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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2월 24일 엄마의 일기.
 1986년 12월 24일 엄마의 일기.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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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23시 전화가 왔다. 아들이 연행되었다고. 하늘이 무너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인자들한테 잡히지 말아야 할 텐데.

엄마의 다이어리를 덮었다. 유치원에 간 막내를 데려오려면 지금 친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엄마, 이 다이어리 내가 가져갔다가 가져올게." 친정을 나섰다. 지하철에 자리잡은 나는 다이어리를 폈다.

12월 25일 김밥을 가지고 면회 가려고 서대문 경찰서에 전화를 하니 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디에 있을까 학교에 가서 알아보니 성남에 있는 보안대라고 한다.
12월 26일 통곡

눈물이 흘러내린다. 주체할 수 없다. 지하철 안에 사람들이 우는 내 모습을 보며 '미친년'이라 하지 않을까? 미친년이 되지 않으려면 다이어리를 덮어야 하는데 그 역시 쉽지가 않다.

수배령 떨어진 오빠... "그 자식 '건대사태' 주동자다"

보안대에 연행된 우리 오빠. 오빠는 나에게 각별했다. 우리 형제는 4남매로 맨 위에 언니가 둘이고 오빠 하나 그리고 나였다. 오빠는 나보다 일곱 살이 많다. 오빠는 까까머리 중학생 때 초등학교 1학년인 나를 데리고 과학관이며 어린이대공원이며 열심히 다녔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갈 때면 나는 업어달라고 했다. 그뿐인가. 배고프다고 번데기를 사달라고 졸랐다. 거기까지만 해도 봐줄 만할 텐데. 버스에서 멀미하고 토하기도 했으니, 중학생 오빠는 버스에서 얼마나 창피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아도 오빠한테 참 미안하다.

그런 오빠가 1983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오빠는 대학 3학년이 되면서 집에 잘 안 들어왔다. 안 들어오는 오빠를 대신해서 형사들이 집 앞에 진을 쳤다. 어느 날인가 열쇠가 없어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 있는데 형사들이 내게 다가왔다.

"왜 집에 안 들어가니?"
"열쇠가 없어서요."
"슈퍼 아저씨가 너 집에서 나왔다고 말씀하시던데 열쇠 있으면서 우리 때문에 안 들어가는 거 아니야?"

나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아저씨들이 기가 막혔다. 더이상 아저씨들의 거짓말을 들을 수가 없어 친구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렇게 우리 집 앞에서 진을 치는 형사들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빨갱이 집안이라 수군거렸다.

그리고 4학년이 된 오빠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경찰인 지인을 통해서 오빠가 왜 수배되었는지 알아보셨다. 돌아온 대답은 "건대 사태 주동자다. 그 자식 완전 빨갱이다. 더 이상 묻지 마라"는 거였다. 덧붙였던 말은 오랜 기간 형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거였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시에 건대 사태는 1200명 이상이 구속된 무척 큰 사건이었다. 단일 사건의 최대 구속자 수를 기록한 사건인데 오빠가 그 사건의 주동자였다니, 그리고 빨갱이라니. 아버지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고향 북한을 떠나 남으로 내려온 월남자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자식이 빨갱이라는 경찰의 말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기가 꺾인 아버지는 오빠 사건에 대해서 더 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엄마의 사진
▲ 엄마 엄마의 사진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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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를 가져가고 몇 주가 지난 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내가 가져간 다이어리에 뭐가 써 있는지 기억나?"
"기억하지. 너희 오빠 구속되었을 때 이야기잖아. 너희 학교에도 형사가 찾아 왔었다며."
"큰언니 시댁에도 형사가 찾아갔는데. 뭐 우리 학교에 온 거쯤이야 일도 아니지."

