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뉴스 배경화면을 제작중인 리셋 KBS뉴스 팀
▲ 파란 천쪼가리가 뉴스 배경? 뉴스 배경화면을 제작중인 리셋 KBS뉴스 팀
ⓒ 이동철

관련사진보기


"야, 거기 잘 붙여야 돼. 안 그러면 떨어져."
"선배, 여기는 카메라에 안 나오는 부분이죠?"

허접했다. 아무리 인터넷으로 시청자들과 만난다고 해도 명색이 방송뉴스다. 그런데 크로마 판(배경화면) 대신 파란색 천 쪼가리를 청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놓다니. KBS 새 노동조합(이하 새노조)의 파업 뉴스채널인 <리셋 KBS 뉴스9>(이하 <리셋뉴스>)팀의 김경래 기자와 김태현 카메라 기자는 주변의 안타까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대제작에 여념이 없었다(☞ <리셋 KBS 뉴스9> 바로가기).

"스탠딩으로 가면, 이거 그림자가 너무 심한데..."

제작 팀에서 우려가 터져 나왔다. "어쩌죠... 앉아서 하면 조금 괜찮으려나?" 리셋뉴스 진행을 맡은 정세진 아나운서의 제안에 리셋뉴스 제작을 담당하는 김경래 기자는 "오케이 그냥 앉아서 합시다"라며 바로 뉴스 포맷을 수정했다.

김경래 기자는 재빨리 노동조합 휴게실에서 정세진 아나운서가 앉을 의자를 가져왔다. 노점에서나 볼 수 있는, 등받이도 없는 조그만 의자였다. 정세진 아나운서는 익숙한 동작으로 의자에 종이뭉치를 얹고는 카메라를 보며 자신의 위치를 잡았다. 촬영스태프가 정세진 아나운서가 앉은 책상 옆에 은박돗자리를 설치했다. 반사판 대용이었다.

카메라 높이에 상반신을 맞추기 위해 종이뭉치를 깔고 앉은 정세진 아나운서.
▲ 의자 높이 조절은 종이뭉치로. 카메라 높이에 상반신을 맞추기 위해 종이뭉치를 깔고 앉은 정세진 아나운서.
ⓒ 이동철

관련사진보기


열악한 환경...그러나, 활기찬 현장

KBS 새노동조합이 파업 59일 째를 맞은 지난 3일. 여의도 KBS 연구관리동에 위치한 노조 사무실은 조합원들로 북새통이었다. 오후 집중 집회를 마친 라디오국 조합원들은 <리셋뉴스> 촬영장을 차지하고 선전물 제작에 여념이 없었다. 조합원들이 오후 일정인 파업 홍보 겸 야구 관람을 위해 목동야구장으로 출발한 뒤에야 <리셋뉴스> 7회의 앵커녹화가 시작되었다.

김경래 기자가 프롬프터(뉴스 진행자가 원고를 볼 수 있는 장치) 대신 앵커멘트가 적힌 A4용지를 촬영카메라 뷰파인더 밑에 붙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며 지나가던 조합원은 "우와~ 저것도 무대라고, 진짜 열악하다"면서도 "세진씨 파이팅!"이라고 격려했다.

김 기자의 큐사인으로 시작된 앵커녹화는 채 30분이 안되어 마무리됐다. 장소와 시설은 열악했지만, 정세진 아나운서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적절한 손동작, 그리고 편안한 시선처리로 녹화를 끝마쳤다. 다른 뉴스꼭지에 비해 조금 내용이 길었던 3번째 꼭지에서 프롬프터 교체로 인해 한 차례의 NG가 있었을 뿐, 정세진 아나운서의 멘트는 김 기자의 평가대로 "One Shot, One Kill"이었다.

