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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당의 원로 하원의원이었던 토니 벤과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은 둘 다 1925년생이다. 토니 벤 전 의원은 지난 3월 세상을 떠났고 대처 전 수상은 지난해 4월 세상을 떠났으니 문자 그대로 둘은 동시대를 살다간 인물들이다.

토니 벤 전 영국 노동당 의원
 토니 벤 전 영국 노동당 의원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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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벤(1925~2014)은 1950년 25세 나이에 부유한 귀족이었던 부친의 상원의원 세습 작위를 버리고 선거로 하원에 진출하여 노동당 의원에 당선된다. 그 후 1950년부터 2001년, 정계에서 은퇴하기까지 무려 47년간 노동당 의원을 지냈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그는 노동당정부에서 체신부장관과 과학기술부장관을 지냈고 1974년부터 1979년까지는 산업부장관과 에너지부 장관을 맡았다. 

마가렛 대처(1925~2013)는 부유한 토니 벤 가문과는 다르게 소박한 구멍가게 주인집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토니 벤이 노동당 하원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 같은 해인 1950년 보수당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한다. 낙심한 그녀는 그 이듬해인 1951년 10세 연상 사업가 데니스 대처와 결혼하면서 법률공부를 시작하고 3년 만인 195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정치에 재도전 한 대처는 토니 벤보다 9년 늦은 1959년, 마침내 보수당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1970년 선거에 노동당이 패하고 보수당이 정권을 잡자 대처는 교육과학부 장관직을 맡는다. 이때 대처는 교육부장관으로서 학교 우유 무상급식폐지를 결정하면서 여론에서 "마가렛 대처, 우유 강탈자"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을 얻는다. 하지만 그는 그런 반대 여론에 개의치 않고 학교의 우유 무상급식을 철폐시킨다. 아마 이때부터 '철의 여인' 대처리즘의 싹이 보였다고 할까.

한편 토니 벤은 1966년 체신부장관 시절 엘리자베스여왕의 초상을 우표에서 폐지하겠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벤의 그런 결정은 여왕을 지지하는 강력한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고 결국 그 계획을 곧 철회한다. 대처와는 달리 벤은 여론에 귀를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1974년 선거에 노동당이 승리하자 벤은 다시 내각으로 돌아와 산업부장관을 맡는다. 당시 노동당 정부는 대불황에 직면하며 우리나라가 지난 1997년 재정위기를 맞았을 때처럼, IMF의 요구를 수용하여 정리해고에 들어가고 사회복지를 줄이는 긴축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때 산업부장관이었던 토니 벤은 자기가 속한 노동당정부에 항의하고 수상과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그 논쟁 덕에 산업부장관에서 에너지부장관으로 좌천된다.

대처리즘, 기업들은 좋아졌지만 실업자는 더욱 증가

한편 1979년, 보수당이 집권하고 1974년부터 5년째 당대표를 한 마가렛 대처가 수상으로 취임한다. 이때부터 대처는 그동안 노동당정부가 고수해 왔던 국유화를 민영화(사유화)로 바꾸고 복지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대처리즘'을 도입한다. 대처리즘의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 복지삭감과 세금인하 ▲ 국영기업 민영화 ▲ 노동조합 활동규제 ▲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보장 ▲ 정부가 기업에 최소한만 간섭하는 '작은 정부'

이런 대처리즘 때문에 기업들의 경제활동은 좋아졌지만 실업자는 더욱 증가했다. 그러자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대처리즘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

대처리즘이 횡행하던 시절 토니 벤은 '사회민주주의'를 더욱 추진하면서 대처리즘에 맞섰다. '벤 좌파'라고 불린 노동당 급진좌파가 형성되면서 벤은 그 구심점에 있었다. 벤은 1982년 대처 수상이 포클랜드전쟁을 일으키자 반전운동을 주도하면서 영국제국주의 전쟁의 반대자로 두각을 나타낸다.

