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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말 호주 언론인 제럴드 라일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를 종착지로 하는 역외 서비스관리회사 PTN과 CTL의 고객정보 하드드라이브를 입수한 뒤, 국제탐사보도연맹(ICIJ)은 오랜 데이터마이닝(많은 데이터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혀 의미 있는 정보를 끌어내는 일 ― 편집자) 작업 끝에 2013년 3월을 기점으로 ICIJ와 각국의 파트너 언론기관을 통해 비밀스런 역외 탈·절세 행각의 면모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그 충격파는 태평양 너머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ICIJ의 한국 측 파트너 격인 뉴스타파가 주기적으로 내놓은 자료는 박근혜정부가 천명한 경제민주화 실현 및 역외탈세 근절방침과 맞물려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독재자의 장남 전재국을 비롯하여, IMF 금융위기 직후 한국 금융시장에서 역외 스트럭쳐링을 통한 탈세 전략으로 성공신화를 쓴 바 있는 김석기, 대기업/중견기업 사주 및 관계자, 심지어는 평양에 주소를 둔 북한 인사들까지 망라한 비밀스런 역외 비즈니스 행각은 단순한 공분을 넘어 사회전반의 새로운 관심과 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다.

정교한 국제 금융시장의 빈틈, 조세도피처

역외 조세도피처 체제를 활용한 다국적기업의 공격적인 절세 또는 탈세는 2차대전 종전 후 본격적으로 그 규모와 정교함을 키우기 시작했다 볼 수 있다. 이것은 글로벌 교역의 규모와 정교함이 이전과 다르게 발전하면서 두드러지게 발현된 현상이기도 하다. 이전 시기 국경 내(onshore) 기업활동에서 발생한 소득에 대해 국가와 시장 참여자가 과세표준을 따져본 뒤 합당한 조세를 부과하고 납부하던 체제는, 국경 외(offshore) 기업활동에서 발생한 소득이 증가하고 해외 현지법인 설립 또는 페이퍼 컴퍼니의 설립이 가능해지면서 제도적 견고함과 건강성이 훼손되었다.

때를 맞춰 런던의 시티 금융가는 유로달러 마켓을 발전시켜 각국 중앙은행 통제 너머의 금융자본시장을 창설해냈고,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리히텐슈타인 등 유럽의 자본중개형 소국들은 금융비밀주의와 전문업계의 매개를 통한 금융산업선도형 발전모델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2차대전 종전 후 외견상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왕실보호령 국가들(Crown Dependencies)과 영국 해외영토령 국가들(British Overseas Territories)은 영세율과 비밀주의를 무기로 이른바 '현대판 보물섬'의 자리를 굳히게 되고 급기야 국가경제 영역 너머에서 '그림자경제(shadow economy)' 체제의 블랙홀로서 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 조세, 금융, 기업활동 전반에 만연해진 탈규제로의 전격적인 경쟁의 결과 델라웨어, 버몬트, 네바다 등 개별 주들이 사실상 역내 조세도피처 체제의 양상을 띠게 된다.

미국, 영국, 한국 등 글로벌 교역 국가 중 상당수는 속인주의에 기초한 조세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에 따르면 자국의 납세자 신분을 유지하는 개인이나 기업은 소득발생 지역과 무관하게 전세계 발생 소득(worldwide income)에 대해 세무 신고 및 납세의 의무를 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역외 현지에서 설립되어 실제 영업활동 중인 법인의 소득을 현지투자 등의 목적으로 역내로 당장 들여올 수 없는 경우에 생긴다. 역내로 들여오지 않은 잠재적 과세 소득에 즉각 조세를 부과하면 기업활동에 불편함을 초래할 뿐 아니라 과세권 남용의 측면이 있다는 점이 부각된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 국가들은 역외발생 소득의 역내 이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조세 부과를 연기하는 법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이에 다국적기업들은 역외발생 소득을 적극적으로 역외 조세도피처로 이전시켜(profit shifting) 국가가 조세권을 즉각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회피하게 되었다. 또한 고세율 국가에서 발생한 소득 상당 부분을 세율이 낮거나 전혀 없는 국가로 이전해서 과세표준을 줄이는 행위(tax base erosion)도 등장했다.

역외 탈세 방지는 국제적 흐름

글로벌 교역에서 기업의 역외 금융체제 활용 및 적극적 조세피난 행위를 통한 부의 유출 규모는 논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2007년 금융 위기 이전까지 OECD, 미국, 영국 등은 이 규모를 파악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조제정의네트워크 영국 본부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2015년 기간 동안 기업의 역외 조세피난 규모는 약 2조5000억 달러로 추산된다.