리셋 KBS뉴스 제작팀이 반사판 대신에 야외용 깔개를 설치하고 있다.
▲ 반사판 대신에 등장한 야외 활동용 깔개 리셋 KBS뉴스 제작팀이 반사판 대신에 야외용 깔개를 설치하고 있다.
ⓒ 이동철

관련사진보기


6년만에 컴백한 정세진 "KBS, 강자 감시 역할 부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KBS 대표 아나운서로 <뉴스9>의 진행을 맡았던 정세진 아나운서는 <리셋뉴스>를 함께 하자는 후배들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고 지난 4월 24일부터 합류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오랜만의 뉴스진행 소감을 묻는 질문에 정세진 아나운서는 "부담은 느끼기보다는 함께 힘을 보태자는 마음이었다"며 "내용 있는 뉴스를 하니까 하드웨어적 측면은 부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뉴스9> 진행당시에는 탐사보도도 살아 있고 뉴스가 재미있었다"며 "기득권과 강자를 감시하는 KBS 역할이 부실하다고 (KBS 구성원)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KBS뉴스의 공정성 훼손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이번 파업을 통해 "후배들의 참신함을 담아내지 못하는 KBS의 낡은 틀이 꼭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정세진 아나운서는 "정권이 언론을 장악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생각을 버렸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함께 전했다.

KBS 연구동 건물 옥상에서 뉴스 리포트 녹화중인 KBS 리셋뉴스 팀.
▲ 리포트는 옥상에서. KBS 연구동 건물 옥상에서 뉴스 리포트 녹화중인 KBS 리셋뉴스 팀.
ⓒ 이동철

관련사진보기


이날 녹화는 노조사무실에서 연구동 옥상으로 장소를 옮겨 계속 진행됐다. 아직 뜨거운 햇살이 남아있던 오후 5시. 연구동 옥상에서는 김태현 카메라 기자가 광우병 보도 꼭지 리포트 녹화를 위해 삼각대에 촬영카메라를 설치하느라 분주했다.

"얼굴이 너무 번들거리지 않나요? 오랜만이라 긴장되네!"

KBS국제센터를 배경으로 선 이수연 기자는 리포트에 앞서 연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광우병 관련 꼭지 리포트를 맡은 이 기자는 <리셋뉴스> 참여 과정에 대해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농수산식품부 출입 기자였다"고 묘한 인연을 소개했다. 이 기자는 "현장에서 취재하고 땀 흘린 건 후배들"이라며 "마지막 리포트에 힘을 보탰을 뿐"이라고 애써 말을 아꼈다. 그 곁에선 이 기자의 아들 종민이가 엄마의 촬영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입사 6년차인 김태현 카메라 기자는 <리셋뉴스> 1회부터 촬영을 담당했다. 카메라 기자는 구노조 가입비율이 더 높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 기자는 "어느 노동조합에 가입할 것인가는 내 신념의 문제다"라며 "비율은 낮지만 새노조에도 카메라 기자들이 있다"고 답했다.

두 달 가까이 진행된 파업으로 생활적 어려움이 크지 않느냐고 묻자 "국민들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영방송 직원인데 그 값어치를 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추모현장에서 "KBS뉴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의 뼈저리게 느꼈다"는 김 기자는 "리셋뉴스가 KBS뉴스의 공정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KBS, '이달의 기자상' 탄 <리셋뉴스> 팀원 고소

KBS기자협회실의 비좁은 공간에서 뉴스편집중인 리셋뉴스팀
▲ 뉴스 편집중인 리셋뉴스팀. KBS기자협회실의 비좁은 공간에서 뉴스편집중인 리셋뉴스팀
ⓒ 이동철

관련사진보기


"시설과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면 4시간이면 끝날 작업인데 장비가 열악해서 다들 고생이네요."

송명훈 기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리셋뉴스>의 편집실로 사용되고 있는 연구동 기자협회실은 후텁지근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10여명이 모여 앉아 뉴스편집에 여념이 없었다. 파업 전 경인지역 취재 담당이었던 송명훈 기자는 4·11 총선 정국을 뒤흔든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문건 특종의 주인공이다. 타 언론이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은폐'에 초점을 맞출 때, 민간인 사찰의 총체적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1만 5천부의 공판기록을 모두 읽어보고 관련 증거를 CD로 확보했다.

