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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름> 표지. 노년이라는 기차여행.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에밀리오는 젊은 시절의 기억을 하나둘 잃어버린다.
 <주름> 표지. 노년이라는 기차여행.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에밀리오는 젊은 시절의 기억을 하나둘 잃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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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늙는다.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어느 날 문득 세수를 마친 후 거울 속의 내가 이전의 나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회피하듯이 늙음에 대해서 가급적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그게 아니라면 아주 이해타산적 계산을 하든지. 이를테면 노후에 어떻게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까, 같은. 보험회사의 광고들은 준비 없이 노년을 맞이하면 얼마나 비참한지 호들갑을 떤다. 늙음은 이런 두려움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온다.

스페인의 만화가 파코 로카가 그리고 쓴 만화집 <주름>은 표제작인 <주름>과 <등대>로 구성되어 있다. <주름>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노인 에밀리오를 통해 늙음과 노년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권유한다. <등대>는 전설의 섬 라퓨타를 동경하는 등대지기 노인과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소년병과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이 두 작품의 노인 주인공은 모두 멀쩡한 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주름>에는 그러한 사실이 이야기의 처음부터 명확하게 제시되는 반면 <등대>에서는 놀라운 결말(surprising ending)로 드러난다.

<주름>의 첫 장면에서 에밀리오는 은행원으로 등장한다. 그는 지점장으로만 20년 넘게 근무한 베테랑 은행원으로서 방금 자기 앞에 앉은 고객에게 대출은 무리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고객이 좀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 고객은 "대출 따위 받고 싶지 않아요! 답답해 죽겠네"라고 짜증낸다. 에밀리오는 고객을 달래려고 하지만 고객은 사실 에밀리오의 아들이다.

에밀리오는 70대 노인이고 퇴직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병이 시작되어 아직도 자신이 은행원인 줄로 안다. 에밀리오의 아들은 아버지의 이상 행동을 견디지 못하고 요양원에 입원시킨다. 에밀리오는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에 처음 간 날처럼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아들은 요양원 직원에게 "바빠서 자주 찾아오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에밀리오는 요양원에 먼저 들어온 미겔의 도움으로 시설에 적응해나간다. 멀쩡한 정신일 때, 에밀리오에게 요양원은 견디기 힘든 곳이다. 정신을 놓고 젊은 시절의 한때로 돌아가 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노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에밀리오는 그런 노인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보고 두려워한다. 요양원의 의사는 에밀리오의 그런 불안에 의학적 진단을 추가할 뿐이다.

'늙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이야기 둘
에밀리오와 미겔 요양원의 이모저모를 소개해주는 미겔, 그는 동료 노인들의 돈을 뜯기도 한다.
▲ 에밀리오와 미겔 요양원의 이모저모를 소개해주는 미겔, 그는 동료 노인들의 돈을 뜯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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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양원에서 가장 멀쩡한 정신으로 사는 미겔은 자식이 없다. 미겔은 오히려 자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처지가 더 낫다고 한다. 그는 교활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요양원 노인들에게 돈을 뜯어내서 모은다. 뭔가 필요하다고 하는 노인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신이 해주겠다고 하는데 돈을 준 노인들은 그 사실을 곧 잊는다. 미겔은 돈을 모아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일까? 미겔을 교활한 노인네로 알았던 독자들은 그 쌈짓돈의 쓰임새를 보면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주름>의 결말은 매우 충격적이다. 에밀리오의 시점에서 알츠하이머병이 한 인간을 완전히 집해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준다. 물론 그 장면은 매우 슬프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주름> 다음에 나오는 <등대>라는 작품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공화파인 소년병이 부상을 입고 어느 등대지기에 의해 구조된다. 등대지기는 램프를 교환하지 못해서 불을 켤 수 없는 등대처럼 늙었다. 소년병은 파시스트에게 발각되면 살해될 것이기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늙은 등대지기는 소년병에게 환상의 섬 라퓨타에 대해 들려주고 그곳에 가기 위해 배를 같이 만들자고 한다. 소년병은 늙은 등대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반한다. 라퓨타에는 전쟁도 착취도 없고 더 먼 이상향으로 가는 철도가 놓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늙은 등대지기의 이야기는 그저 환상일 뿐이다. 곧 올 것이라는 등대의 램프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 등대를 폐쇄하기로 결정했으며 더 좋은 위치에 이미 새 등대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아무런 필요도 없는 등대에서 늙은 등대지기는 혼자만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병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서는 헛된 꿈을 설파한 등대지기에게 항의하지만 바로 그때 파시스트들이 등대를 점령하러 오고, 소년병은 바로 그 라퓨타 섬으로 가기 위해 만든 배를 타고 탈출한다. 늙은 등대지기는 램프 없이 등대의 불을 밝히고 등대는 곧 화염에 휩싸인다. 파코 로카는 보르헤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등대>의 마지막 부분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의 이루지 못한 꿈이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게 해준다."

우리의 삶은 다른 누군가의 꿈을 위해 쓰일지도...

두려운 2층 요양원 2층에는 중증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기거한다. 1층의 노인들은 2층에 가기를 두려워한다.
▲ 두려운 2층 요양원 2층에는 중증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기거한다. 1층의 노인들은 2층에 가기를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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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집 <주름>에 실린 두 작품에는 노인들의 꿈이 서글프게 나타난다. <주름>에서는 에밀리오가 만나는 요양원 노인들이 대개는 젊은 시절, 한창 아름다웠던 그 시절에 집착하면서 빛나던 한 순간을 연기한다. 이를테면 아내가 "사기꾼!"이라고 귓속말로 속삭이면 빙그레 웃음을 짓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이야기는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답다. "사기꾼!"이라는 말 속에는 둘의 젊음이 가장 빛나던 순간이 집약되어 있다.

<등대>에서 늙은 등대지기가 꿈꾸는 라퓨타 섬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곳에 간다는 꿈이 있어 외로운 등대지기의 하루하루는 견딜 만한 삶이 되었던 것이다. 그 꿈은 결국 죽을 운명이었던 소년병에게 새로운 삶을 준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누구도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천천히 늙어가고 있다. 젊을 때는 상상할 수도 없던 병에 걸려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고 하나 둘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떠날 수도 있다. 외롭고 쓸쓸한 시간이 더디게 마지막 순간을 향해 흐를 때 우리는 모두 각자 혼자만의 여행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에밀리오처럼 자신이 서서히 누군지도 모르게 변할 때 두려움을 느낄 것이며 늙은 등대지기처럼 그런 두려움을 견뎌내기 위해 혼자만의 환상을 펼쳐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더라도 그 삶을 살아가야 하며 그 삶은 다른 누군가의 꿈을 위해 쓰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파코 로카의 <주름>은 늙음과 노년을 성찰할 수 있는 귀중한 텍스트이다.

덧붙이는 글 | <주름> 파코 로카 쓰고 그림, 김현주 옮김, 중앙북스 펴냄, 2012년 12월, 167쪽, 1만5000원



주름

파코 로카 지음, 김현주 옮김, 중앙books(중앙북스)(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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