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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12월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교부받은 당선증을 들어보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12월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교부받은 당선증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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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인은 취임 직후부터 '대탕평 인사'를 국정 키워드로 표방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국민 모두가 행복한 '100% 대한민국'을 실현시키겠다는 것이 그의 약속이다.

탕평은 고대 중국 역사서인 <서경>의 '홍범' 편에 나오는 정치이념이다. 여기에는 군주가 지켜야 할 9가지 정치원칙인 홍범구주가 나온다. 이 중에서 제5원칙이 탕평과 관련된 내용이다.

제5원칙의 핵심 내용은 군주가 국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5원칙을 다룬 부분은 "황극(皇極)은 임금이 표준을 세우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군주가 표준을 세우는 상태' 즉 '군주가 중심이 되는 상태'가 황극이며, 이 황극에 관한 내용을 다룬 것이 제5원칙이다. 황극의 실현 방법과 관련하여 다음 두 문장이 특히 관심을 끈다.

"일반 백성들이 은밀히 뭉치지 않고 높은 사람들이 뭉치지 않는 것은 임금이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제1문장.
"치우침이 없고 당을 만들지 않으면 왕도가 탕탕(蕩蕩)하고, 당을 만들지 않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평평(平平)하다."-제2문장.

제2문장의 '탕탕'과 '평평'을 압축한 게 탕평이란 두 글자다. 탕평의 의미는 제1문장에 나온다. 백성들이 파벌을 만들어 끼리끼리 뭉치는 상태를 배격하는 것이 바로 탕평이다. 바꿔 말하면, 여러 집단과 계층이 골고루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탕평이다. 이 같은 탕평을 통해 '임금이 중심이 되는 상태'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탕평의 본질, 국가가 특정 파벌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것

영조의 어명으로 세워진 탕평비가 보관돼 있는 탕평비각.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정문에 있다.
 영조의 어명으로 세워진 탕평비가 보관돼 있는 탕평비각.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정문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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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가 국가의 중심이 되는 것이 탕평이라면, 이것은 군주 독재를 위한 논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탕평의 본질은 국가가 특정 파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백성들이 끼리끼리 뭉치지 않도록 군주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특정 당파가 아닌 백성 전체의 이익을 위해 국가 조직이 움직이도록 군주가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보다는 '높은 사람들' 즉 특권층이 당파를 만들 위험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제5원칙의 궁극적 목표는 특권층 내의 파벌이 국가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이 사람 저 사람 끌어모으는 것은 탕평이 아니다. 국가가 백성 전체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탕평이다. 이것은 인사조치에만 국한하지 않고 국가의 법률제도까지 과감히 뜯어 고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1% 귀족의 나라'가 아닌 '100% 만백성의 나라'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왕권도 자연스레 강해질 것이라는 게 옛날 왕들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왕권이 비교적 강했던 중국과 달리, 귀족이 더 강했던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탕평의 원리가 제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 1%를 규제하고 100%를 위하는 군주는 1%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임금은 폭군이란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1%가 99%보다 훨씬 더 강했기에, 옛날 우리나라의 왕들은 탕평을 감히 추진하기 힘들었다.

탕평이 공식적으로 추진된 것은 조선 후기인 18세기 초반부터였다. 숙종 임금(재위 1674~1720년) 때에 당파 투쟁이 최고로 격렬해지고 이 틈을 타서 숙종이 당파들을 교묘히 대립시키고 지치게 만들면서, 당파 정치는 이전과 달리 크게 약해졌다. 물론 그 후에도 보수파인 노론당 계열이 여전히 제1당이었지만, 숙종시대 후반부터는 노론당을 포함한 당파들의 힘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렇게 당파 정치가 약화된 틈을 타서, 숙종의 아들인 영조가 선언한 것이 바로 탕평정치였다. 그는 '1% 양반 귀족의 나라'가 되어 버린 조선을 '100% 만백성의 나라'로 바꾸려면 특정 당파의 독점을 깨고 당파 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 왕권이 자연스레 강해질 것이라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이런 시도의 결과로 영조가 즉위한 1724년부터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는 '1% 조선' 이 아닌 '100% 조선'을 위한 탕평정치가 추진되었다. 물론 그것이 완벽하게 구현된 것도 아니고 또 노론당이 힘을 잃은 것도 아니지만, 이전 시기와 비교하면 이 시대의 정치는 분명히 진일보한 것이었다.