1984~1985년 광부들이 대처리즘에 대항해 대파업을 일으키는데 이때 벤은 앞장서서 광부들의 파업을 지원한다. 그러나 광부들의 파업이 강력한 공권력을 앞세운 대처 정권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자 노동당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그러나 벤은 소속당의 우회전에 동참하지 않고 파업에 관여한 모든 광부들을 사면해주자는 '광부사면법'을 하원에 발의한다.

1987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보수당에 패배하고 그 다음해인 1988년 벤은 노동당 당수에 도전하지만 실패한다. 그 후 벤은 1990년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1999년에는 코소보 전쟁에 반대한 극소수 하원의원 가운데 한 명이 됐다.

1991년 노동당이 야당으로 있을 때, 벤은 영국의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가자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지만 부결된다. 1993년 11월 29일자 일기에서 벤은 "노동당은 죽었다, 노동당은 그저 보수당을 비판할 뿐 정책이 없다"라며 "노동당 정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 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제도권 정치에 환멸과 한계를 절감한 벤은 2001년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정치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자 의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2003년 그는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반전운동의 선두에 선다. 그는 정치가 국민의 삶을 바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는 신념을 평생 확신했고, 누구든 어떤 환경의 사람이건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원칙을 실천했다.

보수당 반발에 쫓겨난 독선적인 대처 수상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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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90년 들어서 대처 수상의 독선적인 리더십에 노동당은 물론 보수당의원들까지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90년 9월 여론조사에서 야당인 노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보수당에 비하 14%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대처의 전투적인 성격과 당원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독선적인 모습은 보수당 내에서도 점점 지지를 잃어갔다.

1990년 11월 1일, 대처의 오랜 동지인 제프리 후가 대처의 리더십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제기하고 부수상직에서 사임한다. 오랜 동료인 부수상 휴의 사임은 대처에게 결정타가 되었다.

그 다음날인 1990년 11월 2일, 보수당의 원로의원 마이클 헤즐타인은 대처의 보수당 대표(수상직) 경선에 도전할 것임을 공개 선언한다. 헤즐타인과의 1차 경선에서 대처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지만 과반수에서 4표가 부족했다. 그러자 대처는 "과반수를 차지해서 승리할 때까지 싸우겠다"며 2차 경선을 주장한다. 하지만 보수당의 분열을 염려한 내각에서 대처에게 수상직에서 사임할 것을 권고한다. 결국 대처는 1990년 11월 22일 눈물을 쏟으며 마지못해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대처 집권기, 산업생산력 감소, 실업자-빈곤아동 증가

