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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간 엄마의 비밀을 아무도 몰랐다. 아빠도 몰랐던 그 사실... 엄마의 눈물을 보게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엄마는 우리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 아니, 내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독하다고 항상 생각했다.

우리 식구 중 그 누구도 엄마의 눈물을 본 이가 없었다. 큰언니에게 듣기로는 아빠가 두 번째 담석증으로 간을 2/3나 절제하고 중환자실에 누워 사경을 헤맬 때도 엄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했다.

19살에 아빠에게 시집와 온갖 고생과 아빠의 병수발을 하며 우리 5남매를 키우신 엄마. 엄마에게 왜 힘들고 고단한 날들이 없었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우리 5남매를 키우시기 위해 눈물 흘리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뒤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앞만 보시고 사셨던 것 같다.

어릴 적 내 기억 속 엄마는 항상 꽃무늬 고무줄 몸뻬(여성들이 일할 때 입는 바지)에 구멍난 검정고무신을 신고 온 동네를 다니셨다. 머리에는 그때 그때 다른 물건들이 올려져 있었다. 하루는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를 파셨고 또 다른날은 생선을 파셨고 또다른 날은 교자상이 있었다. 엄마 키는 148cm였는데, 안 그래도 작은 엄마를 더 작게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 5남매를 키우신 억척스러우신 분이 바로 우리 엄마다.

우리집은 내 위로 큰언니, 작은언니, 오빠, 나, 남동생, 이렇게 2남 3녀다. 34년을 살면서 나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그것은 큰언니 위로 또 한 명의 자식이 있었다는 사실. 아빠도 몰랐고 나도 몰랐다. 우리 식구 중 그 누구도 몰랐다. 오로지 엄마 자신만 알고 있었다.

억척스러웠던 우리 엄마가 쓰러졌다

얼마 전 엄마가 심하게 아프시다는 얘기를 듣고 부랴부랴 엄마가 계시는 강화도로 향했다. 엄마는 워낙 일을 많이 하셔서 허리디스크에 관절염, 하지정맥류까지 많은 병을 앓고 계셨다. 엄마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셨다. 그랬기 때문일까. 엄마를 마주한 곳은 강화 병원 이었다. 엄마는 팔에 링거를 꽂고 있었고, 얼굴은 예전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빠가 "니 엄마가 생선회를 먹고 왔는데 그때부터 이상해졌다"고 했다. 집 앞까지는 잘 왔는데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술먹은 사람처럼 비틀비틀 거리며 픽 쓰러졌다는 것이다. 아빠는 너무 놀라 엄마에게 물 한 바가지를 뿌렸는데, 그래도 엄마가 정신을 못 차려 급히 119를 불러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동네 아저씨가 복어회를 사준다고 하셔서 복어를 먹고 왔는데 그 복어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나보다. 다행히 엄마는 무사하셨다.

엄마는 이번 일로 저승 문턱까지 갔다왔다. 저승사자도 봤다며 너스레를 떠셨다. 옆에 계시던 아버지가 피곤하셨는지 머리가 자꾸 땅쪽으로 향했다. 70 되신 아버지가 혼자서 엄마 병수발을 하고 보호자용 간이 침대에서 며칠을 보냈으니 피곤하실 만도 하다. 나는 병실을 지키느라 며칠 동안 집에도 못 가셨을 아버지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다시 엄마 병실로 왔다.

저녁 해가 뉘엇뉘엇 질 때쯤, 병실에 엄마와 나 단 둘만 남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중 엄마가 대뜸 나에게 한마디 던지셨다.

"참... 앞만 보고 살았다. 지금 이렇게 병실에 누워 있으니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래, 아빠 아프시고 엄마 우리 5남매 키우느라 정말 고생 많았지... 우리가 엄마 고생한 거 다 알지."

"그래, 알아야지. 부모 고생한 거 알고 정직하게 부모 욕 안 먹게 살아야지."
"그래서 우리 자식 중에 사고 한번 친 자식이 없지. 다들 사춘기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자  랐지... 엄마 아빠 고생하는 거 아니까. 엄마 애들은 왜 이렇게 많이 낳았어?"

