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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도 보이는 웅장한 당간지주

굴산사지 당간지주
 굴산사지 당간지주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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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산사를 찾아간 것은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 때다. 무더위가 시작되어 문화유산 답사 여건이 좋지는 않지만, 고대도시 명주의 대표적인 절 굴산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다행히 이번 여행에는 강릉에 사는 불교미술전문가가 동행을 했다. 그는 우리를 먼저 굴산사 당간지주 앞으로 데리고 간다. 당간지주는 큰길에서 350m쯤 떨어진 논밭 가운데 있다.

굴산사는 신라시대 구산선문중 하나인 사굴산문의 절이다. 사굴산문은 범일국사에 의해 개창되었다. 범일(梵日: 810-889)은 810년 강원도 명주(溟州) 땅에서 태어났다. 824년(선덕왕 16년) 출가하였고, 831년 당나라로 유학하였다. 제안(齊安)과 유엄(惟嚴)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소주(韶州)에서 『육조단경』을 보고 남종선을 습득하였다. 846년(문성왕 8년)에 귀국하여 백달산에 머물며 정진하였다. 851년 명주도독의 청을 받아 사굴산문을 개창하고 40여 년간 법을 전했다.

굴산사지 승탑
 굴산사지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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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일국사가 사굴산문을 개창한 곳이 바로 굴산사다. 이곳 굴산사에 범일국사와 관련된 전설과 유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전설이 석천(石泉)과 승탑에 관한 것이다. 석천은 돌로 쌓은 샘으로, 이곳에서 햇빛이 비치는 물을 먹은 마을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처녀는 이 아기를 인근 학바위에 버렸으나, 학이 돌봐줘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가 자라 범일국사가 되었고, 죽어서도 대관령 성황신이 되어 이 고장을 지켜준다는 것이다.

승탑도 역시 범일국사의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승탑이 신라말 고려초 양식이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곳이 사굴산문임을 알려주는 좀 더 확실한 증거는, 1983년 출토된 '사굴산사(闍崛山寺)'라는 명문기와다. 당간지주 역시 신라말기의 작품으로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돌을 거의 다듬지 않아 단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는 웅장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이것 역시 범일국사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얼굴이 깎여나간 부처님에게서...

굴산사지 석불좌상
 굴산사지 석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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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를 보고 논둑길을 따라가면 마을 근처에 유물각이 하나 보인다. 그곳에 석불좌상이 있다. 얼굴은 둥글고 긴 타원형인데, 어떤 연유에선지 평면이 되었다. 어깨는 넓고 법의의 표현이 단순해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다. 가슴 부근에 양손을 모은 것으로 보아 비로자나불로 보인다. 머리 위에 보개가 있는 특별한 양식을 보여준다. 고려 초인 11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훼손 정도가 심해 문화재자료가 되었다. 전국을 다녀보면 이처럼 훼손된 문화재가 많은데, 가장 불쌍한 문화재가 머리 없는 부처님이다. 다음이 얼굴이 훼손된 부처님이다. 코가 납작해지거나 깨지기도 하고, 눈과 입이 마모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곳 석불좌상은 얼굴 전체가 깎여나갔다. 그 때문에 부처님의 상호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가장 중요한 얼굴이 훼손되었으니 더 이상 뭘 말할 수 있겠는가? 

범일국사 승탑은 아닌 것 같은데...

석천
 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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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와 석불좌상을 보았으니 다음 차례는 승탑이다. 굴산사지 승탑은 학산천에 놓여있는 굴산교를 건너 금평로 건너편에 있다. 그러므로 도로를 따라 학산 오독떼기 전수회관 방향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난 논밭길로 들어가야 한다. 학산 마을에는 송림이 잘 조성되어 있다. 굴산사지 영역은 상당히 넓은 평지고, 평지 뒤쪽으로 얕은 언덕을 따라 학산(鶴山)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석천(石泉)을 먼저 본다. 범일국사를 잉태하게 한 그 샘이다. 해가 담긴 물을 마신 뒤 배가 불러왔고, 13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전설의 샘이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조당집(祖堂集)』『임영지』에 나온다. 그런데 『조당집』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다.

