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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주 보는 조그마한 어선이나 낚싯배를 보통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 선박이라고 하는데 이런 어선이나 낚싯배를 만드는 공정은 매우 간단하다. 나무로 형틀을 제작해서 왁스를 바른 뒤 그 위에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바른 유리섬유를 겹겹이 붙이고 건조하여 탈형한다.

탈형된 FRP 선체에는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머금은 딱딱한 유리섬유 밖에 없다. 여기에 온갖 세간들을 집어넣고, 장비를 붙이고 엔진을 넣는다. 선박의 겉을 그라인더로 연마하여 롤러로 도장을 하고 이름을 새기면 작은 항구에서 많이 보는 흔하디 흔한 고깃배가 된다.

FRP 선박 제조 작업장은 폴리에스테르 수지 때문에 냄새가 매우 많이 난다. 필자도 FRP 선박제조회사에 가서 유리섬유에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발라 여러 겹으로 붙이는 작업을 지켜본 적이 있는데, 지독한 냄새 때문에 오래 관찰하기 힘들 정도였다.

15년간 유리섬유 재단한 아버지의 폐암 사망... 산재 가능할까?

폐암으로 사망한 노동자는 52세 때부터 약 15년간 FRP 선박 제조공장에서 유리섬유 재단만 하는 작업을 하였다.
 폐암으로 사망한 노동자는 52세 때부터 약 15년간 FRP 선박 제조공장에서 유리섬유 재단만 하는 작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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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장에서 52세 때부터 15년간 유리섬유를 재단하는 작업만 수행한 노동자가 폐암에 걸려 사망하였는데, 그 아들이 산재신청을 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그 노동자는 과거 약 18년간 4명 정도 승선하는 조그만 고깃배의 선원으로 일하다가 이후 4년간 냉동창고에서 냉동꽃게를 운반하는 작업을 한 후, 52세 때부터 약 15년간 FRP 선박 제조공장에서 유리섬유 재단만 하는 작업을 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귀가 잘 안 들려 말도 못하였기 때문에 기술이 필요한 복잡한 일은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보니 월급도 매우 적었고, 심지어 임금체불도 있어 소송 중이라고 했다.

"저희 아버지가 일했던 공장은 냄새가 아주 많이 나고 각종 유해물질이 많습니다. 담배도 피우지 않은 아버지가 폐암에 걸리신 건 이런 공장에서 유리섬유 재단을 하면서 (유리섬유) 먼지를 많이 마셨기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FRP 선박회사에서 15년간 유리섬유를 재단하는 작업만 수행한 노동자의 폐암이라 산재가 안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유리섬유나 지독한 냄새의 원인인 폴리에스테르 수지, 그리고 형틀에 바르는 왁스가 아직은 폐암과 관련이 낮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도장작업에 대해서도 물어봤으나 도장작업은 하지 않았고, 바닷가에 있는 야외 공장의 도장작업장은 유리재단 작업장과는 반대쪽 끝에 있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고 판단되었다. 아들에게는 이러한 이유로 현재로서는 산재 승인 가능성이 낮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산재 불승인 처분 노동자가 생기는 현실, 의사는 불편하다

아, 괴롭다. 해마다 많은 노동자가 산재를 신청하고 불승인 처분을 받아야 하는 이 현실 자체가 직업환경의학 의사로서는 매우 불편하다. 노동자가 아프면 그것이 직업적 원인이든 비직업적 원인이든지 간에 우선 치료해주면 안 되나?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는 기간만큼 보상(상병보상) 해주면 안 되는가?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산재보험이든 건강보험이든 상병보상을 하는 것은 산재신청 자체가 직업병을 예방할 수 있는(산재신청을 하면 근로복지공단에서 사업장 재해조사를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업장은 해당 질병을 예방하려고 노력하게 되리라 판단한다, 만약 산재 승인이 되면 당연히 사업장은 해당 질병에 대해 예방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현실에서 바로 적용하기 힘든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산재 불승인 노동자를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야 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솔깃한 방법이기도 하다. 과연 산재도 예방할 수 있으면서 이 괴로운 상황에서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지 모든 사람이 같이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 이 내용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일터>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직업환경의학의, #한노보연, #노동자 건강권, #산업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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