 숨통이다. 두 줄이든 세 줄이든 열 줄이든 글을 쓰면서 현은 겨우 숨을 쉬는 것인데, 그마저도 남자는 허락지 않는다.

이 어른 남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니 실은 말끔한 소년을 취하고픈 욕망이겠지) 그 가당찮은 이름으로 현을 구속한다. 그 남자는 현한테 차일까봐 두렵다며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이기적이다. 그 남자는 아내가 있으니 돌아갈 곳이 있겠으나, 현은 돌아갈 곳이 없다. 남자도 그 사실을 뻔히 안다. 현은 남자의 이중성에 절망한다. 주유소 사장이 준에게서 노동력을 착취한다면 부르주아 남자는 현에게서 성을 착취한다. 여기도 저기도 어른(스승이라 해도 무방하다)은 없다.

줄탁동시(2011), 김경묵 연출, 이바울 염현준 주연 보호받지 못하고 부유하는 아이들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영화.

▲ 줄탁동시(2011), 김경묵 연출, 이바울 염현준 주연 보호받지 못하고 부유하는 아이들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영화. ⓒ (주)얼라이브 픽쳐스, 경 픽쳐스


결국 현과 준은 남자의 오피스텔에서 연탄을 피워놓고 자살을 시도한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은 결국 하나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쌍둥이이다. 억압받고 착취를 당하는 이에겐 너, 나가 따로 없다. 우리의 영원한 벗님인 전태일이 그랬다. 네가 나고, 내가 너라고. 준과 현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저나 나나 가진 것 없는 자, 무산계급, 비빌 언덕 하나 없는 천애 고아라는 것을. 정신적인 쌍둥이, 혹은 계급적인 쌍둥이라는 것을.

"닫혀진 문 앞을 한참 기웃거려 떠난 아이가 그 문을 두드리려 했을 때 다른 편에 있던 아이가 그 문을 열었다." - 현의 일기에서

현과 준은 연탄가스를 마시고 점차 죽어가다가 현이 겨우 밖으로 뛰쳐나온다. 현은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른 하나 보이지 않는다. 릴리아의 처지와 너무도 똑같다. 누구 하나 보이지 않고, 현은 그저 마구 뛰다시피 걷는다. 달리 도리가 없다. 이제는 현이 아니라 준이다. 준이 고통스러워하며 어디론가 마구 걷고 있다. 현이 곧 준이고 준이 곧 현이다. 죽지는 않았으나, 그리하여 언뜻 희망이 있어 보이나, 진실은 이렇다. 곧 어디에도 사람이 없다는 것,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줄 어른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암전.

알 속에 든 생명이 껍질을 깨기 시작하면 어미닭도 밖에서 껍질을 쪼아주어 병아리가 무사히 알 밖으로 나온다는 '줄탁동시.' 그러나 준과 현의 삶에는 줄만 있지 탁은 없다. 오직 아이들만 껍질을 깨고 나오려고 버둥거릴 뿐이다. 기성세대이자 기득권자인 어른들은 그 껍질을 쪼아줄 생각이 없다.

아이들 혼자 힘으로 알을 깨고 나왔지만 어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현과 준이 살아났다고, 온전히 살아났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들은 가까스로 죽음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죽음에서 빠져나왔는지는 의문이다. 정말 그들은 살아돌아 왔을까. 누가 그렇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설령 어느 낙관주의자가 준이랑 현은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고 말해준들 이 슬픔이 가실까. 그런데도 감독은 이 영화에서 희망을 봐달라고 말한다. 감독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이기 때문일까.

줄탁동시 김경묵 이바울 염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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