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항아리는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 밖에 있는, 이 세상과 끈을 잇고 싶지 않은 그런 곳이다
▲ 작가 양진채 첫 소설집 <푸른 유리 심장>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항아리는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 밖에 있는, 이 세상과 끈을 잇고 싶지 않은 그런 곳이다
ⓒ 문학과지성사

관련사진보기

뒷마당에는 한동안 내가 잘 숨던 항아리가 있었다. 입구부터 옆구리에 길게 금이 가 여러 번 때운 흔적이 남아 있는 항아리였다. 깨질까봐 그랬는지 허리춤에는 철사까지 얽어 테를 둘러놓았다. 아마 주인집에서 장 담그던 항아리였을 것이다. 항아리 안에 간신히 몸을 집어넣고 쭈그려 앉으면 다리가 저렸다.

나는 천천히 항아리에 몸을 맞추었다. 먼저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무릎을 당기고 두 다리를 깍지 껴안았다. 항아리에 조심조심 몸을 맞추고 나면 안은 의외로 넓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아늑했다.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 매몰차게 내치던 손의 느낌, 뒤쫓던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에 올라 고개도 돌리지 않던 모습, 버스 뒤꽁무니를 쫓다가 밤늦도록 그 길이 그 길인 듯한 곳을 헤매던 기억을 밀어낼 수 있었다. -144쪽, '푸른 유리 심장' 몇 토막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때 그 여자애가 떠오른다. 1960년대 끝자락, 글쓴이가 어릴 때 툭 하면 그 집 장독대 한가운데 있는 가장 큰 항아리에 간장이나 된장처럼 숨어 흑흑 흐느끼고 있었던 그 여자애. 사실, 글쓴이도 어릴 때 어디론가 숨기를 좋아했다. 커다란 항아리에 숨지는 않았지만 장롱 속이나 다락, 마루 밑에 자주 몸을 숨기곤 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 세상 모든 것이 두려워 그것으로부터 가장 잘 보호받을 수 있는 어머니 자궁, 어둡지만 그 편안한 자궁에 다시 들어가고 싶어서 그런 버릇이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세상 사람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듯 보이지만 그 속내에는 어디론가 숨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고, 그 어떤 종교에 매달리고, 어떤 때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버리고 싶은 것도 얽히고설킨 이 세상살이에서 참 나를 찾기 위해 나를 숨기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은 있기 때문일 게다. 지난해 11월 끝자락 소설집 <푸른 유리 심장>(문학과 지성사)을 펴낸 작가 양진채가 말하는 그 '푸른 유리 심장'도 그런 것 아니겠는가.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항아리는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 밖에 있는, 이 세상과 끈을 잇고 싶지 않은 그런 곳이다. 소설에 나오는 '나'는 그 항아리를 방패막이로 삼아 이 세상을 가만가만 엿보고, 나를 가만가만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버린 자리에서 '푸른 유리 심장'으로 거듭난다. 다비식을 마친 곳에 남는 사리알처럼 말이다.
   
작가 양진채는 '작가의 말'에서 "아마도 오랫동안, 일부러 맹독이 있는 용만 잡아먹고, 결국엔 독이 쌓인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가루다, 그 불탄 자리에 남는다는 푸른 유리 심장을 꿈꿔왔는지도 모르겠다"며 "그러나 나는 지금, 저 어두운 밤바다, 골씨를 따라 이름 없는 포구로 들어오는 고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고 적었다.

여기서 "맹독이 있는 용"은 물질로 뒤범벅이 되어 내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게 이끌고 가는 어지러운 우리 사회다. 그 이상한 사회에서 자신도 모르게 물질에 중독이 되어 스스로 "몸을 불태우는 가루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악을 쓰는 사람들이다. "푸른 유리 심장"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세상, 저마다 절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안식처다.

