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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수남(고양작가회의 회장)이 새 소설집 <길에서, 길을 보다>(새미)를 펴냈다.
▲ 작가 정수남 여섯 번째 소설집 <길에서, 길을 보다> 작가 정수남(고양작가회의 회장)이 새 소설집 <길에서, 길을 보다>(새미)를 펴냈다.
ⓒ 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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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어느 여름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나는 우연히 길에서 한 여자를 목격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바로 우리 집 건너편 적산가옥 2층에 사는, 그러니까 내 방에서 빤히 들여다보이는 곳에 새로 보름 전쯤 이사 온 양색시였다. 물론 처음엔 그녀가 내 가슴에 지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나팔꽃 같았다. 아침에 활짝 핀 나팔꽃처럼 싱그러웠으며 눈부셨다. 그런 그녀를 보지 못한 날이면 그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나는 하루종일 모든 것이 시들했다. / 아버지는 내가 뭣도 모르고 미끼를 꿀꺽, 삼켜버린 미련한 물고기라고 핀잔했다. 그러나 나는 그 미끼 속에 감추어진 바늘이 비록 평생 나를 따라 다니며 괴롭히는 것일지라도 싫지 않았다." -21~22쪽, '길에서, 길을 보다' 몇 토막       

아버지! 우리들은 아버지를 어머니처럼 보금자리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치매를 앓다 이 세상을 떠난 글쓴이 아버지는 살아 계실 때 내게 "뭣도 모르고 미끼를 꿀꺽, 삼켜버린 미련한 물고기"라는 그런 말씀을 한 번도 하시지 않았다. 내 아버지는 그저 저만치 말없이 우뚝 서 있는 큰 바위 같은 분이었다.

작가 정수남(고양작가회의 회장)이 새 소설집 <길에서, 길을 보다>(새미 펴냄)를 펴냈다. 지난 2009년 3월에 펴낸 다섯 번째 소설집 <시계탑이 있는 풍경>(들꽃 펴냄) 뒤 5년 만에 선보이는 이 여섯 번째 소설집은 우리 사회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그림자로만 어른거리는 것만 같은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이 소설집을 읽고 있으면 새삼 치매를 앓다가 10여 년 앞에 돌아가신 글쓴이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 중·단편 여덟 편이 실려 있는 이 소설집 곳곳에 작가 아버지 이야기가 글쓴이 아버지가 포옥 내쉬던 한숨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는 그동안 어머니 품에만 너무 기댔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란 바위산이 너무 크고 높아 아예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차마 마음에 담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소설집은 물질이 사람을 깔보는 이 험한 시대에 아버지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심어주는지, 어떤 아픔과 상처를 남기는지, 아버지가 있어도 아버지를 찾지 않는 우리들 빈자리에 어떤 불안이 싹트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작가 정수남은 17일(목) 저녁 6시, 고양 애니골 들머리에 있는 새빛교회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나는 아버지에게 깊은 사랑을 받지 못한 아들이었다고 생각했다"고 말머리를 꺼냈다. 그는 "어릴 때 느꼈던 그 서운한 마음은 나이가 들어 아버지를 이해하면서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고, 지금도 동경의 대상"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나도 몰라볼 눔이 너는 알아보겠느냐?"

"어머니가 미국에 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특히 취기가 제법 올랐을 때 더욱 많이 쏟아내는 푸념으로, 이는 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섞여 있었다. 기지촌에 살 때 이모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어머니는 자식을 낳으면 아버지가 도망가지 못할 것이라는 심보로 나를 낳았다고 했다. 어머니의 꿈은 리쳐드라고 부르는 내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가는 것이었다." -48쪽, '샛강' 몇 토막

'샛강'은 "도시 사람들에게 죽은 땅으로 보였을 것이 틀림 없"는 재개발 지역이 "하늘이 내려준 축복의 땅"이라 여기며 힘겹게 살아가는 '나'와 '어머니', 그 주변사람들이 겪는 뼈아픈 이야기다. 기지촌에서 양공주로 살았던 어머니는 미군이었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받들면서 술만 취하면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계속 쏟아낸다.

