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중간 눈을 감고 영화를 듣는다. 주인공들의 대사 사이로 화면 설명이 들려온다. "트럭 한 대가 노란 꽃이 피어있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이번에는 양쪽 귀를 꽉 막고 화면을 본다. 대사가 한글 자막으로 나오고, '밝고 경쾌한 음악'이라는 배경 음악에 대한 설명이 뜬다.

지난 3월 20일 저녁 서울시내 한 영화관에서는 현재 상영중인 <터치 오브 라이트>의 '배리어프리(barrier free) 버전' 시사회가 있었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가 영어로 제작된 만화영화를 볼 때 한국말로 녹음을 한 '한국어 더빙' 아니면 '한글 자막'을 넣은 것을 선택해서 보는데, 배리어프리 버전은 우리말 더빙과 한글 자막, 상황을 설명해 주는 음성을 함께 넣어 시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것은 우리말로 제작된 영화에도 해당되는 것이어서, 대사는 우리말로 되어있으니까 그대로 놔두고 여기에 화면 설명을 넣어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만든다. 대사와 화면 해설, 자막과 설명글까지 넣으려면 그 작업이 만만찮을 텐데 이런 일에 뛰어 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고, 여기에 재능을 기부하는 사람이 있어 신기하고 고마울 뿐이다.

영화 <터치 오브 라이트>  포스터

▲ 영화 <터치 오브 라이트> 포스터 ⓒ (주)씨너스 엔터테인먼트

<터치 오브 라이트>의 주인공 '유시앙'은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다. 영화는 유시앙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가족들을 떠나 낯선 도시의 대학 기숙사에 머물며 수업을 듣고 피아노 연습을 하고 친구들을 사귀는 모습을 따뜻하게 담고 있다.

시각 장애 천재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황유시앙'의 실화이며 그가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해 시각 장애 대학생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룸메이트나 밴드 동아리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도 있지만, 친구들이 장애에 대한 이해가 없어 유시앙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거나 합주에 끼어주지 않기도 한다.

그러던 중에 춤을 향한 열망을 접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단하게 살아가는 '치에'를 만나 친해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좋은 친구,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준다.

각기 다른 길이긴 하지만 꿈을 향해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자신의 능력을 확인해 보기 위해 도전한다. 

영화 <터치 오브 라이트>의 한 장면  친구들과의 즐거운 한 때 (화면 왼쪽에서 두 번째가 주인공 '유시앙')

▲ 영화 <터치 오브 라이트>의 한 장면 친구들과의 즐거운 한 때 (화면 왼쪽에서 두 번째가 주인공 '유시앙') ⓒ (주)씨너스 엔터테인먼트 외


풋풋한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자잘한 웃음이 터지고, 장애에 대한 이해 부족 장면이 나올 때는 혀를 차기 전에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곤 했다. 아름답게 펼쳐지는 화면에 재능기부로 참여한 배우 임수정의 잔잔한 해설이 잘 녹아들어 화면 해설이라는 낯선 방식에 금방 적응된다.

영화 <늑대소년>의 조성희 감독 또한 연출로 재능기부를 했는데 대사와 해설의 한 치 오차도 없는 호흡이 영화 감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배리어프리(barrier free)'는 말 그대로 장애인이나 고령자가 살기 편하도록 제도적, 물리적 장벽(barrier)을 없애자는(free) 것. 배리어프리 영화는 이런 운동이 영화에 적용된 것으로 장애와 비장애를 가리지 않고 문화 복지를 누린다는 의미가 있다. 이 일을 위해 현재 '한국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동안 성우협회 회원들과 감독, 배우들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배리어프리 영화 목록에는 <도둑들> <완득이> <술이 깨면 집에 가자> <마당을 나온 암탉> <엔딩노트> <소중한 사람>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이 들어있다.

배리어프리 영화를 처음 봤다는 관람객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평생 영화를 즐겨 봤으면서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영화를 볼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는 게 부끄럽다."
"외국 영화를 볼 때 자막 따라가느라 화면을 놓치기 일쑤인데 온전하게 영화를 감상한 기분이다. 장애인 뿐만이 아니라 비장애인인 내게도 도움이 됐다. 신기하다." 
"그러고보면 그동안 시각장애인이 주인공인 영화를 정작 당사자인 시각장애인들은 보지 못했다는 것 아닌가. 배리어프리 영화의 중요성을 느꼈다."

물론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도우며, 필요 이상의 관심이나 배려가 아니라 똑같은 사람, 막역한 친구로 대하고 장난치는 젊은 대학생들의 모습이 오히려 감동적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기 위한 연습에 배리어프리 영화도 들어있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영화를 볼 때 '우리말 더빙판' '한글 자막판' '배리어프리판'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감독이나 배우, 성우들의 재능기부에만 기대서는 안 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후원하며, 정부에서는 공익과 복지 차원에서 예산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영화 <터치 오브 라이트, Touch of the Light (대만, 2012)> (감독 : 장영치 / 출연 : 황유시앙, 상드린 피나 등)
터치 오브 라이트 배리어프리 영화 배리어프리 시각장애인 장벽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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