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람이 살기 시작하고 계급이란 게 생겨 상전과 아랫것들로 나뉜 이후 대대로 그래왔다. 천한 것들이란 언제나 윗놈들 위해 살거나 죽었다. 오직 윗놈들의 편의와 즐거움을 위해 때론 웃음을 팔았고, 어쩔 수 없이 몸도 팔았다. 그랬던 세상이 끝난 게 과연 언제였나. 아니 과연 지금은 끝났다 말할 수 있는가.

광대 하선이도 마찬가지. 양반님네들 노는 자리에 불려가 춤추고, 입담 푸는 게 업이었다. 잔칫상 음식 몇 조각 넙죽 받으면 족할 일이고, 엽전 한두 개면 그날은 장땡인 법. 그러다 높은 양반에게 잡혀가고 영문도 모른 채 궁궐로 갈 거라 듣는다. 뿐인가. 궁궐의 가장 지체 높으신 분, 그래 임금을 뵐 거라니.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린가. 저잣거리에서 소리나 해대고, 춤이나 추던 광대가 임금을 뵙다니. 혹, 어젯밤 잔치 자리에서 양반님네 앞에서 임금을 조롱하는 춤을 춘 것이 사달이 난 걸까. 임금이 누군가. 그 앞이라면 자기처럼 천하디 천한 것은 파리 목숨보다 가벼운 놈인 것을. 하지만 어쩌랴. 몸은 묶인 신세, 도망가기에도 글렀다.

그렇게 날벼락 같이 만난 임금 앞에서 지체 높은 그분은 하선에게 자신을 흉내내보라 하명하신다. 어느 안전이라고 임금을 흉내낸단 말인가. 까닥하다간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 분명한 일.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바람 빠진 풍선마냥 잔뜩 졸아버린 심장을 달래고 겨우 임금 흉내를 내고 만다. 그 다음 일은 더욱 가관. 비록 하룻밤이나 자신에게 (진짜)임금 대신 (가짜)임금 노릇을 하란다. 언감생심,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도망갈 수도 없는 법. 여긴 궁궐 아닌가. 당장 개미소리만 나도 궁궐의 무사가 칼을 차고 달려올 것이 뻔하다. 하선의 임금 노릇은 그렇게 시작한다.

하룻밤 대역을 너무 잘했을까. 그날 밤 이후로도 하선은 종종 불려가 가짜 임금 노릇을 한다. 그러다 진짜 임금이 의문만 남긴 채 정신을 잃고 하선은 진짜의 부재를 떼우기 위해 진짜보다 더한 가짜를 연기한다. 명분은 나랏일 때문이라지만, 도승지 허균이 던져준 은화 몇 닢이 발단이었다. 게다가 하는 일이라곤 진짜처럼 하는 '연기'. 그러고 보니 하선은 바로 광대였다. 자, 이제 광대의 진짜 광대 짓이 시작한다!

영화는 가짜 하선이 진짜 광해군을 그럴 듯하게 연기해가는 과정을 쫓는다. 자칫 무거워질 수도 있는 영화의 분위기는 실소를 자아내며 흥겹게 전개한다. 진짜 임금이 무사히 깨어나고 환궁한다는 줄거리로 끝난다면 영화는 존재 이유가 없다. 영화의 한 축은 임금을 그리 만든 배후를 쫓고, 또 다른 한 축은 가짜 임금 하선의 그럴 듯한 광대짓을 쫓는다. 전자는 음모를 쫓는 과정이고, 후자는 썩 훌륭한 연기자의 한판 신나는 연극이다. 연극의 무대는 궁궐이며, 조연은 조정의 신하와 중전마마.

별안간 잡혀간 궁궐에서 하선은 모든 게 불편하면서도 신기하지만, 타고난 성미 때문인가. 그 적응력 또한 놀랍다. 그리고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아니 그보다는 백성이 '진짜'로 원하는 임금으로 변해간다. 정치싸움에서 상처받은 중전을 위로하거나, 고리의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가족이 생사도 모른 채 뿔뿔이 흩어진 궁궐의 나인 사월에게 아비와 어미를 찾아줄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딱 거기뿐. 어차피 지금 임금은 '광해'가 아니라 '하선'이 아닌가. 광대 하선.

사월의 죽음으로 하선은 가짜의 탈을 벗고 진짜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욕망한다고 모두 이룰 수는 없는 법. 게다가 천것이 감히 임금이 된다니. 애초에 말이 안 될 일. 영화의 진보는 딱 여기까지다. 아랫것들의 운명이란 항상 그랬다. 권력을 쥔 자들의 노리개로 평생을 살든, 방패막이로 나가 대신 목숨을 잃는다. 그러고도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운명을 거스르는 일이란 꿈도 못 꾼다. 양반의 숫자란 참으로 적어 한줌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천한 것들 숫자란 그들 한줌보다 몇 배나 많음을 알면서도 어디 한 번 제대로 '꿈틀'할 생각도 못했다. 광대가 (비록 가짜로 잠깐이라지만) 임금 노릇이라니. 이렇게 본다면 영화는 파격이나, 하선의 광대짓이 단지 보름 만에 끝난다는 점에서, 또한 스스로 마침표를 찍는다는 점에서 영화는 기존 질서를 흔들지 않는다.

계급으로만 본다면야 광해와 하선은 하늘과 땅 차이다. 공통점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법. 그러나 궁궐에서 모든 것을 가진 것 마냥 권력의 정점에서 살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흔드는 조정 신하와 후궁의 소생이라는 출신 성분 사이에서 갈등하는 광해군의 사정도 저잣거리 하선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루하루 살기 위해 양반들 앞에서 춤을 추는 광대나 분명 조선의 임금이지만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임금이나 외로운 신세는 마찬가지.

영화의 처음은 유쾌하고, 중반으로 넘어갈수록 빠르게 전개된다. 어디까지 정확히 고증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궁궐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장면은 새롭고 재미있다. 게다가 주인공이 이병헌이다. 첫 사극 출연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로 그의 연기는 탁월하다. 특히나 이병헌의 목소리는 매력적이다. 지나치게 기름지거나 느끼하지 않은 저음의 목소리는 이병헌에게는 신께 받은 선물이다. 선물에서 만족하지 않고 노력과 열정으로 연기를 하는 게 이병헌의 진짜 매력일 터.

영화의 중간, 지방 고을 현감이 하찮은 권력을 이용해 어린 소녀를 노리개 삼는다. 비록 가짜지만 임금이 된 하선이 이때만큼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현감을 깨는 장면을 영화 내내 기대한 것은 순진한 탓일까. 사월이 가족들과 재회하는, 감동을 의도했으나 자칫 오글거림만을 선사했을 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건 감독의 현명한 판단이다.

광해 하선 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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