2000년 UN은 '새천년발전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공개했고 그 종착시점을 2015년으로 설정했다. 글로벌 NGO인 크리스천 에이드(Christian Aid)는 같은 기간 동안 조세피난 행위는 560만명에 달하는 저개발국 아동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재정적 원인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하루 1000명의 아동의 목숨이 달렸다는 얘기다.

결국 위기가 현실의 문제점을 직시하게 했고 해결책 마련에 골몰하게 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공격적 역외 탈·절세와 그로 인한 부의 역외 유출은 각국 정부의 조세주권 확립과 세원 마련 그리고 조세정의의 실현 차원에서 주요 아젠다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주요국들과 OECD, 세계은행, IMF, UN 등 국제기구들이 글로벌 NGO그룹과 발을 맞추면서 역외 조세도피처에 대한 적극적 대응에 나서고 있다.

국내 과세제도 개선과 국제공조 병행해야

이러한 대응은 그 성격상 개별국가 차원의 대응과 다자간 또는 국제적 대응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각국 정부는 우선 조세도피처에 은닉된 자산을 파악하고 그에 관련된 신고 의무와 처벌 수준을 높이고 있다. 선제적으로 나선 미국은 역외자산 보유에 대한 신고를 세무 당국에뿐 아니라 재무부에도 따로 보고하는 제도를 마련했다(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한 바 있다). 또한 전통적으로 탈세 의심 사례의 입증 책임을 징세 당국 등에 부과해오던 것을 납세자에게 전가하는 조치도 도입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포괄적 정보제출명령 제도(John Doe Summons)다.

불특정한 개인을 가리키는 표현인 John Doe(여성의 경우 Jane Doe)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세무 관련 쟁송에서 탈세 의심자의 구체적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관련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정보를 세무당국 등이 법원으로부터 일괄적으로 정보제출 명령장을 발부 받아 정보접근을 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예컨대 역외 탈세 시도자의 정보를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금융기관이 있을 경우, 세무당국이 개인을 특정하지 못한 경우라도 일괄적으로 정보제출을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자간 및 국제적 대응으로 우선 논의되고 있는 것은 역외 조세도피처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영국 등에 대한 실제적 압력 행사다. 영국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왕실보호령 국가들과 해외영토령을 중심으로 한 역외 조세도피처의 발흥에 원인제공자란 비판을 받아왔다. 이곳의 금융 비밀주의 및 조세도피 체제는 아직도 실제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의 의지에 따라 철폐 또는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조세정의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

비밀주의의 특성상 개별 국가의 정보 접근이 어려운 역외 조세도피 행각은 조세정보 교환 체제의 실효성을 배가하는 조치 마련도 요구하고 있다. OECD는 양자간 조세정보 교환협정(Tax Information Exchange Agreement)을 맺을 때 준거가 되는 이른바 모델협약(Model Convention)을 마련한 바 있으나, 그 효과는 실망스러웠다. 현 체제하에서는 특정국가 사이에 협정을 맺은 경우도 정보교환을 요청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선제조건을 만족시켜야만 했던 것이 큰 이유다.

탈세혐의를 입증하고 특정 개인의 정체와 계좌 또는 관련 법인 등 정보를 요청하는 국가가 요청 전에 파악하기 어려운 내막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이후에야 정보 제공 요청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 자동 조세정보 교환협정(Automatic Tax Information Exchange Agreement)이다. 이것이 제대로 도입되면 기존 협정체제에 존재했던 정보 요청시 사전 장벽이 없어지게 되어 빠르고 효과적인 정보접근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또한 다국적기업들이 공격적인 역외절세 행위의 일환으로 역외 조세도피처에 설립된 법인에 지적재산권 사용권과 소득을 이전하여 과세표준을 침식하는 것을 막는 방안도 고려되고 있다. 실제 발생 매출 기여도, 투자 및 시설 규모, 종업원 수 등을 근거로 하여 징세할 몫을 산정하는 일종의 공식을 마련하고 적용하여 실질적 경제 기여도에 따른 과세를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제대로 적용되면 역외 조세도피처로 소득 이전을 통한 절·탈세는 힘들어지게 되고 다국적기업들의 핵심적 경영 중심지이자 거대 시장이기도 한 우리나라와 같은 역내 체제는 제 몫의 세원을 되찾는 데 크게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2013.6.26 ⓒ 창비주간논평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조세정의네트워크(Tax Justice Network) 동북아 챕터 대표입니다.



태그:#조세도피처, #탈세, #페이퍼컴퍼니, #뉴스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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