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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自律)'이라는 말처럼 타락해버린 단어가 또 있을까. '자율'은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는 일"을 뜻한다. 나는 진정한 자율의 조건이 이 뜻풀이 속에 담겨 있다고 본다. 외부로부터 오는 영향력이나 통제로부터의 자유, 자기 스스로 원칙을 세워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역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자율은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마구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그 대상을 보이지 않게 구속하고 지배하려는 교묘한 책략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대한민국의 학교 현장에는 자율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2008년 교과부가 발표한, '단위학교 책임경영제'에 따른 '학교 자율화 조치'가 대표적이다. 이 조치는 학교에 대한 교육 당국의 각종 규제를 가급적 자제하고, 교육 당국이 가지고 있던 많은 권한을 단위학교로 넘겨주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해서 평범한 공·사립고등학교 앞에 '자율'이라는 말'만' 붙인 각종 '자율형 학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자율형 학교 정책은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을 강화하고, 단위 학교의 자율적 교육 결정권을 보장해주자는 취지를 내세웠다. 하지만 그 이면의 의도도 실제로 그러했을까. 한 마디로 현재 많은 자율형 학교가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율은 가짜이다.

진짜 자율은 그 주체가 스스로 쟁취해내는 것이다. '아래'에 있는 학교가 그 스스로의 자발적인 의지와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수많은 자율형 학교가 누리는 자율은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학교 교육의 책무를 일방적으로 학교에 전가하는 책임 방기나 다름 없다.

자율학교의 자율이 가짜인 까닭은 또 있다. 그렇게 많은 자율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현장에서 민주주의가 전혀 구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교 현장에서는 교과부로부터 권한을 넘겨받은 학교장의 힘이 전보다 훨씬 더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질식 상태인 민주주의는 더욱 압박을 받았다. 학교 교육의 공공성이 후퇴했음은 물론이다.

지난 6월 25일, 전북도의회는 재적의원 43명 중 35명의 압도적인 다수로 '전라북도 학생인권조례(안)'(이하 '전북학생인권조례')을 통과시켰다. 햇수로 치면 3년만이었다. 그 전에 전북학생인권조례는 무려 네 차례나 교육상임위원회에서 부결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전북 지역의 수많은 교육시민운동단체들과 뜻있는 몇몇 의원들은 전북학생인권조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과가 찬성 35표 대 반대 6표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산통 끝에 나온 전북학생인권조례에 딴지를 거는 이들이 있다. 11일, (전북학생인권조례가) "초중등교육법시행령 등 상위 법령을 위배하는 것이 일부 있으며, 일선 학교의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며 전북교육청에 재의 요구를 한 교육부가 그들이다. 교육부는 친절하게 상위 법령 위반의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든 내용들은 학교기록 삭제 요구권이나 정규 시간 외 교육활동 강요 금지와 같이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들이다.

심지어 교육부는 학교에서의 소지품 검사는 상위 법령이 보장하는 단위 학교의 자율성과 관련되는 사안인데, 전북학생인권조례는 이러한 소지품 검사를 제한하기 때문에 단위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논리를 들이대고 있다.

교육부가 소지품 검사 문제를 단위 학교의 자율성 침해와 연결하는 것은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니다. 교육부는 이미 작년 4월 두발, 복장, 휴대전화 사용 등 학생생활에 관한 사항을 학칙으로 정해 운영하도록 하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하였다. 학생들의 머리와 복장에 관한 학칙을 꼭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어놓은 것이다.

나는 학생 물건을 검사하는 일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것이 어떻게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교육부는 자신들의 그러한 관점과 논리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까. 그들은, 소지품을 검사하고 안 하고의 문제는 교장의 자율적인 판단 대상이니 학교가 알아서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라는 것이라고 말을 할까. 아니면 모든 학생은 잠재적 범죄자이거나 불량 학생이니,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차원에서 소지품 검사를 자율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까.

학교는 좋은 의미의 공적 공간이지만, 동시에 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수업에 참여하는 개별 학생들에게 교실의 일부는 분명 사적인 공간이지 않으면 안 된다. 공적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사적인 그 역설적인 공간의 일부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내면과 조용한 대화를 나누고, 교사와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많은 학교에서 학생들은 일상적으로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소지품 검사나 개인 물품에 대한 압수를 당한다. 일방적으로 정한 교칙에 따라 특정 두발과 복장을 강요받기도 한다. 무슨 색의 양말을 신어서는 안 되고, 어떤 모양이 들어간 생활복은 금지한다는 규정에 질식할 때도 많다. 대체 이것들이 교육 활동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걸까. 두발과 복장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초등학생은 왜 가만히 내버려두고, 가장 깊이 공부해야 할 대학생들은 왜 또 본 체 만 체 하는가. 초등학생은 어린애이고, 대학생은 성인이어서 그러나.

학교의 자율성은 자발성을 통해 실현된다. 그리고 이때의 자발성은, 모든 학교 구성원이 서로에게서 당당한 주체이자 개인으로 대접받고, 스스로 그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명확하게 인지한 후에야 성립된다. 그런 학교 문화를 만드는 데 최소한도로 필요한 것이 이번에 전북에서 통과된 학생인권조례와 같은 게 아닐까.

나는 지난 6월 25일에 전북도의회 본회의에서 김규령 교육의원이 했다는 말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전북학생인권조례 반대토론에서 "현재 조례안 내용을 보면 학생이 '갑'이고 교사는 '을'이다. 우리 선생들은 순수하다. 작은 충격에도 견디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는, 교육 현장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분간 못하는 그 교육의원의 말을 듣고 정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그토록 학생과 교사를 갑을 관계로 보고 싶었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학생과 교사는 모두 갑이거나 을이어야 한다고. 

그는 나치수용소에서 제자와 함께 죽음을 선택한 야누스 코르착이라는 이름의 교사를 들어나 봤을까. 아무리 교육이 무너졌다지만,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공공연하게 당위적인 '갑을 관계'에 빗대는 그의 머릿속에는 과연 어떤 교육관이 들어 있을까. 나는 그에게 '갑'이어야 하는 교사가 순수하다는 말은 또 대체 무슨 말씀이냐고 정말 간절하게 묻고 싶다. 그렇게 작은 충격에도 견디지 못하는 교사를 진정한 교사로 볼 수는 없겠기에 하는 말이다.

차제에 김승환 교육감에게 몇 마디 꼭 하고 싶다. 허울뿐인 자율을 들먹이는 교육부의 어떤 압박과 회유에도 결코 흔들리지 마시라. 김규령 의원과 같은 반대파들의 딴지는 과감하게 무시하고, 절차에 따라 전북학생인권을 만천하에 공포해 주시라. "가고 싶은 학교 행복한 교육공동체"라는 전북교육청의 비전마따나, 진정한 전북 교육의 출발점에 그 학생인권조례가 있어야겠기 때문이다. 혹여 두려움이나 걱정이 생기거든 골방에 붙들어매 두시기 바란다. 김 교육감의 뒤에는 새로운 전북 교육을 바라는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 교사, 시민들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전북학생인권조례(안), #조례 공포, #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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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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