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긴 밭이랑에 빼곡한 쇠비름. 이놈들을 이리저리 헤집고 나서야 겨우 이 밭이 깨밭인가 싶다. 어린잎이 겨우 몇 개 달린 이 여린 깻잎을 지키기 위해 우악스럽게 쇠비름을 뽑아냈다.

하루 종일 고작 밭이랑 두 개를 맸을 뿐인데 외할머니는 무척 좋아하셨다. 소소한 볼일을 보러 오신 동네 어르신들께도, 잠시 말동무하러 오신 친구분께도 당신의 손녀딸이 일손을 많이 거들었다며 자랑을 하셨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외갓집. 집은 낡았는데 집 뒤에 있는 소나무는 여전히 푸르다.
▲ 옛날 외갓집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외갓집. 집은 낡았는데 집 뒤에 있는 소나무는 여전히 푸르다.
ⓒ 여정희

관련사진보기


"야가 그 아프다던 손녀딸이가? 이키 건강하게 돼가 다행이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실은 건강하지 않았다. 몇 년째 병명도 알 수 없는 통증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는 일도 여전했다. 조금 좋아졌다 싶으면 다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우울감과 좌절감에 허덕이다 답답한 일상의 공간을 떠나고 싶어 시골 외갓집으로 간 거였다. 시골 냄새가 그리웠고 흙길 밟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이전에 요양 삼아 두어 달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누워만 있던 내게 오셔서 내 배를 만지시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요 뱃속에 있는 내장을 다 꺼내가(꺼내서) 맑은 냇물에 설렁설렁 행가가(행궈서) 다시 넣으면 안 좋겠나."

살아날까 싶었던 그 손녀딸이 이렇게 밭일까지 거들어 줄 정도가 됐으니 얼마나 기쁘셨을까. 하지만 속으로는 미안했다.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힘만 가지고 이곳엘 왔으니…. 다행히 그때는 밭일을 거들 수 있을 만큼 알 수 없는 힘이 생겨났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지긋지긋한 투병이 시작되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의아한 일이다.

"야가 그 아프다던 손녀딸이가?"

우리 외할머니는 꼬부랑 할머니다. 마흔 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감나무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치셨다. 그 이후로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신다. 허리를 펴지 못한다는 것.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 고통을 알 수 없다. 등과 허리에 하루 종일 쌓아 놓았던 무거운 피로를, 딱딱한 바닥에 누워 큰 대자로 뻗어 한 번만이라도 잘 수 있다면 싹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없다. 매일같이 새우잠을 자야 한다. 이렇게 힘든 하루를 수십 년 동안 보내셨을 그 고통과 피로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도 허리 펴지 못한 세월을 몇 년을 보내고 나서야 이 고통을 알았다. 난 매일매일 살기 싫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20대라는 나이가 더 싫었다.

등이 굽은 우리 외할머니는 일밖에 모르시는 외할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으며 논일, 밭일 다 하셨다. 게다가 장손 며느리였던 외할머니는 도시로 시집간 딸년들의 아이들까지 키워내야 했다. 방학 때마다 찾아오는 너덧 명의 손주들 뒤치다꺼리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시골 반찬이 도시 아이들의 입맛에 맞을까 늘 염려하셨다. 작고 딱딱한 곶감만 주셨던 외할아버지와는 달리, 바지 주머니 속에 몰래 감춰두었던 말랑말랑하고 큰 곶감을 손주들 손에 살짝 쥐어주곤 하셨다.

큰 키, 툭 불거진 광대뼈, 여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외할머니는 성격도 외모만큼이나 투박했다. 남들에게 잘 보일 줄도 모르고 말도 예쁘게 포장할 줄 몰랐다. 이런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가려서 대하거나 계산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그저 순박한 시골 아낙이었다.

"아이고 우째 할매가 만 원밖에 안 주노"

주인없는 문패에 거미줄만 걸려 있다.
▲ 문패 주인없는 문패에 거미줄만 걸려 있다.
ⓒ 여정희

관련사진보기


외할머니가 차려주신 점심밥을 먹고는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집에 갈 채비를 했다. 겨우 하룻밤을 자고는 무심히 가겠다고 한 거다.

"좀 더 있다 가지, 와 벌써 갈라카노?"
"… 학교 가야 돼서요."
"그렇나, 그라마 어여 가야지. 잠깐 있어바라."

장롱 속을 뒤적뒤적 하시더니 만 원짜리를 꺼내셨다. 손사래를 치며 안 받는다고, 오히려 용돈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거절했지만 기어이 주시는 그 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뿌리치고 가버리면 더 속상해 하실 것 같아 도리가 없었다.

"니 할애비한테는 돈 안 받았다 카고, 돈 주면 그것도 꼭 받아 챙기래이."

외할머니는 돈을 쥐어 주시며 당부까지 하셨다.

외할아버지께 인사드리려고 밖으로 나왔다. 밭일을 끝내고 들어오시는 길에 마주쳤다.

"갈라꼬?"
"네. 다음에 또 찾아뵐게요."
"그래. … 할매가 돈은 좀 주드나?"
"네. 많이 받았어요."
"그래 그래. 어여 가거라."

