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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행궁 신풍루 앞에서 재연해 보인 무예24기 국궁활쏘기
▲ 무예24기 국궁활쏘기 수원 화성 행궁 신풍루 앞에서 재연해 보인 무예24기 국궁활쏘기
ⓒ 장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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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3, 4일) 1박 2일간 다녀온 수원 화성 파워소셜투어는 까마득히 잊고 살던 '우리 것' 등 전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바쁘게 사는 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었으며, 우리 전통문화가 참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준 투어였다.

또 바쁘게 사는 동안 잃어버렸던 '느림의 미학'이 요즘 유행어로 자리잡은 '힐링(healing)'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했다. 잘 아는 듯 너무도 잘 모르고 있었던 우리 문화를 조금씩 체험해가는 동안, 마음 한 구석에서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있던 자존심이 슬며시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일어섰다고나 할까.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에 세워둔 이정표가 이채롭다. 멀리 동북공심돈이 보인다.
▲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에 세워둔 이정표가 이채롭다. 멀리 동북공심돈이 보인다.
ⓒ 장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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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투어 첫 날 맨 처음 만나게 된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의 활쏘기 체험은, 우리 것은 멀리 하고 서양의 문화를 가까이 하는 동안 얕보게 된 국궁의 자존심을 되살리게 된 소중한 체험이었다. 한국의 신궁들이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갈아치운 기록들은 세계양궁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도 국궁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됐다. 언제부터인가 국궁은 양궁의 위세에 떠밀려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글쓴이의 뇌리 속에서조차 1박 2일 투어에 나선 국궁 지도 선생님을 한순간 시큰둥 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활쏘기 체험을 위해 사대에 올라 활 시위를 당겨 화살을 과녘으로 날려 보내는 첫 발을 쏘는 순간, 즉시 마음 속으로부터 국궁을 얕보게 된 것을 깊이 반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활쏘기 체험은 어땠길래 반성까지. 그 현장을 스케치해봤다.

수원 화성 연무대에서 처음 당겨본 활 시위... 이랬다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에서 바라본 동북공심돈
▲ 동북공심돈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에서 바라본 동북공심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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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 체험을 위해 사대에 올라서자 멀리 동북공심돈(東北空心頓墩)이 가까이 바라보이고 동북공심돈 바로 아래에 과녁이 위치해 있다. 국궁 체험에 나선 1인. 속으로 흠칫했다.

'아니, 저 멀리까지 화살을 날려야 하나!'

체험자 앞에는 활과 화살이 놓여 있었는 데 화살은 전부 10발이었다. 쏘나 마나한 게임이자 단 한 발로 과녁에 맞출 수 없을 거라는 자조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기우였다. 활쏘기 체험에 나선 체험자들은 금방 자신이 쏘아 날릴 화살이 먼 곳에 위치한 과녁이 아니라 바로 앞에 위치한 과녁이라는 데 안도하게 됐다.

'흠 그러면 그렇지!'

수원 화성 연무대에 시설된 활터(국궁 활쏘기 체험장),정조대왕이 수원 행차시 사용된 활터라고 전해진다.
▲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 수원 화성 연무대에 시설된 활터(국궁 활쏘기 체험장),정조대왕이 수원 행차시 사용된 활터라고 전해진다.
ⓒ 장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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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심돈 바로 아래에 위치한 과녁의 길이는 145m(대략 150걸음)이며 체험자 앞에 놓인 과녘은 25m 거리였다. 군에서 '영점사격'을 하는 거리와 동일했다. 활 시위를 당기는 것도 총알을 쏘는 영점사격과 다름없었다.