송명훈 기자는 "<리셋뉴스>팀 모두의 노력으로 얻은 결실"이라고 겸손해 하면서도 "납품기일에 맞추듯 기사를 찍어내던 파업 이전의 관성에서 벗어나 사안에 대해 깊이 있게 집중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송 기자는 "<리셋뉴스>를 제작하며 외부적 조건이 어떻든 간에 저널리스트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하고 있다"며 리셋뉴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런 노력들에 힘입어 리셋뉴스팀은 민간인 사찰 문건 연속보도로 한국기자협회의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방송기자협회와 한국방송학회의 '이달의 방송기자상'을 수상했다.

한국기자협회의 이달의 기자상 선정을 담당하는 이효성 성균관대 교수는 리셋뉴스팀이 취재과정에서 공정성을 지키는 동시에 보도내용이 불법사찰 문제를 구체적인 물증으로 뒷받침해 민간인 사찰 문제를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간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균형보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위성방송 <알자지라> 역시 카이로 특파원을 한국에 파견하여 <리셋뉴스>에 대해 취재하는 등 외신들도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러한 <리셋뉴스>에 대한 호의적 평가와는 달리 KBS사측은 <리셋뉴스>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KBS 새노조에 따르면 KBS사측은 지난 3월 13일 <리셋뉴스> 1회가 유튜브에 업로드 된 지 1시간 만에 유튜브 측에 공문을 보내 <리셋뉴스> 동영상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리셋뉴스> 2회가 방송된 직후인 3월 중순께에는 김현석 KBS 새 노조위원장과 <리셋뉴스> 5회까지 진행을 맡았던 엄경철 기자 그리고 제작을 담당한 김경래 기자를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또 3월 30일에는 <리셋뉴스> 리포트에 참여한 심인보 기자 등에게 '인사위원회에 회부할 것'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

"파업 끝나도 <리셋뉴스>는 계속될 것"

송명훈 기자(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외 리셋KBS팀은 민간인 사찰 문건 특종보도로 한국기자협회가 수여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한 리셋KBS뉴스팀 송명훈 기자(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외 리셋KBS팀은 민간인 사찰 문건 특종보도로 한국기자협회가 수여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 KBS 새노동조합 제공

관련사진보기


"방송학회 등 주류 언론계가 <리셋 KBS 뉴스9>의 경쟁력을 인정한 상황에서 KBS사측은 적잖이 당황스러울 겁니다. 징계를 내렸다가 오히려 <리셋뉴스>가 더욱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될까봐 우려스러운 것이죠."

엄경철 기자가 말했다. 엄 기자는 2010년의 노조위원장으로 새노조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KBS사측으로부터 이미 정직 6개월의 징계처분을 받았다. 사측의 징계회부에 대해서 엄 기자는 "마음이 좋지만은 않다"고 답답해하면서도 "후배에게 밀려 앵커에서 잘렸다"고 엄살을 부리는 등 여유를 보였다.

엄경철 기자가 <리셋뉴스>의 중요한 성과로 꼽은 것은 '탐사보도의 복원'이었다.

엄 기자는 "사측의 해당 간부가 탐사보도의 90% 이상이 파괴되었고 말할 정도로 KBS의 탐사보도는 궤멸직전의 상황"이라며 "리셋뉴스 아이템 대부분이 탐사보도의 시스템 정신을 살려가고 확산시키는 작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엄 기자는 또 "파업이 끝나더라도 <리셋 KBS 뉴스9>를 KBS노동조합의 독자적 채널로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나 PD가 취재한 아이템이 사측에 의해 보도에서 누락될 경우 노동조합에서 이를 받아 대안 채널로 가져 갈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엄경철 기자의 말을 전해들은 뉴스편집실의 김경래 기자를 비롯한 리셋뉴스팀은 자지러지며 "말도 안 돼"라고 손사래를 쳤다.

"저희들은 이제 시작입니다. 업로딩까지 마치면 자정 무렵에나 끝이 날까요?"

인사를 건네고 뉴스편집실을 나서는 기자에게 까맣게 탄 얼굴의 김경래 기자는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그렇게 거리에서 그리고 10평 남짓 좁은 방에서 그들이 말하는 "제대로 된 뉴스 만들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태그:#KBS파업, #리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밤이 서서히 물러갈 때, 이 봄날의 꽃이 자신들을 위해 화사하게 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자신을 지키게 될까?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