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대에서 동쪽으로 걸으면 634년(선덕여왕 3)에 창건된 분황사가 기다린다. 분황사는 '기다린다'는 표현을 쓰기에 가장 적절한 절이다. 왜냐하면 이름 자체에 '여인의 향기'가 가득 스며있기 때문이다.
분황사의 분(芬)은 '향기롭다'는 뜻이고, 황(皇)은 '임금'을 의미한다. 신라 역사에서, 아니 우리나라 국사 전체에서 '향기로운 임금'이라는 호칭을 부여하기에 가장 적절한 왕은 누구일까? 중언부언할 것도 없이 바로 선덕여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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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황사 탑에 이어, 현재 남아 있는 모전석탑 중 두 번째로 오래된 작품은 경북 의성 금성 탑리의 5층탑이다. |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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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에 그를 분황사에 머물게 했다. 원효도 죽은 뒤 아들 설총에 의해 분황사에 모셔졌다. 물론 그 원효는 타계 이후이므로 실존 인물일 수는 없고, 설총이 만든 소상(塑像)이다.
분황사에는 원효의 소상만이 아니라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도 있었다. 755년(경덕왕 14)에 조성된 거대 약사여래입상도 있었고, 기도를 올리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는 사찰이라는 <천수대비가> 전설도 깃들어 있었다. 아마도 신라 시대 내내 수많은 불신도들이 앞다투어 분황사로 발걸음을 했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설과 탑만 남아 있다. 몽고와 왜가 쳐들어 와 신라의 눈부신 문화재들을 모두 없애고 말았다. 그래도 국보 30호인 분황사 탑이 '현존 가장 오래된 모전 석탑'이라는 영예를 뽐내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분황사 탑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모전석탑이다.
또 한 가지 분황사에 남아 있는 것은 '삼룡변어전'이라는 우물이다. 신라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이 우물은 재미있는 전설을 가진 유적이다. 전설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는 이름 속에 고스란히 숨어 있다.
삼룡변어정에는 용 세 마리가 살았다. 신라를 지키는 용들이었다. 그런데 795년(원성왕 11) 당나라 사신이 용들을 물고기로 바꾸어서 잡아갔다. 원성왕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추격군을 보내어 세 용을 다시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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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황사 바로 앞 황룡사 터에 노을이 밀려오고 있다. 황룡사터 당간지주가 단석산 하늘 위를 물들이는 노을을 배경으로 아득히 서 있다. |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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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대의 사찰 황룡사, 몽고군이 불살랐다신라 시대, 분황사 앞에는 대단한 사찰이 있었다. 2만4천여 평이나 되는 절터를 자랑하는 '동양 최대의 사찰' 황룡사였다. 553년(진흥왕 14)에 창건을 시작, 643년(선덕여왕 12)에 93여 년만에 겨우 완성되었다. 하지만 황룡사는 1238년(고려 고종 25) 들어 순식간에 없어졌다. 몽고군들이 불을 질러 태워버렸던 것이다.
지금도 저물 무렵 황룡사터에 가면, 그때 몽고군들이 지른 불길의 여운이 남은 것인지, 단석산 위를 넘어가던 노을이 길게 기운을 내리뻗쳐 황룡사 당간지주를 붉게 물들이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당간지주 사이에는 큰 거북 한 마리가 무거운 두 돌을 떠받치느라 힘에 겨워 얼굴을 땅에 맞대고 있다.
거북은 무슨 소리를 듣고 있을까. 진흥왕 이후 고려 시대까지 세상을 울렸던 황룡사 전성기의 불경 소리일까, 법당과 탑을 부수고 불을 지르느라 아우성을 질러대던 몽고군들의 찢어진 외침소리일까.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데…….
통일을 기원하여 세워진 황룡사<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황룡사 탑을 세운 뒤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하고 썼다. 이는 되짚어 말하면, 황룡사 탑이 통일을 염원하여 건립되었다는 뜻이다.
일연은 그렇게 말하는 증거로, 자장이 중국에 있던 636년(선덕여왕 5) 대화지라는 못가를 지날 때 물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황룡사의 기둥을 처음 세운 날 밤에 공장이 아비지의 꿈에 백제가 멸망하는 광경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꿈에 놀란 백제인 아비지는 공사를 중단하였다. 그랬는데, 문득 천지가 캄캄해지면서 노승과 장사들이 출현하여 기둥을 세우고는 사라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아비지는 일을 중단한 것을 뉘우치고 공사를 재개, 결국 탑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경주 남산 탑골 '부처바위'에 황룡사의 밑그림으로 여겨지는 탑이 새겨져 있다. 또, 충북 진천 만뢰산 기슭에는 황룡사 탑을 본떠 나무로 지은 52.7m짜리 보탑사 3층이 있다. 비록 후자는 경주에 있지 않아 '신라 여행' 나그네가 답사하기에는 그리 쉽지 않지만, 그래도 시간을 만들어 정성껏 찾는다면 더욱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 황룡사 탑을 생각하게 하는 두 곳 |
경주 남산 탑골의 '부처바위'
남산의 북쪽 골짜기인 탑골에 들어서면 4면으로 불상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볼 수 있다. 이 바위를 흔히 '부처바위'라 부른다.
그런데 부처바위의 4면 중 한 면에는 희귀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보통은 불상이 많이 새겨져 있는 바위를 부처바위라고 할 터인데, 이곳 부처바위에는 불상도 많지만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도 두 점이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그림은 입산 이후 올라오고 있는 등산객을 똑바로 맞이하는 정면(북면)에 새겨져 있다. 탑 그림이 두 기가 바로 그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두 탑이 황룡사의 밑그림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황룡사를 복원할 때에 이 부처바위의 그림이 크게 참고되었다는 후문이다.
충북 진천 만뢰산의 보탑사
충청북도 진천군 만뢰산 자락에 보탑사가 있다. 김유신 생가에서 산 속으로 더 들어가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절인데, 황룡사처럼 통일을 기원하여 세운 거대한 목탑을 거느린 절로 유명하다.
보통의 사찰에 가면 탑 하나가 마당 가운데 있고 법당이 그 뒤에 있거나, 아니면 쌍탑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고 그 가운데의 뒤쪽으로 법당이 서 있다. 그런데 보탑사는 탑만 있다.
보탑사의 탑은 그 자체가 법당이다. 1층에서 3층까지 탑 안에서 오르내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동서남북으로 출입문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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