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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全)씨라는 것이 창피하고, 어쩔 때는 치욕스럽기 까지 하다"

올해로 54세이신 어머니가 5월쯤 되면 자주 하시는 말씀이다. 내 어머니는 전남 광주 출신이다. 1959년 광주 조선대학교 근처에서 태어나신 어머니가 22세가 되던 해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어머니는 나와 소주 한 잔 하면서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직 아버지를 만나기 전, 전남 화순에서 일을 하고 계셨던 어머니는 광주에서 큰 일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가족이 걱정돼 광주로 돌아가기로 하셨다.

하지만 광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계엄령이 선포돼 광주에서 밖으로 나가는 그리고 밖에서 광주로 들어가는 모든 길목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전화도 불통이었다. 언론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은 '간첩이 나타났다' '북한군이 침투했다' '대학가와 도청 근처가 난리란다' 등이었다.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모두 광주에 있었다. 특히 본가가 조선대학교 근처에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셨다.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께서는 바로 코앞 고향으로 갈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당시 가족들 걱정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1980년 광주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지나간 과거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가슴 아픈 과거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내가 전(全)씨라는 것이 창피하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이 사건의 중심이었던 또 다른 전두환씨는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잘 살고 있다. 또한 지난 2008년 4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에게 당해보지도 않고"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갈 계획이 없다고 한다. 더욱 더 가슴이 아프다.

친일 역사도 그렇다. 미꾸라지 담 넘어가듯 그렇게 잊혀져간다. 과거를 통해 반성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상식적인 사회가 절실하다.

5월 18일. 민주화를 열망하며 목숨을 바친 시민들을 위해 한 번이라도 묵념을 하는 것은 어떨까. 또한 수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내 어머니의 성씨를 부끄럽게 만든 전두환씨에게 반성과 자숙을 요구한다.

잊지 말자. 32년 전 5월 18일.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기억하자.

5.18 기념재단 누리집 바로가기


태그:#5.18, #민주화운동, #광주,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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