머리 없는 석불좌상
 머리 없는 석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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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溟州) 굴산에 고 통효대사(通曉大師) 사염관(嗣鹽官)이 있었는데 법호는 범일이고 속성(俗姓)은 구림부족(鳩林府族) 김씨다. 조부의 이름은 술원(述元)으로 관직이 명주도독에 이르렀다. 그는 조심스럽고 공평하게 민속(民俗)을 살폈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 때로는 관대하고 때로는 엄격했다. 그래서 지도자로서의 높은 절개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그 어머니 문씨는 누대로 걸쳐 부잣집 사람으로, 여성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그를 임신하였을 때 해를 어루만지는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그리고 잉태한 지 13개월 만인 810년(元和 5年 庚寅) 정월 상진(上辰)에 태어났다. 부처님 같은 곱슬머리의 특이한 모습을 하고, 정수리에는 진주모양이 있는 기이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석천 위에는 머리가 없는 석불좌상이 있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고, 왼쪽 어깨와 다리 부분이 훼손되어 종교적인 경건성이나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어렵다. 원래 이곳에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곳 석천에서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낮은 언덕에 예술성이 뛰어난 승탑이 하나 서 있다. 이것이 보물 제85호인 굴산사지 승탑이다.


승탑은 지대석,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기단부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높은 편이다. 왜냐하면 기단부가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대석은 마름모꼴을 연결한 팔각형으로 아래가 넓고 위로 가면서 좁아지는 형태다. 이곳에는 여덟 마리의 사자가 양각되어 있다. 조각이 아주 정교하지는 않지만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기단부에서는 운문과 연화문을 확인할 수 있으며, 중대석에서는 정교하게 새겨진 주악상을 확인할 수 있다. 기단부 조각이 예술적인 측면에서 가장 아름다워 굴산사지 승탑의 백미를 이루고 있다. 이들 악사가 연주하는 악기는 생황, 횡적(橫笛), 피리(簫), 비파, 동발(銅鈸), 필율(篳篥), 박(拍)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 눈에는 피리와 비파 밖에는 안 보인다. 그렇지만 승탑의 주인은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즐거움을 누리는 셈이다.

굴산사지 승탑
 굴산사지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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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신부의 8각 탑신석과 옥개석은 비교적 단순하게 처리했다. 문비의 흔적이 보이고 옥개석도 8개의 기왓골만 표현했다. 상륜부는 8각의 노반 위에 앙화와 보주를 얹었다. 굴산사지 승탑은 전체적인 구조와 비례보다 장식적인 기법이 뛰어난 편이다. 단국대학교 엄기표 교수는 2011년 발표한 <굴산사지 당간지주와 석조부도의 양식과 미술사적 의의>에서 이 승탑을 신라말에서 고려초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특히 기단부의 양식은 신라말이고, 탑신부의 양식은 신라말 고려초의 과도기 양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동시대 승탑과의 친연성을 비교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에 더해 승탑의 주인공이 범일국사라고 조심스럽게 주장한다. 그러고 보니 굴산사지는 모든 게 범일국사로 귀결된다. 범일국사라는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기록이 없는 역사는 가설(Hypothese)일 뿐인데, 역사학자들은 그것을 늘 명제(These)로 만들고 있다. 

굴산사지 조사와 발굴보고서

승탑 아래로 보이는 굴산사지
 승탑 아래로 보이는 굴산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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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산사지에 대한 조사는 1936년 처음 시작되었다. 대홍수로 인해 초석과 계단 등 절터의 일부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1983년에는 농업용수로 공사과정에서 사지가 더 많이 확인되었고, 명문기와도 발견되었다. 문화재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98년에야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승탑의 정비와 복원을 위해서였다. 2002년에는 태풍 루사로 인해 이 지역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굴산사지 정비 기본계획이 세워졌다. 1년 동안의 조사와 정비를 거쳐 2003년 굴산사지가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때 방형초석이 있는 법당지와 ㄷ자형 행랑지 등 5동의 건물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탑지, 보도시설, 담장,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그 후 2010년 들어 중원문화재연구소가 굴산사지 조사, 정비, 복원을 위한 10개년 계획을 세우고 장기적인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발굴조사에 앞서 시굴조사를 했고, 굴산사 사역의 범위, 유적과 유구의 분포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2011년 10월 "고대도시 명주와 굴산사"라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사적 제448호 굴산사지와 문화재 위치도
 사적 제448호 굴산사지와 문화재 위치도
ⓒ 중원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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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산사지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유구와 유물은 대개 12세기 이후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굴산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사굴산문의 개창지라는 점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굴산사 창건연대의 유구와 유물을 찾는 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발굴도 이에 초점을 맞춰 진행될 것이다. 굴산사 창건 당시의 가람구조를 확인하고, 이곳에서 발굴된 유구와 유물을 통해 굴산사지를 정비 복원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면서 관동지방에서 굴산사지가 차지하는 역사성과 사회성, 사굴산문의 위상 등을 파악하는 종합적인 연구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태그:#굴산사(지), #당간지주, #석불좌상, #승탑, #석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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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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