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물든다'는 말, 참 좋다. 배척이 아니고 동화며 따로가 아니고 함께인 이 아름다운 말을 오래 잊고 살았었다.

대학 시절 색채학 시간에 옷감에 물감을 들이는 작업을 해 본 일이 있다. 지금도 내 어머니가 갖고 계신 그것은 목에 하는 마후라로 재단된 흰색 비단이었는데 거기에 나는 짙은 남색 물감을 들였다. 하늘색도 아니고 파랑색도 아닌 쪽빛 남색으로 물들이기 위해 색상 조절에 몹시 애를 태웠던 기억이 지금도 가슴을 조이게 한다. 

염색 과정은 잊혀져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그린 별 문양에 들여지던 남색에 당시 마음이 부풀었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염색 작업이 끝난 뒤 말리기 위해 빨랫줄에 곱게 펴서 널었을 때 그걸 바라보고 있던 내 눈 앞으로 쏟아지던 남색 별들...

아무것도 없던 하얀 천에 돋아난 별들을 보며 '물든다'는 게 얼마나 기가 막힌 합일이며 동조이고 수락인지 그때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물드는 건 그냥 저절로 드는 게 아니라 숨을 졸이는 긴장과 섬세함, 애틋한 기다림이 동반된다는 것도 덤으로 깨달았다.

며칠 전에 우연히 TV에서 구순 노모 두 분을 모시고 사는 예순 후반의 부부 이야기를 다룬 다큐를 보았다. 홀로 되신 양쪽 어머니를 한집에 모시고 산 지 이십 년이 넘은 부부였다. 보는 내내 사는 이야기를 저렇듯 잔잔하고 평화롭게 그려내는 사람들도 있구나하는 마음이 절로 한없이 펼쳐지며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나레이션이 없어도 그들의 속 깊은 곳까지 투명하게 비쳐지는 일상, 사돈지간인 두 노모와 칠순이 내일모레인 부부의 하루하루는 이미 서로에게 흠뻑 물든 일체감마저 느껴졌다.

어느 날 사위이자 아들인 남편이 봉숭아 잎을 따와 그릇에 백반을 넣고 찧는다. 그리고 두 어머니에게 다가와 손가락에 물을 들여준다. 다 늙어 무슨 봉숭아물이냐고 손사래 치는 노모들의 손을 꼭 붙잡아 정성들여 물을 들이며 아들이자 사위가 말했다. 

"어머니, 이렇게 손톱에 봉숭아물을 곱게 들이면 나중에 저승갈 때 환하게 등을 밝혀 준대요. 그럼 어둡지 않아 넘어지지 않고 잘 가실 수 있잖아요."
"그래? 그럼 사돈, 우리 그날 꼭 같이 갑시다. 환하게 등을 밝혀준다니 소꿉동무처럼 같이 가면 심심하지도 않고 좋겠네."
"암요. 같이 가야지. 사돈 없으면 심심해서 내가 어찌 사누? 꼭 같이 갑시다. 한 날 한 시에."

노모의 저승 가는 길을 밝혀주기 위해 곱게 찧은 봉숭아 잎을 손톱에 올리고 비닐로 싸 실로 꼼꼼하게 감아주던 남편의 표정이 꽃등보다 더 환했다.  

그 장면에서 나는 가슴에서 뭉클한 기운이 올라와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아! 물든다는 건 마음속에 꽃등 하나 켜는 일이구나... !

사랑도 결국은 상대에게 '물드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서로에게 꽃등이 되는 일. 혼자였던 시간을 밝혀줘 환한 발길을 이끄는 일. 천에 염색을 들이는 일이나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일이나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고 농도 조절에 애태움이 동반되듯이 그런 만큼 간절함의 기원이 굳건해지는 일.

사랑이 '물드는' 일이라는 걸 노래한 손승연의 <물들어>는 그런 의미에서 사랑 노래의 백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머리에 얹은 너의 손
나는 잊을 수가 없어서
내 아픈 가슴을 너의 익숙함으로
다시 감싸줘야 해

나에게 너의 손이 닿은 후
나는 점점 물들어
너의 색으로 너의 익숙함으로
나를 모두 버리고

물들어 너의 사랑 안에 나는
물들어 벗어날 수 없는 너의 사랑에
나를 모두 버리고
커져만 가는 너의 사랑 안에 나는 이제

손끝으로 파고 와 목을 스친 상처로
심장 안에 머물며 나는 이제 너에게

물들어 너의 사랑 안에 나는
물들어 벗어날 수 없는 너의 사랑에
나를 모두 버리고
커져만 가는 너의 사랑 안에 나는 이제

물들어
                  - 손승연 <물들어>

물이 들면 그 부분은 영원히 원래 색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고 자주 빨다보면 흐려지기는 하지만 물이 든 부분은 흐려진 채로라도 그 자리에 남는다. 손톱에 들인 봉숭아물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흘러 손톱이 자라 잘려나가지 않는 한 봉숭아 꽃잎 색깔이 원래 살색으로 돌아오지는 않는 것이다.

물이 든다는 건 그런 것이다. 사랑도 그런 것이다. 동화되고 흡수되는 것! 그리고 영원한 흔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