사도세자의 사당이 있었던 경모궁 터. 서울대병원 뒤편에 있다.
 사도세자의 사당이 있었던 경모궁 터. 서울대병원 뒤편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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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장소인 창경궁 문정전 앞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장소인 창경궁 문정전 앞뜰.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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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시대에 영조나 정조보다 훨씬 더 교과서적으로 탕평을 추진한 인물이 있었다.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그 주인공이다.

사실, 영·정조는 약간 타협적으로 탕평을 추진했다. 탕평을 표방하면서도 실상은 특정 당파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특히 영조는 정권 유지를 위해 외척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처럼 완벽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전의 왕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한 것을 그들이 용감하게 시도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특권층과 죽기 살기로 싸운 이유

다소 타협적인 영·정조에 비해 사도세자는 매우 원칙적으로 탕평의 이념을 고수했다. 그는 1749~1762년의 13년 동안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권한대행)을 수행했다. 따라서 탕평정치가 시행된 76년 중에서 13년 동안은 실질적으로 사도세자의 시대였다. 그러므로 탕평정치의 계보는 영조-정조가 아니라 영조-사도세자-정조였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사도세자는 '100% 조선'을 이루려면 특권층인 노론당과 외척세력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노론당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는 나이 열 살 때부터 노론당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노론당을 비호한 영조의 태도까지 비판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처가인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선 사실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그는 외척세력이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견제했다. 노론당과 외척으로 이루어진 '1%'를 견제했던 셈이다. 한마디로, 그는 '100% 조선'에 목숨을 건 용감한 사나이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13년 만에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은 것은, 그가 교과서적인 탕평을 추구했고 그것이 특권층에게 공포심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화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뒤주에 갇힌 본질적 요인은 '1%'와의 갈등이었다.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의 복원품.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에서 찍은 사진.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의 복원품.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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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1%로부터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는, 그가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죄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인 정조가 왕의 자리에 있을 때도 왕으로 추존되지 못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왕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되면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정조는 끝내 이 일을 하지 못했다. 사도세자에 대한 특권층의 거부감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된 것은 구한말 때인 1899년이었다. 100%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1% 때문에 얼마나 곤욕을 치를 수 있는지를 사도세자는 온몸으로 보여줬다.

사도세자는 251년 전에 죽은 사람이지만, 그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남아 탕평을 외치고 있다. 서울 시민은 물론이고 지방 사람들도 많이 찾는 대학로 서울대병원의 바로 뒤편에는 그의 위패를 모셨던 사당인 경모궁의 터가 남아 있다. 또 경모궁 터에서 왼쪽으로 직경 500미터 거리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곳인 창경궁 문정전 앞뜰이 있다.

박근혜 당선인이 말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탕평을 원한다면, '1% 대한민국'이 아닌 '100% 대한민국'을 정말로 원한다면, 경모궁 터와 문정전 앞뜰에서 울려퍼지는 사도세자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의 정치환경에서는 사도세자처럼 특권층과의 대결을 불사하지 않고서는 탕평을 추진할 수 없다. 한여름 날씨에 8일간 뒤주에 갇혀 세상과 작별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탕평이다.

박 당선인이 '100% 대한민국'을 위한 대탕평을 하고자 한다면, '죽기 살기로' 1%와 싸울 각오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진정성 있는 탕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태그:#탕평, #대탕평, #박근혜, #사도세자, #탕평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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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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