죽은 이가 남긴 텔레비전에 플러그를 꽂는 p

p는 에어컨을 틀고 캔 맥주를 따고 텔레비전 플러그를 꽂았다. 전원이 들어오고 3분쯤 지나자 텔레비전 뒤쪽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희미하게 나기 시작했다. 죽은 이의 집에서 가전제품을 들고 와 플러그를 꽂을 때마다 나는 냄새였다. 플러그를 꽂은 뒤 냉장고가 가동되고, 그래서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따뜻한 불빛이 그 안을 감싸고 있을 때나, 컴퓨터 팬이 돌아가고 웹 브라우저의 푸른 화면이 뜨면서 그 곁에서 희미하게 죽은 이의 냄새가 떠다닐 때, p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묘하게 안도했다. - 27쪽, '플러그 꽂는 시간' 몇 토막  

이 소설집에는 이 세상에서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맹독을 맞고 숨어버린 항아리 속에서 그 맹독을 발효시켜 팔딱팔딱 뛰는 푸른 유리 심장으로 되살아나는 중, 단편 9편이 실려 있다. 플로그 꽂는 시간, 누군가 있다, 나스카 라인, 파르초, 너라는 거기, 푸른 유리 심장, 도둑, 봄날의 테이블보, 패루 위 고래가 그 소설들. 

그 가운데 작가 양진채가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는 '패루 위의 고래'는 죽은 이들이 남긴 유품정리를 부탁하는 일을 하고 있는 p가 주인공이다. p가 그렇게 유품정리를 하러 가는 곳에서 죽은 이들은 독신자들, 오랫동안 혼자 살다 죽은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죽은 며칠 뒤 발견되어 부패가 진행된 경우도 많"다.

"오십대 사망자도 더러 있었"지만 "그들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어서도 혼자"다. p는 "구더기들이 구멍이란 구멍마다 우글"거리는 그런 죽은 이들이 남긴 유품을 정리하는 일을 계속하다가 심한 축농증과 비염을 앓는다. p는 그래서 그런지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 냄새가 그리 역겹지"도 않다.

p는 죽은 이들이 남긴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 사람 얼굴과 삶을 떠올린다. p는 그 유품 가운데 쓸 만한 것은 집으로 가지고 온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버리기에 아깝다는 생각에서다. "가끔 꿈속에서 알 수 없는,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p는 그 사람이 굳이 누군지 알려 하지 않"는데.

그래. 그대가 만약 p였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살아서도 혼자였고, 죽어서도 혼자였던 그 사람들이 남긴 유품, 그 사람들 손때가 묻어있는 그런 물건들을 아깝다고 생각하며 스스럼없이 집으로 가지고 올 수 있겠는가. 작가는 이 소설에서 p를 통해 이 세상이 버린 사람들이 겪는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지닌 맹독을 거침없이 뽑아낸다.     

여기서 죽은 이가 남긴 텔레비전에 플러그를 꽂는 p는 우리 사회가 내뿜는 맹독에 중독되어 홀로 살다 홀로 죽은 이들을 '푸른 유리 심장'으로 거듭나게 하는 끄나풀이다. 이 끄나풀마저 끊어지면 우리 사회도 어느 한순간 외로운 독신자가 되고 말지 않겠는가.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요즘 자꾸 날개가 돋는 꿈"을 꾼다는 아들 꿈을 산 것도 우리 사회가 지닌 맹독을 깡그리 뽑아내고 싶어서가 아닐까.        

당신이란 단어를 이제야 풀어놓습니다

비행기로 몇 시간 만에 그가 있는 나라로 건너갔을 때, 나는 에메랄드와 황금으로 빛나는 사원과 맞닥뜨렸다. 짙푸른 에메랄드를 보는 순간 흘리듯 넘겨버렸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불타고 난 자리에 남는다는, 푸른 유리처럼 맑은 가루다의 심장을. / 얼마간 삐꺽거리는 의자를 흔들던 그는 나에게 요일에 해당하는 짐승을 알려주었다. 목요일엔 쥐, 금요일은 두더쥐, 토요일과 일요일은 용과 가루다였다. 내가 태어난 요일의 동물은 두더쥐일 거라고 생각했다. - 155쪽, '푸른 유리 심장' 몇 토막 

'푸른 유리 심장'은 백화점 안내방송원 일을 하고 있는 '나'와 그 백화점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는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나'는 어느 날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서 나무로 된 코끼리상을 받는다. '나'는 제복을 입고 무전기까지 들고 있는 '그'와 코끼리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은근히 둘이 닮았어"라고 생각한다.