"그러게 말이다. 나는 둘만 낳을려고 했는데 니네 아빠가 혼자 부모 없이 커서 자식들 많아야 한다고 엄마를 귀찮게 하더니 다섯이나 낳았다. 그래사 니들 키우느라 엄마 인생 다 바쳤다."
"다섯 명이 많기는 많은 데도 다들 크니까 그런 것 같지도 않아. 어렸을 때 맨날 언니, 오빠, 동생한테 치여서 샌드위치 생활해서 싫었는데 지금은 형제 많으니까 좋더라. 엄마 예전에 TV 드라마 <육남매> 있었지? 엄마도 한 명 더 낳아서 6남매로 만들지 그랬어.(웃음)"

첫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간직한 우리 엄마

한동안 엄마는 말씀이 없으셨다.

"너 그거 아냐? 그때 6남매 될 뻔 했었지."
"어? 무슨 말야?"

그때 34년만에 처음으로 엄마의 눈물을 보았다. 강하고 강하신 엄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엄마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가 니 아빠랑 19살에 결혼했는데 결혼한 지 10개월 만에 니네 아빠가 배가 아프다고 뒹굴었지. 동네 보건소에 데리고 가서 약을 먹였는데도 낫지 않아서 대학병원까지 갔었다.
거기서 담석증이란 걸 알았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19살 아가씨였어. 나는 무서워서 덜덜 떨었어. 그때만 해도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니 아빠가 죽는 줄 알았거든. 지금에야 담석증은 레이저로 수술하면 금방 낫지만 예전에는 중한 병이었어. 병원에서 빨리 수술해야 한다기에 아빠를 수술실로 보내고 7시간쯤 지났나, 병실에 앉아 있는데 니네 아빠가 침대에 누워 병실로 들어 오더구나.

그때부터 기억이 나질 않아... 눈을 떴는데 내 팔에 링거가 꽂혀 있더구나. 간호사 말이 내가 니 아빠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기절을 했다더구나. 어렴풋이 생각이 났는데, 그때 아빠가 가슴에 피범벅이 돼서 수술실에서 나왔었어. 그때는 병실에 와서 피를 닦아줬지... 피범벅된 니 아빠를 보고 내가 잠시 기절을 했던 모양이야. 그러면서 간호사가 그러더라, 아기가 유산됐다고. 나는 그때까지고 내가 아이를 가진 줄도 몰랐어. 그렇게 첫째를 하늘로 보냈어. 임심 5개월이었다고 하더구나. 엄마는 그렇게 순진하고 무지했었다. 임신한 줄도 모를 정도로... 그때 그 아이만 살았어도 6남매가 되었겠지."

엄마는 울고 있었다. 그때 먼저 보낸 아이가 생각났나 보다. 나는 엄마가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엄마의 말에 놀랐다.

"엄마, 그런 일이 있었어? 근데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나 처음 듣는 얘기야. 아빠도 몰랐어?"
"그 누구에게도 얘기 하지 않았다. 특히 니 아빠가 알면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할까봐. 내 가슴 속에 묻고 지금껏 살았다. 내가 잠시 저승사자를 만나고 오니 그때 일이 생각나는구나. 그때 아이가 살았다면 올해 42살이 됐겠지. 언젠가는 말해줘야 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병실에 누워 있으니 문득 그날 생각이 나더구나. 평생을 그 아이에게 미안해 하며 살았다."

엄마와 나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엄마를 살포시 안았다. 그때 나에게 또 다른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누구도 몰랐던 사실... 나에게는 언니가 될수도 있고 오빠가 될 수도 있었던 그 아이가 지금 있다면 우리는 정말 육남매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 아픈 진실을 가슴에 묻고 지금껏 자식들을 위해 사셨다. 아파도 아프지 않다고 하셨고 힘들어도 힘들다고 하지 않으셨다. 눈물 흘릴 여유조차도 없을 만큼 고단했던 엄마의 삶.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엄마로서만 지난 세월 사셨던 우리 엄마. 이제부터라도 엄마의 마음의 짐을 덜어 드리고 싶다. 혼자서 삭였을 그 한을...

엄마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지난 일들은 모두 잊고 이제 아빠랑 여행도 다니시고 영화도 보시고 그렇게 남은 여생 보내세요. 엄마가 먼저 보낸 그 아이 몫까지 우리가 잘 할게요. 엄마 사랑해요... 그리고 존경합니다.

덧붙이는 글 | <가족 인터뷰> 응모글



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태그:#오마이뉴스, #가족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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