대처 정권 하에서 영국의 산업생산력은 급속히 떨어졌고 실업자 숫자는 가파르게 증가했다. 1979년 대처가 수상으로 집권하기 전에 영국의 실업자는 150만명이었다. 하지만 대처리즘의 전성기인 1984년에 이르러 실업자 숫자는 무려 330만 명으로 두 배가 넘게 증가하면서 영국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1990년 대처가 물러가기 직전 영국의 아동 빈곤율은 28%로 치솟았고 보수당 정권의 말기인 1997년에 이르러서는 30%가 넘는, 무려 340만명의 아동이 빈곤아동으로 전락했다. 이 수치는 1979년 대처가 집권하기 전과 비교해 두 배나 증가한 것으로, 영국은 유럽 최고수준의 빈곤아동율을 기록하게 됐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11년 동안의 대처 집권기에 사회불안, 파업, 높은 실업률이 영국사회를 휩쓸었다. 대처리즘의 광풍은 영국사회에 분열과 불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증폭된 문화를 남겼다. 지난해 4월 대처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한편에는 망자인 대처의 사진을 짓밟고 불에 태우면서 "마녀가 죽었다!"라고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파티와 축제를 여는 영국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대처는 영국사회에 극한 대립과 분열, 비인간화를 불러왔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권과 그 추종자들은 여전히 우리나라에 대처리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처가 정권을 잡은 1979년, 영국의 전체 정부 예산 중 복지예산은 절반에 가까운 45.7%를 차지했다. 당시 영국의 의료비와 교육비(대학원까지)는 100% 무료였다. 부모가 가난한 대학생들과 대학원생들은 정부에서 생활비까지 전액 지원해 주었다. 돈이 없어서 병원이나 대학을 못가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고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실업자들은 실업수당만으로 한 달간 프랑스 해변으로 일광욕 휴가를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정부에서 세금으로 주택자금을 지원해 주어서 서민들은 어렵지 않게 집을 구입 할 수 있었다. 이것도 역시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지난 2013년 전체 정부예산에서 복지예산은 불과 28.3%였다. 이것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부모가 가난한 대학생들은 공부는커녕 최저임금도 못 받는 알바를 하면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한다. 병원치료비가 없는 환자는 치료를 못 받고 병원에서 박대당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실업수당으로는 해외 휴가는커녕 생계도 해결할 수 없는 형편이다. 서민들이 집 한 채 마련하는 일은 평생 숙원사업이 되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박근혜 정권은 대처리즘을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정말로 대처리즘을 대한민국에 도입하고 싶다면, 최소한 복지예산을 영국처럼 전체 정부예산의 45% 이상으로 올린 후 재검토 해봐야 할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노인빈곤율과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고 젊은 부부 출산율은 세계 꼴찌 수준이다. 2012년 기준 우리나라 GDP에서 복지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9.4%로 OECD 회원국 평균인 19.3%의 절반수준이며, OECD 30개 회원국 중 바닥수준인 29위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권은 복지비를 대폭 삭감하는 대처리즘이 우리나라에 절실하다며 강조하고 있다.

"교육받고 자신감 넘치는 국민은 휘어잡기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후 첫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집권 2년차 국정운영 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후 첫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집권 2년차 국정운영 구상을 발표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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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들에 따르면, 최근 방한한 기 소르망 프랑스 파리정치대학 교수는 지난 2일 "한국은 아직 복지국가 상태가 아니다, 노동시장이 너무 불평등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미래가 보장된다"라며 "그렇지 못한 계층은 기회를 얻지 못한다, 특히 부모가 교육비를 내지 못하면 가난이 대물림 된다"라고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은, 기형적으로 낙후된 우리나라의 복지수준을 지적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박근혜 정권은 우리나라에 대처리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지난 2007년 토니 벤이 <식코>라는 다큐영화에 출연하여 남긴 말을 다시 곱씹어 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며 소박한 꿈이나 꾸고 사는 것일까?

"교육받고 자신감 넘치는 국민은 휘어잡기 어렵습니다. 민주주의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혁명적인 것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이나 그 누구의 생각보다도 말입니다. 주권이 있으면, 그걸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흔히 말하는 이 선택이라는 개념은 늘 같습니다. "뭐든 하나 골라라"라는 거죠. 하지만 이 선택이란 건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고 볼 일입니다. 만약 누가 빚더미에 앉게 되면 그 사람에겐 선택의 자유가 없지요. 평범한 직장인이 빚에 몰리면 기득권자들은 이득을 봅니다. 빚을 진 사람은 희망을 잃고 절망한 사람들은 투표하지 않으니까요.

기득권자들은 늘 온 국민이 투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는 만약 영국이나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후보들에게 표를 던지면 민주투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득권자들은 그런 일이 없도록 국민들이 계속 절망하고 개탄하도록 하는 거죠. 국민을 통제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공포를 주는 것이고 둘째는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육받고 건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국민은 기득권자들이 휘어잡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득권자들이 이런 국민들을 대하는 특별한 자세가 있지요. '저 사람들은 배워도 안 되고 건강해도 안 되고 사기가 충천해도 안 된다.' 인류의 상위 1%가 세계의 80%의 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은 사람들이 그걸 참는다는 겁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혼돈스러워하고,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최선이란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며 소박한 꿈이나 꾸고 사는 것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태그:#토니 벤, #마가렛 대처, #박근혜, #대처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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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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