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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중순, 절임배추로 뒤늦게 김장을 했다. 김장이라야 배추 포기수로는 20포기가 될까말까 했지만, 포장된 박스를 풀어 배추를 꺼내면서 절임 배추를 보는 마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난해 이맘때, 남편은 동네 알고 지내는 김씨 아저씨의 소개로 절임배추 '알바'를 했다.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집 앞에는 남편을 데리러 갈 차가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틀 꼬박 일하고 밤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나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할 만했어?"라고 물었다.

"일손이 달려서 8순 할머니도 같이 하는데, 쉴 짬이 없었어. 날짜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주문받은 쪽에서 애가 달았지. 배추 절이는 일이라 쉽게 생각했는데, 산더미처럼 쌓인 배추가 엄청나더군."

그날, 남편은 밤새 끙끙 앓았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다음, 김씨 아저씨가 우리 집에 와서는 남편을 찾았다.

"이 선생! 집에 있어~?"

남편이 냉큼 일어나 김씨 아저씨를 맞았다. 아저씨가 웃으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어뗘? 할 만했어? 첨이구 안 해본 일이라 힘 좀 들었을껴~ 그래도 괜찮지?"
"아, 그럼요. 소개해주셔서 저야 아저씨한테 고맙죠~."

들어오셔서 차 한잔 하시라고 해도 아저씨는 볼일이 있다면서 흰 편지봉투를 건네고는 총총히 사라지셨다.

학교 방학 때마다 배추 절이는 알바했던 강사 남편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이었지만, 대학 시간강의를 하는 남편은 종강이 되면서부터는 수입이 완전 제로가 된다. 20년 동안이나 반복되는 일이었다. 밥벌이로 공부하면서 학자로 살기에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옆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하고 살았던 것 같다. 딱히 특별한 자격증이 있어서 반듯한 직장에서 일했으면 좋으련만, 나 역시 시간일로 하는 아이돌보기, 도서관독후활동, 활동가 등으로 짬짬이 생활비를 벌었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그것도 할 만하면 다시 그만둬야 했다. 방학이면 남편도 공부와 연결되는 번역 작업을 했다. 하지만 그게 현금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설령 번역료를 받았다 해도 먼저 대출해서 쓴 돈을 갚는 데 급급했다.

우리 부부는 이제 늙지도 젊지도 않은 50대의 나이였다. 나는 남편이 교수의 꿈을 내려놓고 더 늦기 전에 뭔가 다른 일을 찾았으면 했다. 어쩌면 우린 이미 늦었는지도 몰랐다.

남편이 내게 겸연쩍게 웃으면서 흰봉투를 건넸다. 절임배추 이틀 알바비 16만 원이었다. 그날 저녁 남편이 좋아하는 막걸리에 오징어 김치부침개를 안주로 먹으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여보, 그동안 많이 생각해봤는데, 당신 학교 강의하는 거 말고 다른 일을 찾아보면 어떨까? 물론 당신 그동안 해왔던 일이 공분데 그걸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 싶어. 하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계속 가는 게 난, 좀, 힘드네…."

남편은 성품이 온화하고 품이 넓은 사람이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르치는 것에 열정이 많다. 그래서 그 앞에 불쑥 이런 얘기를 하기까지 많이 망설였다. 내 말을 잠잠히 듣던 남편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꾹 다물고 어렴풋한 미소를 띄며 내 손을 잡았다.

"미안해~ 당신 고생 많이 시켜서… 그래서… 그동안 당신한테 말 안 했는데, 나도 그런 생각을 왜 안 해봤겠어. 여기저기 일을 알아보다가 어디 한 군데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 온 데가 있어. 마침 내가 했던 공부를 활용할 수 있는 곳이어서 용기를 냈어."

뜻밖이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에 대해 남편은 벌써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면접은 사흘 후인 월요일이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변변한 정장도 없었고, 가만 보니 낡은 밤색구두도 맘에 걸렸다. 남편이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한 마디 했다.

"옷이나 구두는 그대로 입고 갈 거야. 근데, 나 흰머리 염색 좀 해줄래?"
"염색? 물론이지~~!"

낡은 구두에 정장입고 면접 본 남편, 합격이래요

나는 처음으로 남편의 흰머리를 정성껏 염색했다. 30대 초반으로 결혼할 때만 해도 숯처럼 까맣고 빡빡했던 머리털, 그 많던 숱이 언제 이렇듯 성글어졌을까.

드디어 남편이 면접을 보러 가던 날, 밤색구두에 왁스를 몇 번씩 칠해 문질렀다. 새 옷, 새 구두보다 익숙하게 입고 신었던 것들이 자연스러웠다. 그 날, 남편의 소식이 올 때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점심때 쯤 해서 문자가 왔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문자를 확인했다.

"면접 통과됨!"

그날의 감격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남편이 즐겁게 자기의 영역을 넓혀가며 청소년 관련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고마웠다.

"아빠는 남들 퇴직하는 나이에 신입사원이 됐네~."

작은애가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방학이면 출장과외, 우유배달, 절임배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알바를 전전했던 남편이 이제는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되었다.

절임배추를 볼 때마다, 나는 그저 단순히 절임배추로만 보이지 않을 것 같다. 하루 온종일 소금물에 배추를 절이던 남편을 생각하면 그냥 배추가 아닌 것이다.

대학은 이제 방학이다. 더 춥고 그래서 더 움츠러드는 비정규시간강사들의 방학, 그들의 고통을 알기에 남편의 취업이 더 없이 고맙고 감사하다.

덧붙이는 글 |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도 방송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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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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