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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런 날이다. 내가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온통 타자(他者) 투성이로 여겨져 발광에 가까운 들숨으로 내장이 부풀어 오르는 날. 저체온증으로 몸은 이미 얼음기둥인데 가슴과 이마는 용암처럼 펄펄 끓는 날. 동서남북 사방을 퀭한 눈으로 이 잡듯이 훑어도 위안의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어 주저앉은 바닥이 관 속 같은 날…. 어머니를 뵙고 온 날이면 거의 열흘 이상 나는 그런 상태를 산다. 위로와 격려와 이해, 동행의 따뜻함이 절박하게 필요한 위중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십삼 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왼쪽 수족이 불편해진 어머니를 가까이서 모시다가 지인의 소개로 안동에 있는 요양원에 모신지 십일 년째, 내가 사는 서울을 두고 안동으로 모신 건 요양원에 영향력이 있는 지인의 소개라 어머니에 대한 처우가 어느 곳보다 나으리라는 믿음이 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믿음은 정확했다. 마당에 그림 같은 교회가 있고 안채를 단정한 이층 벽돌집으로 지어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는 요양원에서 어머니는 평화로워 보였다. 평생을 불교신자로 절에 다니셨지만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영접한 예수님과 생애 마지막이자 불꽃 같은 사랑에 빠졌다.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더욱이 마지막 사랑이라는 의식은 순간순간 기적을 탄생시켰다. 당연히 어머니에게는 모든 것이 다 은총이 되었다. 자신의 병도, 불편해진 수족도, 요양원이라는 어쩌면 슬픈 거처조차도….

"불편하긴 해도 내 발로 화장실을 갈 수 있고 세수와 목욕을 할 수 있으며 내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이만큼도 얼마나 은혜로운 일이니? 완전히 마비가 왔다면 평생 누워서 남의 수발을 받아야 할 텐데 그래도 이만큼이니 앉아서 성경도 읽을 수 있고, 너 오는 날이면 지팡이를 짚고라도 현관까지 걸어가 널 맞고 보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복된 일이야?

병이 안 들었으면 살기야 편했겠지만 두 팔 두 다리 성한 것의 고마움을 몰랐을 테고, 이곳으로 올 리도 없었을 테니 예수님은 당연히 모르고 죽었지 않겠니? 그런 걸 생각하면 엄마는 그때 병이 든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라. 이 넓은 세상에 형제 하나 못 만들어주고 달랑 너 혼자 떨쳐 놓아 엄만 그게 늘 한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내 딸 가정과 목숨보다 귀한 내 손자 기도 언제든지 들어주고 반드시 보살펴줄 예수님이 계시니까 안심돼.

그러니 엄마 걱정은 하지 마. 엄마는 여기가 천국이야. 물론 죽으면 갈 테지만 이미 벌써 천국에 살고 있어. 선량한 목사님 내외분과 여기 처지가 비슷한 동료들, 너 결혼하고 대구에 혼자 살 때 사실 그때는 외롭기도 했지만 아플 땐 겁났었어. 지금은 아파도 전혀 겁나지 않아. 혼자 있는 게 아니니까. 사람들 틈에 있으니까 외롭지도 않고.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딸인 너 고생시키는 거는 정말 마음 아프고 미안하지만 딸한테 십 년도 훌쩍 넘는 긴 세월 이렇게 한결같은 효도도 받지. 병들지 않았을 땐 서울과 대구에 떨어져 사느라 우리 모녀 일 년에 많이 보면 두어 번이었는데, 아픈 후엔 적게 잡아도 그때 세 배 네 배는 널 볼 수 있으니, 이만하면 엄마는 넘치도록 복되고 꽉 찬 인생을 살다 가는 거야. 여기서 보니 자식이 여럿 있는 사람들도 너처럼 초지일관되게 부모한테 하는 자식은 하나도 없더라. 모두 엄마를 얼마나 부러워하고 너 칭찬하는데….

엄마가 한 이 말 꼭 기억해. 알았지? 내 딸, 정말 고맙다. 그리고 많이 사랑해."