손녀딸이 한 푼이라도 더 받게 해주고 싶은 외할머니, 가겠다고 나선 손녀딸에게 다른 말은 안하시고 대뜸 '돈 받았나?'를 물으시는 외할아버지. 돈이 당신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하시는 듯했다.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인사를 하고는 대문을 나섰다. 버스를 타려면 꽤 먼 길을 가야 한다. 한참을 걸었다.

"야야~!"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외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계셨다. 한손은 우산을 들고 나머지 한손은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긴 다리를 다 가리지 못하는 깡총한 바지를 입으시고는 흰 고무신을 신은 채, 외할아버지가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나를 부르고 계셨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자리에 섰다.

"아이고, 야야. 난 니 할미가 한 3만 원은 줬는지 알았더만 만 원 밖에 안줬다 안카나. 아이고 우째 할매가 만 원밖에 안 주노."

기어이 모자란(?) 2만 원을 내 손에 쥐어 주셨다. 그 2만 원을 주시려고 빗길에 자전거를 타고 오시다니. 눈물이 핑 돌았다. '자주 찾아뵈어야지. 자주 찾아뵈어야지.' 다짐인지 주문인지 모를 이 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나의 다짐은 한참 동안 지켜지지 못했다. 다시 찾은 건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사람구실할까 싶었던 손녀딸이 결혼을 한다니, 외할머니는 결혼식장에 무척 오고 싶어 하셨지만 거동이 불편하셔서 못 오셨다. 남편과 함께 외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간다는 것이 결혼을 하고도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10년, 외할머니를 잊고 살았다

어릴 적 가끔 나타나 나를 깜짝 놀라게 하던 녀석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담장에서 대대로 살고 있나보다.
▲ 담장에 있는 뱀 어릴 적 가끔 나타나 나를 깜짝 놀라게 하던 녀석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담장에서 대대로 살고 있나보다.
ⓒ 여정희

관련사진보기


외할머니께 가면서도 죄송한 마음이 컸다. 외갓집을 못 찾은 그 지난 시간이 나에게도 버텨내야 하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몇 번은 찾아뵐 수 있었을 텐데…. 10년이 넘는 나의 투병생활 중에도 몇 달씩 아프지 않은 때가 있었다. 아플 땐 아파서 찾지 못했고, 안 아플 땐 나도 젊고 예쁜 20대라는 나이를 즐기고 싶어 찾을 생각을 못했다. 그때의 나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라는 존재를 아예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동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내가 입원했다는 소식, 수술했다는 소식, 진통제로 겨우 30분 쪽잠을 자고 있다는 얘기까지 엄마를 통해 듣고 계셨다. 다 키워놓은 손주 자식이 당신보다 먼저 가버릴까봐 숱한 눈물을 흘리셨다는데 나는 그런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안중에도 없었다.

남편과 함께 찾은 외갓집. 고향에 온 것 같았다. 좋았다. 외할머니도 무척 좋아하셨다. 이제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손녀딸 건강이 늘 걱정거리였던 우리 외할머니. 지금은 당신이 아프시다. 연세가 많이 드셔서기도 하지만, 외할아버지를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놓으시고는 꼬부라진 허리 때문에 생긴 지병이 더 심해지셨단다. 외할머니는 몇 년째 요양원 생활을 하고 계신다. 당신의 아들딸들이 모두 사는 게 고만고만하고 여러 사정들이 있어서 외할머니를 모실 형편이 안 된단다.

요양원 생활이라는 게, 듣고 보니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 짚고 다니다 미끄러져 넘어진다고 지팡이를 뺏겼다. 다닐 일이 있으면 휠체어만 타야 한다. 소화가 잘 안 되고 자주 속이 더부룩하다고 하셨지만 먹는 걸 아주 좋아하셨다. 요양원에선 소화 잘 되라고 밥이며 반찬이며 모두 갈아서 죽처럼 준단다. 맛있는 걸 드시는 게 낙인 분인데 그걸 어떻게 견디고 계실지. 속이 상했다.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이모나 외삼촌이 가져가면 요양원 측에서 다 뺏고는 다음부턴 이런 걸 가져오지 말라고 했단다. 죽만 드시다 보니 소화력이 너무 약해져서 이젠 요구르트 같은 것만 먹어도 설사를 한단다. 좋아하는 사탕은 목에 걸릴까봐 뺏고 돈이라도 드리면 다른 사람이 훔쳐간다고 주지 말라고 한다니. 이게 사람이 사는 곳인지 사육이 되는 곳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엄마도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요양원에 들어가실 때만 해도 밭일도 집안일도 혼자 하실 만큼은 됐는데 겨우 4년 정도 만에 혼자 걷지도 못하시고 변도 혼자 처리를 못하신단다. 가끔 사람도 잘 못 알아보신다니 마음이 짠했다.

세월이 흘러도 무심한 내 성격은 개도 못주고, 외할머니께 연락을 드린 지도 까마득하다. 늘 걱정만 끼쳤던 손녀딸이 이젠 아이도 둘이나 낳았는데 아직 보여드리지도 못했다. 찬바람이 불면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를 찾아뵙기로 했다. 짧은 가을이 다가기 전에 먼 서울 길 떠날 채비를 서둘러야겠다.

흙담 아래서 우리 아이들과 사진 한장.
▲ 아이들 흙담 아래서 우리 아이들과 사진 한장.
ⓒ 여정희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가족이야기> 응모글 입니다.



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태그:#외갓집, #시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