피체험자를 위해 활터에는 국궁을 가르치는 지도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 데, 함부로 활이나 화살을 만지작거리는 피체험장를 나무라며 과녘 길이는 물론 화살을 활에 걸 때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세세히 일러준 다음, 맨 먼저 당신이 시범 사격으로 화살 한 개를 과녁으로 날려보냈다. 쉭~, 화살은 바람소리는 내며 과녁에 명중했다. 일행들의 탄성이 절로 쏟아져나왔다.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에서 바라본 과녁, 옥색 과녁의 길이는 25m, 동북공심돈 아래 위치한 과녁은 145m이다.
▲ 활터에서 바라본 과녁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에서 바라본 과녁, 옥색 과녁의 길이는 25m, 동북공심돈 아래 위치한 과녁은 145m이다.
ⓒ 장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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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일행들도 글쓴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에 강하게 박히는 순간 의외라는 느낌이 탄성으로 흘러나왔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활쏘기 체험에 나서는 순간 적지않은 걱정이 생겼다. 국궁의 영점조정은 격발 위치에 따라 가늠쇠 따위를 조작하는 게 아니었다. 그때 난감한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 지도 선생님의 조수(?)였다. 그녀는 활쏘기 체험자들 곁에서서 영점조정의 기술을 알려주었다.

"화살 첫 발이 비켜간 만큼 과녁 중앙을 중심으로 전후좌우로 조금씩 (감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수원 화성 활터 사대에서 사법을 지도받고 있는 국궁 활쏘기 체험자들
▲ 사대에 선 체험자들 수원 화성 활터 사대에서 사법을 지도받고 있는 국궁 활쏘기 체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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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문제였다. 활의 영점은 피체험자들이 자기 활과 화살에 대해 혼연일체가 되어야 명궁 내지 신궁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비록 바로 앞에 보이는 25m 과녁조차 쉬워보이지 않았다.

첫 발을 쏘고 난 다음 그 느낌은 더 크게 다가왔다. 지도 선생님이 당기는 활시위는 가벼워 보였지만 막상 활시위를 당겨보니 쓰지 않던 근육들이 놀라고 있었다. 시위가 생각보다 팽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곤혹스러웠던 건 화살의 '오늬'를 시위에 감겨있는 '절피'에 꽂아넣고 당겨서 놓는 순간 탄력 때문에 손가락이 얼얼해진 것이다.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에서 사법을 지도받으며 시위에 화살을 올려놓은 모습
▲ 시위에 걸린 화살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에서 사법을 지도받으며 시위에 화살을 올려놓은 모습
ⓒ 장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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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 체험을 통해 개인에게 주어진 화살 10발 중에 4발이 중구난방으로 과녁에 박혔다. 그나마 4할대를 기록했지만 대부분의 화살은 커다란 벽체같은 과녁조차 빗나가 먼 데까지 날아갔다. 결코 쉽지 않은 국궁체험이었다.

사대에 선 피체험자들이 화살을 다 쏘고 나면 자기가 쏜 화살을 거두어와야 한다. 이때 25m 과녁에 박힌 화살이나 근처에 떨어진 화살 10개를 잽싸게(?) 회수한 사람은 사대로 빨리 돌아올 수 있지만, 과녁을 빗나가 멀리 날아간 화살 주우려면 꽤나 번거러운 일이기도 했다. 화살 100개를 쏘아 3할대를 유지하려면 7할(70개) 정도는 주워와야 하므로 괘 괜찮은 스포츠가 아닌가.

국궁 활쏘기 체험에 나선 파워소셜블로거 파르르(양경만)님
▲ 국궁 활쏘기 체험 국궁 활쏘기 체험에 나선 파워소셜블로거 파르르(양경만)님
ⓒ 장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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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활쏘기 체험을 통해서 얻은 큰 수확은 육신을 괴롭히는(?) 스포츠보다 한 차원 더 높은 '50보 100보' 론이었다. 우리 일행이 사대에 올라 시위를 당긴 결과가 비슷한 것 처럼, 만약 전시에 활을 손에 쥔 궁사들 앞에 나타난 적군이 50보 내에서나 100보 정도에 위치해 있으나 같은 결과를 연출할 게 뻔했다. 우리 일행과 동행한 '문화재 답사 전문가' 하주성님(블로거 온누리님)은 일행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해 주셨다.

"겨우 25m 과녁을 맞추는데 과녁을 왜 저렇게 멀리 두었지요?"