이번에도 어머니는 한 달 전에 만났을 때와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가 쓰러진 후, 형제 하나 없는 무남독녀인 내겐 일 초 일 초가 외로움의 극한이었다. 어머니를 같이 걱정할 사람도 의논할 사람도 나눌 사람도 없이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건 등불 하나 없는 밤길을 홀로 가는 것과 같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발악하듯 미친 몸짓으로 구석으로 구석으로만 몸을 구겨 넣고, 어깨며 등이 벽에 닿을 때면 혹시나 벽이 뚫리고 환한 길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 길 끝에 내 손을 잡아주고 동행해줄 전생의 혈육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적을 꿈꿔왔다.

형제가 없다는 건 있는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겐 세상이라는 독방에서 무기수의 삶을 사는 것과 같았다. 어머니가 안 계신 세상이 멀지 않았을 것 같다는 이 불길함, 무섭고 또 무서워 잠시도 안정되지 못하는 심장을 끌어안고 사는 이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형제 한 사람만 있다면…. 불가능한 이 꿈을 버리지 못하는 건, 피와 살을 나눈 형제라는 건 정말 진정한 아군이자 지지자이며 버팀목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형제가 있다면 어머니에 대한 딸로서의 사무침과 거기에 비례하는 불안, 식구들 때문에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어 온몸이 울음주머니 같은 나를 보듬고 어루만져 줄 것이며, 나 또한 같은 분량의 아픔을 가진 그에게 그런 역할을 하며 서로 지탱해내는 힘을 얻지 않겠는가.

어머니가 쓰러진 후 내가 제일 부러운 건 형제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를 지지하고 나와 함께하며 나를 위로해줄 손. 턱 끝까지 붉게 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하루하루 접어지고 있는 어머니의 시간을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아파하며 지켜보아줄 단 한 사람.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라 해도 그가 내 언니고 오빠며 동생이었으면 하는, 그런 소망으로 점점 더 외로워졌던 지난 십삼 년이었다.

어머니께 같이 오갈 형제가 하나만 있다면, 불편한 몸으로 내가 탄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는 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같이 엄마를 부르며 서로의 안쓰러움을 같은 분량으로 느끼고 함께 울 형제가 정말 한 사람만 있다면, 오십을 넘고도 고아 같은 이 헐벗은 느낌은 좀 덜어지지 않을까?

이 가슴을 내보이고 같이 붙들고 울 수 있는 형제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동질의 마음으로 어머니를 바라보고 걱정하며 그러다가 서로 위로할 그런 혈육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꿈 중에서도 가장 부질없는 꿈, 현생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꿈에서 늘 나는 허덕였다. 나는 어머니의 무남독녀인데 말이다.

천 리 길을 달려 한 달에 한 번 뵙는 어머니는 흐르는 날 수만큼 자꾸 작아진다. 올해 일흔아홉이라는 연세와 뇌출혈 십삼 년 차라는 중환이 우선 원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요양원으로 모실 때 해 드린 어금니 틀니가 잇몸 살이 빠지면서 헐거워져, 아예 빼고 생활하시는 삼 년 전부터 식사량이 급격하게 준 것이 더 큰 이유인 것 같다.

당장에라도 치과에 가서 수습해드리고 싶지만 삼십오 킬로도 제대로 안 나가는 어머니의 허약한 몸과 치과 쪽으로는 지혈이 어려운 과거 경험, 고혈압이라 마취도 용이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당신이 극구 거절하시니 억지로 우길 수도 없다. 어머니를 안아볼 때마다 자꾸 품이 남아도는 내 여윈 가슴 속으로 두께를 키우는 울음이 또 한 번 숨는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내가 세상 뜰 때까지 가슴에 돌덩이로 얹힐 것이다. 오래오래 날 울게 할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곱절은 길고 멀었다. 아무 손이나 잡고 싶을 만큼 외롭고 또 외로운 시간이 캄캄한 고속도로보다도 더 아득하게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런 결핍감과 고립감, 나이가 들수록 더 사무치는 이것, 형제의 손을 잡듯 나는 내 두 손을 맞잡아 울컥이는 가슴을 오래오래 눌렀다.

"내 딸! 정말 고맙다. 그리고 엄마가 많이 사랑해."

어머니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태그:#어머니, #무남독녀, #형제, #외로움, #요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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