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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표팀 티제이 오쉬가 러시아 골키퍼를 제끼고 승부샷을 성공시키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에 3:2 승리.
 미국 대표팀 티제이 오쉬가 러시아 골키퍼를 제끼고 승부샷을 성공시키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에 3:2 승리.
ⓒ KV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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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의 판정 논란처럼 러시아 국민들도 억울해하는 경기가 있다. 바로 지난 15일 벌어졌던 미국과의 아이스하키 경기. 푸틴 러시아 대통령까지 직접 와 관람할 정도로 초미의 관심사였던 이 경기에서 미국과 러시아는 경기 중반까지 2:2로 팽팽히 맞섰다. 그러다 러시아 페도르 튜틴의 슛이 미국의 골 망을 갈랐고 승리는 러시아로 기우는 듯했다. 하지만 심판은 비디오판독을 거쳐 이를 골로 인정하지 않았다. 골대가 원위치에서 2cm 정도 벗어나 있었기 때문. 다시 치열한 접전 끝에 연장전 승부샷으로 들어간 두 나라. 경기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이 경기는 결국 미국이 러시아를 3:2로 이기며 끝이 났다.

경기 후, 400여명의 러시아 팬들은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미 대사관 앞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심판 2명 중 한 명이 미국인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럴 줄 알았다'는 심증까지 보태져 러시아인들은 더욱 분노했다. 설상가상으로 심기가 불편했을 푸틴의 한마디도 기름을 부었다.

"심판도 실수할 때가 있다, 스포츠 승패는 심리나 행운 같은 요소도 작용한다..."

작고 추운 시골 마을, 와로드의 기적

러시아인들이 억울해하는 것만큼이나 미국인들에게 이 하키 경기는 소치 최고의 드라마라 부를 정도로 큰 화제였다. 특히 동계 올림픽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아이스하키라 믿고 있는 다수의 미국인들에게 이 경기에서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켜 승리의 견인차가 된 티 제이 오쉬(T. J. Oshie)는 올림픽 최고의 스타로 불렸다.

"축하해 티제이 오쉬 그리고 큰 승리를 거둔 미국 남자 하키팀! 기적에 대한 믿음을 멈추지 맙시다." 백악관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오바마 대통령(bo)이 축하 메시지를 남겼다.
 "축하해 티제이 오쉬 그리고 큰 승리를 거둔 미국 남자 하키팀! 기적에 대한 믿음을 멈추지 맙시다." 백악관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오바마 대통령(bo)이 축하 메시지를 남겼다.
ⓒ 백악관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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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다음 날, <유에스에이투데이>(USA Today) 신문은 '(미국인) 누구나 좋아하게 된 하키 신예 오쉬'를 소개하면서 그를 치푸와(Chippewa)라 불렀다. 치푸와는 미 북부 수페리어 호수 부근에 사는 북미 최대의 원주민 부족으로, 백인인 오쉬가 자란 고향과 학교가 모두 이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오쉬의 인기는 미 북부의 한 작은 마을을 덩달아 유명하게 했다. 미네소타주(Minnesota) 북쪽에 위치한 와로드(Warroad)가 그 곳. 와로드는 티제이 오쉬가 자란 곳으로 어린 그에게 아이스하키 선수의 꿈을 심어준 곳이다.

와로드는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위치한 인구 1781명의 아주 작은 도시다. 겨울철 평균기온이 -30도를 넘나들어 눈과 얼음은 흔해 빠진 곳이다. 그것만큼 흔해 빠진 것은 국가대표 선수들. 지금까지 와로드 출신의 국가대표만 총 9명이나 된다.

러시아와의 힘든 경기를 마친 티제이는 NBC와 한 인터뷰에서 '어떻게 그렇게 작은 도시에서 많은 국가대표가 배출될 수 있냐'는 질문에 특유의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온통 얼음뿐인 동네니까요."

와로드 출신 소치 올림픽 하키 선수 오쉬와 마빈을 응원하는 와로드 시내 상점.
 와로드 출신 소치 올림픽 하키 선수 오쉬와 마빈을 응원하는 와로드 시내 상점.
ⓒ warroad.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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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처럼 이번 소치 올림픽 여자 하키 결승전에서 은메달을 딴 미국 올림픽 국가대표 지지 마빈(Gigi Marvin)도 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와로드 출신이다. 그녀는 티제이와 같은 와로드 고등학교를 나왔고 2005년엔 와로드 서리 축제(Warroad's Frosty Festival in 2005)의 킹과 퀸으로 나란히 뽑히기도 했다. 얼음이 일상인지라 한 해의 마지막 날도 친구들과 스케이트를 타며 새해를 맞곤 했다는 지지는 연습장 밖에선 새해맞이 불꽃놀이가 요란했다고 했다. 그녀는 4년 전 밴쿠버 올림픽 때도 은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왔다.