"아 그건 국궁의 사거리가 145m이기 때문입니다.145m 안에서 화살을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활과 화살의 부분 명칭(출처: 대한국궁문화협회 http://www.korea-bow.or.kr/index_subpage.htm?mainwhat=3)
▲ 활과 화살의 부분 명칭 활과 화살의 부분 명칭(출처: 대한국궁문화협회 http://www.korea-bow.or.kr/index_subpage.htm?mainwhat=3)
ⓒ 장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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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의 사거리 안에 들어온 적은 '독 안에 든 쥐'나 같은 형국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모르는 건 국궁의 과녁 거리뿐만 아니었다. 활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무기이자 원시적인 무기 중의 한 형태인데 글쓴이조차 활과 화살 및 활 시위 등에 붙여진 명칭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겨우 오늬, 시위 등 일반에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용어 뿐이었다.

특히 영점사격을 하면서 느낀 점은 활 시위를 당길 때 국가대표 선수들이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마다하지 않는 게 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시간을 다툴 수밖에 없는 국제경기에서 궁사들이 느끼는 스트레스나 감정의 기복이 대단할 거 같다는 생각이 단박에 드는 것이다.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의 국궁 과녁에 꽂힌 화살들. 중구난방이다.
▲ 연무대 활터 국궁 과녁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의 국궁 과녁에 꽂힌 화살들. 중구난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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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활쏘기 체험장에서는 그런 스트레스를 느낄 필요도 없거니와 활 시위를 당겨 화살을 날려보내는 순간 스트레스가 시위를 떠나 과녁으로 날아가는 듯한 통쾌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따라서 활과 화살의 명칭 등 국궁의 유래 등을 기록해둔 유인물이나 사이트를 만들어두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활 시위를 당기며 우리 말과 우리 문화 등을 동시에 체득하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으니 '일타삼피'의 '힐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 옆에 시설된 이정표가 이채롭다. 이곳에서 남극까지 거리는 14,114km.
▲ 국궁장 이정표 수원 화성 연무대 활터 옆에 시설된 이정표가 이채롭다. 이곳에서 남극까지 거리는 14,11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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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50보 100보(五十步 百步, 오십 보나 백 보나 도망치는 행동은 본질적으로 같다)론을 잠시 살펴보면 정조임금의 <수원 화성 능행도>를 살필 때 재미있는 결과를 얻게 될 것 같고, 국궁의 과녁이 시사하는 바까지 동시에 챙길 수 있을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오십보백보란 말의 어원은 전국시대 때 맹자(孟子)가 호전적인 혜왕에게 초청받아 갔을 때 나오게 된 이야기이다. 이랬다.

"(맹자 왈)왕께서는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에 비유하여 설명하겠습니다. 둥둥둥 북이 울리고 단병접전(短兵接戰)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갑옷을 버리고 창과 칼을 끌면서 달아나는데, 어떤 자는 백 보를 달아나서 멈추고 어떤 자는 50보를 달아나서 멈추었습니다. 50보를 달아난 자가 100보를 달아난 자를 비웃는다면 어떠하겠습니까?"
"(혜왕 왈)그건 안 될 말입니다. 다만 백 보가 아닐 뿐이지 그것도 역시 달아난 것입니다."

"(맹자 왈)왕께서 이런 이치를 아신다면 백성이 다른 나라보다 많기를(오늘날 특정 후보의 지지율과 무관하지 않음) 바라지 마십시오."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 행차시 드나들었던 '수원행궁' 입구 신풍루 모습
▲ 수원 화성 행궁 신풍루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 행차시 드나들었던 '수원행궁' 입구 신풍루 모습
ⓒ 장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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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왕의 물음에 대하여 호전적인 왕이 알아듣기 쉽도록 전쟁의 비유를 통해서 왕의 잘못된 생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결론을 내렸다. 근본적인 선정은 베풀지 않고 일시적인 미봉책만을 일삼으면서, 그만한 미봉책도 없는 이웃 나라의 임금을 비웃는다는 것은 마치 전쟁터에서 적에게 쫓겨 50보를 달아난 자가 100보를 달아나서 멈춘 자를 비웃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선정을 베풀지 않는 한 왕은 이웃 나라 임금을 비웃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백성이 도탄에 신음하고 있는 것에 큰 차이가 없는 이상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따라올 까닭이 없다. '50보 100보'의 어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 소설 <맹자> 중

수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 국궁 활쏘기
▲ 무예24기 국궁 활쏘기 재연 수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 국궁 활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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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1박 2일 첫 날 국궁 활쏘기 체험을 한 뒤, 이틀 뒤 마지막으로 수원 행궁 신풍루 앞에서 재연된 무예24기를 관람하며 다시금 국궁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우리는 겨우 활쏘기 체험이었지만 정조임금 재위 당시 창설한 장영용의 무사들이 당기는 활 시위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당시 이들은 무과에 급제한 용사들이었으며 정조임금의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사들이었던 것이다.