오빠를 잡지 못하자 형사들은 오빠를 잡으려고 혈안이 됐다. 급기야 형사가 큰언니 시댁까지 찾아갔다. 결혼한 언니는 형부와 미국에 가서 국내에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소식을 들은 미국의 언니가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어찌 된 일이냐며 형사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형사가 들이닥쳤을 때 사돈 어른들이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부모님 입장에선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1986년 12월 오빠가 학교 앞에서 연행되었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 날. 나중에 알고 보니 오빠가 구속된 이유는 학교축제 때 상영할 영화를 오빠가 만들었는데 그 영화의 내용이 국가보안법 위반이었기 때문이란다. 오빠는 건대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엄마는 오빠를 면회하러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하지만 연말연시라 연행된 지 열흘인 1987년 1월 3일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면회가 가능했다. 오전 10시에 면회를 간 엄마는 오후 3시가 되어서야 통사정 끝에 오빠를 볼 수 있었다.

87년 1월 3일자 엄마의 일기.
 87년 1월 3일자 엄마의 일기.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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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모기 한 마리도 가고 오지 못할 답답하고 희미한 창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니 눈물이 앞을 가리어 보이지가 않는다. 다시 보고 또 보아도 야윈 얼굴 무슨 말을 하였는지. 몸 건강히 있으라고 어머니 안녕히 가시라고. 돌아오는 길에 아들에게 가슴 아픈 말을 하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1월 9일 대공과에서 마주 보고 면회. 재조사를 받는다고 이렇게 추운 날씨에 잠(도 재우지도 않고) 먹이지도 아니하고 개 끌고 다니듯이 어쩌자는 것이냐!

엄마 다이어리에 박종철 열사 이름이 나오네?

나는 구속된 오빠가 걱정되었다. 집에 통 안 들어와서 오랫동안 못 본 오빠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구치소로 면회를 갔다. 그런데 동생인 나도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면회가 안 된단다. 오빠가 형을 몇 년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오빠를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재판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퇴를 해서라도 재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87년 1월 19일자 엄마의 일기.
 87년 1월 19일자 엄마의 일기.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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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검찰청에 갔더니 면회 해제란다. (박종철) 살아서 나와라!!
1월 24일 아버지와 같이 면회 입고 갔던 잠바 덧바지는 어디에 벗겨 숨겨두고, 홑청 작업복을 입고 손을 싹싹 비비며 오들오들 떨면서 면회를 한다. 누가 하늘 같은 이 자식들을 이렇게 하였을까?

엄마의 다이어리에 박종철 열사 이름이 나오네. 왜 나오지? 87년 1월. 그렇다. 1987년 1월은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죽었던 때다. 그러면 오빠가 연행되어 보안대, 경찰서, 검찰청으로 끌려다니며 수사받던 때에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죽었다는 말이다. 다이어리를 읽기 전까지 몰랐다. 오빠의 구속과 재판이 87년 6월 항쟁 시기와 엇비슷해서 난 민주화 된 후에 오빠가 구속된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순간 머리에 스친 생각은 '아, 오빠도 정말 위험했구나. 우리 오빠도 박종철 열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구나'였다. 아, 엄마는 얼마나 무서운 날들을 보냈던 것일까?

당시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해서 정권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를 했다. 참으로 자신만만하고 호기로운 정권이었다. 그뿐인가? 대통령 직선제를 말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한다며 정권은 종주먹을 들이댔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임에도 정권은 뻔뻔스럽고 당당했다. 그 자신만만한 자들의 손아귀에 오빠가 있었다.

재판이 열리는 날, 조퇴하고서 재판에 참석하겠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가 학교에 전화 해주겠다 했지만 내가 말을 하겠다 했다. 그런 일까지 엄마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난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오늘 오빠 재판이 있어서 조퇴했으면 하는데요."
"오빠 재판?"
"네 학생운동 때문에요."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조퇴는 안돼. 부모님이 어떤 생각으로 너의 재판 참석을 허락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잘못 생각하신 거야. 난 널 위해서 조퇴를 허락할 수가 없다."
"오늘 오빠를 못 보면 언제 볼지 몰라요. 저는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면회가 안 된단 말이에요."