그래서 미국에선 와로드 출신 선수 없이 메달 없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와로드가 미국 국가대표 하키 선수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부터. 그 선수 중 4명의 성이 크리스티안(Christian)이다. 이 가족은 선수뿐만 아니라 스스로 <크리스티안 형제 하키 스틱회사(The Christian Brothers hockey stick company)>를 운영하며 미국 하키팀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특히 우리에겐 <은반위의기적 (Miracle On Ice, 1981)>이란 영화로 알려진 1980년 동계올림픽에서 오합지졸 미국팀을 후원해 승리로 이끌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하다.

'아무 때나 와서 스케이트를 타거라'

크리스티안 형제 하키 스틱 공장 앞에 선 크리스티안 형제들.
 크리스티안 형제 하키 스틱 공장 앞에 선 크리스티안 형제들.
ⓒ lakesnwoo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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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로드 박물관에 가면, 올해 마을에 두 번째 은메달을 선물할 지지 마빈의 증조부가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얘기가 남아있다. 1904년, 캐나다 매니토바(Manitoba)에서 통나무와 석탄을 싣고 이 작고 낯선 도시에 들어온 건장한 남자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하키를 할 줄 아세요?" 다행히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하키 경기가 실린 지역신문을 보여주며 대답했다고. "물론이죠."

조상대대로 하키광이었던 가문답게, 지지는 러시아 소치로 출국하기 전에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편지를 사람들에게 남겼다.

지지의 특별한 메시지, 2014년 2월 1일.
내 할아버지는 경기장 문은 항상 열어놓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아무나 일찍 와도 또는 늦게까지 있어도 불편 없이 매일매일 스케이트를 탈 수 있게 말이죠. "빙판은 공짜고 문은 항상 열려 있어 그러니 얼른 와서 놀아라 애들아"라며 말이죠.

할아버진 당신 집 문도 항상 열어 놓으셨어요. "우리 마을에 누가 새로 왔니?" 하면서 낯선 아이들을 우리 할머니가 차린 저녁상으로 불러서 먹이곤 하셨죠. "이리 온, 우리 집은 아무나 들어 와도 돼. 여기 네 접시도 있단다" 하시면서요.

난 우리 마을에서 할아버지 같은 열린 마음과 희망들을 봅니다. 그런 응원들이 나에게 힘을 주고 이끌고 있는 거고요. 그래서일까요, 내 마음은 나를 위해 뭘 할 수 있냐고 묻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자꾸 묻게 하지요.

가족, 친구, 이웃, 선생님, 코치 그리고 동료들, 모두들 소치로 가는 내 여정에 동참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 Gigi

그녀가 와로드 어린이 하키 사이트에 남긴 편지 속엔 왜 이 작고 추운 동네가 미국 하키의 고향이 됐는지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다. 누구나, 아무 때나, 내 가족처럼 마음 편히 얼음을 지칠 수 있고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와로드 사람들의 따뜻하고 열린 마음이 그 비밀이었던 것이다.

미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 선수 지지 마빈과 그녀의 할아버지.
 미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 선수 지지 마빈과 그녀의 할아버지.
ⓒ warroad youth hoc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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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까진 따지 못했지만, 미국인들에게 감동과 환희를 줬던 티제이 오쉬도 어린 시절, 이혼한 아버지를 따라 와로드에 들어온 이방인이었다. 이 작은 마을은 이 어린 이방인을 관심과 사랑으로 돌봐 오늘 미국 최고의 하키 선수로 키워냈다. 러시아와 경기 직후, 기자가 그에게 고향에서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한마디를 부탁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힘차게 말했다.

"미국의 하키타운, 와로드. 그 밖에 또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올림픽은 끝났지만, 와로드 아이들은 10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다. 푸틴의 말대로 이들의 승리가 과연 심리나 행운 때문만이었을까?


태그:#하키, #올림픽, #국가대표, #와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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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뉴욕 거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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