수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 국궁 활쏘기
▲ 무예24기 국궁활쏘기 수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 국궁 활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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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들이 당기는 활 시위는 150보 거리(145m)에 위치한 가상 적군들이 미처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날쌘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는 듯 단박에 과녁에 꽂히며 백발백중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이 활을 쏘는 자세는 정중동(靜中動)으로 굳어(?) 있는 게 아니라 매우 동적(動的)으로 움직이면서도 화살은 정확히 목표물을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등을 행차할 때 150보 정도의 근거리 경호에 가장 적합한 무기가 활이었던 것이자, 총이 등장하기 전까지 활은 개인의 호신은 물론 왕을 경호하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최상의 무기였다.

정조임금이 머문 수원 행궁을 돌아보는 동안 행궁의 벽에 그려진 <정조대왕 능행도>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장면과 맞딱뜨렸는데 행차 선두에는 여지없이 활을 무장한 경호 무사들이 말을 타고 앞장서고 있는 모습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가상 적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는 무기를 갖춘 모습이다.

따라서 50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으나 100보 또는 150보까지 떨어져 있는 가상적은, 말 그대로 '50보 100보' 밖에 안 되는 사거리에 노출돼 있는 '죽은 목숨'과 다름없는 것이다.

수원 화성행궁 내에 그려진 정조대왕 능행도.원내가 정조대왕을 태운 말이다. 왕의 행차도에서 용안이나 어진 등 왕의 실체는 생략한다.
▲ 정조대왕 능행도 수원 화성행궁 내에 그려진 정조대왕 능행도.원내가 정조대왕을 태운 말이다. 왕의 행차도에서 용안이나 어진 등 왕의 실체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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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조임금의 친위부대 무사들인 장용영의 무사들이 무예24기를 통해 내뿜는 근거리(25m) 사법에 노출된 목표물은 둥근 화살촉 임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정도로 굉장한 파워가 느껴졌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깃 소리가 이는 듯 순식간에 목표물을 관통하는 것이다. 화살이 통쾌하게 목표물을 맞추는 순간 순식간에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수원 화성으로 1박 2일 정도의 일정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면 꼭 체험해 봐야 할 게 국궁체험과 무예24기 공연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요걸 빼놓고 수원 화성 200% 즐겼다고 말할 수 있겠나.

요즘은 근거리부터 장거리까지 망라하여 어디 숨을 곳조차 없을 정도지만 서양에서도 활은 한때 최고의 무기였다. 궁사는 최고의 저격수란 말일까. 작가 귄터 블루멘트리트(Gunther Blumentritt)는 그의 저서 <전략과 전술(Strategie und Taktik, 부제 : 페르시아전쟁에서 핵전쟁까지)>(1960년)에서 활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었다.

당시 장사정 무기는 활(궁사)로서 그 사거리는 150보, 즉 130m에 불과(*동서양의 거리 차를 느끼게 된다.)하였다. 현재 우리는 장사정 거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수치 개념을 염두에 두고 고대 연구에 임할 필요가 있다.(1813~15년 해방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보병 화기의 최정 사정(거리)은 150m 불과했다.) 민활한 아시아산 말을 탄 아시아 궁수는 100보 내지는 150보 되는 거리내에서 팔랑스를 공격하였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적 궁수의 사정권인 100보 내지는 150보 되는 구간은 최대한 신속하게 속보로 돌진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수원 화성의 연무대에 들러 체험한 국궁 활쏘기 체험의 실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무기였으며, 50보는 물론 100보 150보 내외에 위치한 가상 적을 순식간에 살상할 수 있는 무기였던 것이다. 활(궁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적 궁수의 사정권 돌파기술을 언급했겠는가.

