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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풍경. 이 사진은 사다페네 집에 초대 받아서 마셨던 술자리다.
 술자리 풍경. 이 사진은 사다페네 집에 초대 받아서 마셨던 술자리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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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마지막 날 밤 우리 일행은 쫑파티를 했습니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의 파티에 술이 빠질 수가 있나요? 그런데 여긴 금주의 나라 이란이 아닌가요? 그래도 방법이 있는 모양입니다. 어떻게 술을 구했는지 모르겠는데 술을 구했습니다. 복숭아 맛이 나는 음료에 70도짜리 술을 조금 섞고 거기에 레몬을 넣어 마시는 것입니다.

애들은 빼고 어른들끼리 한 방에 모여들었습니다. 탁자에는 오이 잘라놓은 것, 사과, 피클 등의 안주와 함께 70도짜리 술과 맥주 모양의 병에 담긴 음료, 그리고 레몬 잘라놓은 게 있었습니다. 이어 안경을 낀 젊은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그가 술 만드는 시범을 보일 모양이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했습니다.

엄숙한 표정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신중한 태도로 컵에 비알콜을 7부 정도 붓고 나머지 1부는 70도짜리 술로 채운 후 아주 능숙한 모습으로 레몬을 짜 넣었습니다. 정말 그의 태도는 진지했는데 그 진지함이 웃겼습니다. 너무 엄숙하게 폭탄주를 제조했기 때문입니다.

그깟 폭탄주 만드는 일, 하면서 술 만드는 게 우리에겐 하찮은 일이지만 그에겐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발각되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아주 위험하고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도사린 일이었기에 그의 표정이 그렇게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이게 음주 국가와 술 권하는 사회의 다른 단면인 것입니다.

이제 한 번 시범을 보였으니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그에게 언지를 주었는데, 그는 우리가 하는 말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기가 하는 일에 집중돼 있다는 표정으로 계속 잔을 달라고 재촉했습니다. 몇 잔 더 만들고 나서 나머지는 우리가 만들겠다고 완곡하게 말하자 그는 근사하게 한 잔을 만들더니 갑자기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열심히 만들었으니 한 잔 정도야 하면서 그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마셨던 잔에 한 잔을 더 마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또 급하게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이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술이 취해서 자기 혼자서 다 마셔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두 잔만 마시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를 떴습니다.

이제 우리끼리 알아서 자기가 마실 술을 만들었습니다. 나도 내 컵을 가져와서 만들었는데 태어나서 이렇게 화끈한 술은 처음 먹어봤습니다. 소주나 맥주, 막걸리, 양주, 와인 등 술이란 술은 다 마셔봤지만 이렇게 맛있고 효과 만점의 술은 처음 먹어봤습니다.

레몬의 상큼함과 복숭아향의 달콤함 때문에 맛도 너무 좋았는데 알콜 70도는 사람의 기분을 순식간에 바꿔주었습니다. 갑자기 너무 기분이 좋아지고 함께 여행을 했던 선생님들이 오래된 친구처럼 친근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기분이 너무 들떠서 웃기지도 않는데 엄청 웃었던 것도 같습니다.

한편 우리가 술을 마시는 동안 호텔 매니저는 문 밖에서 왔다갔다 하며 빨리 술자리를 끝내라고 종용했습니다. 만약 적발되면 그에게도 책임이 있기에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기다리지 못하고 그는 우리 방으로 들어와 빈 병을 챙겨서 나갔습니다. 음주국가의 그는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술 먹는 습관은 아주 독한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구석에 숨어서 술이 깰 때까지 기다리는 것인데, 우린 태평하게 '하하호호' 하면서 한없이 길게 술자리를 가졌으니까요. 이 또한 음주 국가와 술 권하는 사회의 음주문화의 차이였습니다.

이날 우린 좀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눈살이 찌푸려지는 사람들이 유태인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안하무인격으로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어울려 다니며 떠들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우리는 유태인처럼 몰상식한 여행자가 됐습니다. 다 술이 원인이었지요.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에는 우리 말고도 이란인도 있고, 파키스탄인과 일본인, 유럽 여행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자기 방에서 자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여럿이 한 방에 몰려 앉아 술 한 병을 나눠 마시며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웃고 떠들었습니다. 특히 내가 한 몫 했습니다. 내 술버릇은 웃는 것입니다. 평소보다 서너 배는 많이 웃습니다. 웃기지 않는 상황에서도 정신 나간 여자처럼 웃었던 것 같습니다. 이게 다 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난 70도짜리 알콜에 완전히 취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술자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와 화장실에 양치질 하러 갈 때 열쇠를 안 갖고 나왔는데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그때가 아마도 밤 한 시는 됐을 것입니다. 이 숙소는 문이 닫히는 순간 바로 잠겨버리는 형태인데 정말 큰일이었습니다. 방에는 애들이 자고 있지만 우리 애들은 잘 때는 누가 업고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자는 스타일이라 문이 두드린다 하여 문을 열어줄 그런 애들이 아니었습니다. 밤 1시에 방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밖에서 정말 난감했습니다. 옆 방 사람이 자기 방에서 자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1인용 침대에서 함께 자는 건 서로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애들을 깨우는 것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습니다. 얼마간 두드리고 있을 때 맞은편 방문이 열리며 이란인이 나왔습니다. 한밤중에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깬 것입니다.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곧 매니저가 나왔습니다. 그는 좀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평소 인사성 바른 그가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으로 왜 그러냐고, 하는 걸 보면 화가 난 게 분명했습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문을 따주어 지옥에서 천당으로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이게 다 술 때문이었습니다.


태그:#금주국가, #70도 알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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