결국, 난 조퇴를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핑계를 대고 조퇴증을 끊어달라고 할걸.' 난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다. 몇 년간 오빠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러웠다.

아버지가 통곡을 하셨단다, 통곡을

얼마 전, 엄마가 오빠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재판정에서 변호사가 했던 말을 지금도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어."
"뭐라 했는데."
"피고인의 아버지는 직장생활로, 피고인의 어머니는 살림과 가게 일에 바빠서 피고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판사님 선처해....."

엄마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우신다. 변호사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부모님은 먹고살기 바빠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자식에게 똑바로 가르치지 못한 부모가 되었다. 자식의 형을 줄이기 위해선 어떤 모욕도 참아야 했다. 변호사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았지만, 모욕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고 엄마의 마음엔 상처로 남아 있다. 재판일에 대한 엄마의 기록은 이렇다.

3월 19일 비. 오늘은 재판날. 아버지는 6가에서, 나는 집에서 가기로 하였다. 비가 내린다. 우리의 슬픈 마음을 (하늘도) 같이 하나보다. 법정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차마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 우리가 여기서 만나야 하나 그들에 의해서. 드디어 들어왔다. 양팔이 잡힌 채 들어온다.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7시경 아버지가 귀가하셨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충혈이 되었다. 옷을 벗지도 않고 아버지는 통곡한다.

마흔 넘게 살아오면서도 나는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속마음을 보이지 않는 분인데 그런 아버지가 통곡하셨단다. 통곡을. 엄마의 다이어리를 읽다 보면 오빠는 구치소에서도 금치를 당하고 보안계장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열흘 동안 단식을 했다. 단식하는 자식들을 따라서 구속자 어머니들도 농성했다. 몸도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빠가 단식을 열흘이나 했다니. 몸이 성해도 힘든 단식을 그것도 교도소에서.

몇 차례의 재판을 받고 오빠는 다행히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리고 민주화가 되고 나서 오빠는 사면복권이 된다. 출소한 뒤 오빠는 무릎이 시리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고문의 후유증일 것이다. 상처는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남는다. 가족들도 많은 상처를 받았다. 사실 오빠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많다. 5공화국 때 죽은 사람들만 해도 얼마나 많은가? 그 수많은 고통이 지금은 다 치유가 되었는지, 아물었는지 묻고 싶다. 죄지은 자는 죗값을 치르고 처벌을 받은 것일까?

스무 장이 넘는 영수증... 엄마의 피눈물이구나

87년 3월 23일 엄마의 일기.
 87년 3월 23일 엄마의 일기.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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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직도 그때의 다이어리, 영치금 영수증, 신문기사, 사면증을 잘 보관해 두고 있다. 엄마의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왜 이거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는지 알아? 너무 억울해서. 나중에 좋은 세상 오면 이 억울함이 풀릴 날이 오겠지. 그런 마음에서 하나도 안 버리고 증거로 모아둔 거야."

엄마가 모아둔 영치금 영수증을 한 장 한 장 헤아려 보았다. 스무 장이 넘는다. 스무 번이나 구치소로 면회하러 다녔을 엄마, 홀로 다니며 길거리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영치금 영수증을 헤아리다가 깨달았다. 이 영수증 한 장 한 장이 그냥 엄마의 피눈물이구나.

박종철 열사의 소식을 듣던 날, 엄마는 '살인자'들의 손아귀에 있는 아들 걱정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을 것이다. 이미 수사 과정에서 고문을 당한 오빠가 구치소 안에서 또 구타를 당하고 열흘이나 단식을 할 때 엄마는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지내야 했을까? 엄마의 피눈물, 원통함이 풀리는 그 날은 온 것일까?

얼마 전, 전두환 전대통령의 아들은 기업들로부터 받은 비자금을 국고로 환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16년이 걸린 일이다. 이제, 엄마의 억울함이 조금은 풀렸을까? 엄마와 같은 분들의 한이 다 풀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덧붙이는 글 | <가족이야기> 응모글입니다.



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태그:#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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