정조임금 당시의 조선국이나 유럽에서 조차 100보나 150보 거리를 사정거리에 둔 걸 보면, 활 시위를 떠난 화살의 살상거리는 대략 150보 거리(145m)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근거리에서 쏘아 본 영점사격의 위력은 150보 바깥의 과녁보다 엄청난 파괴력을 지녔던 매우 흥미진진한 게임이었다. 그렇다면 정조대왕의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사들이 무예24기를 통해 쏜 국궁의 모습은 어떨까.

정조대왕의 친위부대 장용영 무사들의 활쏘기(사법)은 이랬다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의 국궁활쏘기
▲ 장용영 무사들의 활쏘기(사법)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의 국궁활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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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 활의 줌통을 부드럽게 붙들고 화살을 집은 다음 화살의 오늬를 활 시위의 절피에 끼워넣는다.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의 국궁활쏘기
▲ 장용영 무사들의 활쏘기(사법)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의 국궁활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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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궁사는 목표물을 주시하며 활 시위를 당길 준비를 한다.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의 국궁활쏘기
▲ 장용영 무사들의 활쏘기(사법)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의 국궁활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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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사의 시선은 목표물을 주시하고 있고 머리 위로 올라간 활은 내려올 때 시위를 당기면서 목표물을 향하게 한다. 마치 올림픽에서 권총사격 경기를 보는 듯 하다.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의 국궁활쏘기
▲ 장용영 무사들의 활쏘기(사법)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의 국궁활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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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작은 짧은 순간에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의 국궁활쏘기
▲ 장용영 무사들의 활쏘기(사법)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의 국궁활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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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오감을 총동원해 피눈물 나는 연습이 만들어낸 산물이 궁사들의 실력이자, 백성들과 나라와 왕을 지켜준 국궁의 면모였다. 그러나 여행자한테 국궁 활쏘기 체험은 단지 한 무사의 손에 쥐어진 활과 화살이 갖는 기능적 측면만은 아니었다.


활터에서 바라보이는 수원 화성의 동북공심돈은 물론 나지막하게 빙 둘러 쌓아둔 성곽의 아늑함 때문인지, 활 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놓는 순간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는 통로가 한 순간에 열리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를 관람하고 있는 관광객들의 뒷모습이 정겹다.
▲ 무예24기 관람자들 수원 화성행궁 앞에서 재연된 정조대왕 친위부대 장용영의 무예24기를 관람하고 있는 관광객들의 뒷모습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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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한 순간 판단은 화살이 활 시위를 떠난 듯 돌이킬 수 없는 '이발지시(已發之矢)'와 다르지 않는데, 당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으로 정조대왕이 비통에 빠지지 않았든들, 수원 화성의 존재는 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참조하면 노론 벽파와 소론 시파 등이 당쟁 싸움에 몰두할 당시 정조대왕 등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게 폐쇄적인 성곽이었다면, 오늘날 수원시(시장 염태영)는 오히려 정조대왕이나 사도세자가 남긴 유산으로 인해 열린 도시로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도시가 됐다. 참 아이러니한 역사다.


아버지의 손에 처참하게 죽어간 아들 때문에 그 아들이 다시 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까지 3대로 이어지는 '멸문지화(滅門之禍)'가 조선의 역사며, 수원 화성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효심의 역사와 열린 세상을 향한 밑거름이었다니. 수원시가 지향하고 있는 '사람이 반갑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된 게 아니었다.


그리하여 아프디 아파 더 이상 아플 곳이 없어 뼛속까지 아픈 비탄의 역사가 만든 도시 속에서, 활 시위를 당기면서 50보 100보를 되새겨 보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불과 200여 년 전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사람을 얼마나 무서워 했으면, '사람이 반갑다'며 손을 내밀까. 50보 100보란 말이다.


수원이 내게 맨 먼저 손을 내민 곳이 동북공심돈이 빤히 보이는 활터였다. 활터에 서면 정조대왕의 숨결이 절로 느껴진다. 당신께서 친히 이곳에서 활 시위를 당기며 가슴 속에 또아리 튼 아픔 전부를 날려버리며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은 역사적 장소가 아닌가.

* 수원 화성 답사기는 계속 이어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다음뷰에 실렸습니다.



태그:#국궁 활쏘기, #무예24기, #수원 화성행궁, #수원화성 연무대 활터, #활쏘기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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