라이브 카페에서 "남의 노래는 아무리 잘 불러도 모창일 따름"인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 주인공 '나'는 "모창으로는 발붙일 곳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위기감"을 느끼다 그곳에서도 해고가 되어 갈 곳이 없다. 나는 그때부터 노래 부를 공간을 찾으러 다니지만 "발품을 팔아 찾아간 업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댄스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과 더더욱 모창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뿐이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사업에 실패한 이, '나'처럼 일자리를 잃고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잠자듯 납작 엎드려 있는 슬레이트 지붕들과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쓰고 있는 비닐하우스들"만 있는 그곳에 재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딛는 듯하다.

작가 정수남은 '샛강'에서도 '나'와 '어머니'가 재개발 지역에서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아가는 까닭을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겪는 비참한 현실이라 여긴다. 그 아픈 삶은 술만 취하면 "미국에 어서 가야 할 텐데······. 호랑이가 물어 가두 션찮을 그 눔이 내가 너무 늙으면 알아보지도 못할 것인데, 이를 어떻게 하냐. 나도 몰라볼 눔이 너는 알아보겠느냐?"라는 넋두리로 이어진다.  

'육시랄 눔'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껄껄 웃던 아버지

"나에게 아버지는 늘 수염이 텁수룩하고, 석유 냄새와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어머니에게 매양 '육시랄 눔'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껄껄 웃던 사람이었다. 술이 취한 채 밤늦게 들어와서는 잠자던 나를 번쩍 안아 들고 그 수염으로 볼을 마구 비벼대는 통에 나는 울음을 터뜨리곤 하였다. 그 시간에 들어와서도 어머니가 썰어 주는 오소리감투 한 접시를 안주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자던 아버지였다."-102~103쪽, '소풍' 몇 토막

이 소설집 곳곳에는 사랑에 빠진 중학생 손자(<길에서 길을 보다>), 혼혈아 가수 지망생(<샛강>), 청풍순대국의 주인 욕쟁이 어머니(<소풍>), 탈북자 강노인(<야곱의 노래>), 9년 전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노인(<슬픈 영화를, 보다>), 아내 유방암 수술을 지켜보는 남편(<연착>), 뺑소니로 몰린 작가(<회색과 쥐색>) 등이 나온다.

작가 정수남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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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정수남 ...
ⓒ 정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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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수남은 198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접목'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집으로 <분실시대> <별은 한낮에 빛나지 않는다> <타성의 새>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시계탑이 있는 풍경>이 있으며, 시집 <병상일기>를 펴냈다. 제2회 자유문학상과 제15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을 받았다. 지금 고양작가회의 회장과 <작가연대> 발행인, 일산문학학교 대표를 맡고 있다.
작가 정수남은 여섯 번째 소설집 <길에서, 길을 보다>에서 이들이 겪는 가난과 이들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불안의 뿌리'는 모두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데 포인트를 찍는다. 작가는 "늘 수염이 텁수룩하고, 석유 냄새와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라도, "어머니에게 매양 '육시랄 눔'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껄껄 웃던" 그런 아버지라도 곁에 있어야 우리 사회 곳곳에 드리워진 불안이 사라진다고 믿고 있다.                   

그래. 글쓴이도 오래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와 떨어져 사는 아내도 장인어른이 이 세상을 떠나자 "사는 것이 불안하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두 딸들도 귀가 따갑도록 "아빠가 곁에 없으니 집에도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다"며 불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나나 아내나 두 딸이 편하게 기댈 수 있는 큰 기둥이었다.   

나도 지금 대학에 다니는 두 딸을 데리고 살고 있는 아버지다. 두 딸들은 아버지인 나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늘상 용돈이 필요할 때마다 '사랑하는 울 아빠'로 시작되는 문자를 손전화로 날리고 있는 두 딸은 진짜 나를 좋은 아버지로 가슴 깊숙이 새기고 있을까. 나는 두 딸 나이였을 때 아버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오늘따라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 그립다. 자식들 앞에서는 말을 쌀알처럼 아꼈던 내 아버지. 그 아버지는 지금도 저 하늘나라 산등성이에서 나뭇짐 한 짐을 지고 구슬땀을 흘리며 우리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을까. 오늘도 어깨에 밥상 같은 쟁기를 지고 자식 같은 소를 몰고 신작로를 따라 논으로 가고 있을까.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길에서, 길을 보다

정수남 지음, 새미(2012)


태그:#작가 정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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