'나'와 '그'가 처음 만난 곳은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큰길에서였다 '그'는 그때 "게워낸 토사물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힐끗 곁눈질로 그를 보고는 그 옆을 종종걸음으로 지나쳤"지만 어딘가 낯설지가 않다. '나'는 그가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 모습에서 "어릴 적 내가 항아리에 들어가 앉을 때 취하던 자세"를 떠올린다.

'나'는 백화점에서 목 안이 따끔거릴 정도로 안내방송을 계속한다. '그'는 '나'가 하는 방송을 듣고도 목 상태를 금방 알고 방송실로 들어와 유자차를 타주며 방송시설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곤 한다. '나'는 '그'가 타주는 진한 유자차를 마시고 나면 목이 한결 가라앉는다고 느낀다. '그'도 백화점에서 까칠하고도 시시콜콜 시비를 거는 고객들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 한다. "아마 잘 때도 웃고 잘 거"처럼 그렇게.

회식을 하던 날, '그'는 1차부터 술에 많이 취했다. 2차로 노래방에 갔을 때 그는 소파에 쓰러져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마이크를 들고 반주도 없이 노래를 부른다. "꾸우우우, 꾸우우우. 코끼리, 날개 달린 코끼리, 꾸우우, 꾸우우우"라고 부르는 그 노래는 노래가 아니라 절규에 가깝다. 참다못해 마이크를 뺏으려던 김과 엉켜 넘어졌던 '그'는 정수리 부근에 피가 엉겨 붙어 끈적이고 있다.

그 일이 일어난 뒤부터 그는 백화점에 출근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찾아 프로덕션에 갔다가 '그'가 작업한 테이프 복사본을 어렵게 구한다. 그 영상에는 "코끼리를 길들이기 위해 어린 코끼리를 우리 안에 가둬 놓고 명령에 복종할 때까지 날카로운 거창으로 사정없이 이마를 찌르고 때"리는 모습이 담겨 있다.

‘첫’의 설렘과 상큼함은 내 책을 궁금해했던 이들 몫이다
▲ 작가 양진채 ‘첫’의 설렘과 상큼함은 내 책을 궁금해했던 이들 몫이다
ⓒ 양진채

관련사진보기


"'첫'의 설렘과 상큼함은 내 책을 궁금해했던 이들 몫이다. 나는 그 뒤에 있을 고통과 번뇌를 감당하겠다"(<작가의 말>)고 당차게 말하는 작가 양진채. 그는 1966년에 태어나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나스카 라인'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주요작품으로 '푸른 유리 심장', '도둑', '딸기 샐러드 이야기', '누군가 있다' 등이 있다. <문학비단길> 동인.

이 소설은 '나'와 '그'가 코끼리가 사는 치앙마이를 여행하는 모습과 백화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서로 겹쳐지면서 이어진다. 작가는 '푸른 유리 심장'에서 사람들에게 모진 고문을 받으며 야성이 모조리 사라지고 사람에게 길들여지는 모습에서 맹독을 품고 있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짙은 외로움을 빗댄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한 게 아니라 일부러 맹독이 있는 용만 잡아먹었는지도 몰라. 어쩌면 절정의 순간에 자신의 몸을 불태우기 위해서. 푸른 유리 심장만을 남기기 위해서 말이야"라고, 코끼리를 닮은 '그'가 은근히 가루다를 존경하는 것처럼. 이 소설집 곳곳에 나오는 우체국 직원이나 백화점 점원, 과외선생도 가루다 혹은 코끼리를 닮은 '그'라 할 수 있다.

"당신. 사실 이렇게 부르고 나니 갑자기 입안이 시원해진 느낌입니다. 입안에 갇혀 있던 당신이란 단어를 이제야 풀어놓습니다. 당신에게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호칭입니다. 당신이 이 호칭을 듣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라니. 이와 비슷하게 불릴 만큼 가깝기나 했나 하고요. 당신은 제 속에서만 자랐습니다." - 195쪽, '봄날의 테이블보' 몇 토막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푸른 유리 심장

양진채 지음, 문학과지성사(2012)


태그:#작가 양진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