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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나는 불고기를 좋아했다. 불고기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비우는 것도 순식간이다. 늘어나는 뱃살에 식사량을 줄이겠다던 각오도 불고기를 앞에 두고는 잠시 잊는다. 흰 쌀밥 한 공기를 더 추가해서 그릇의 바닥을 싹싹 긁고서야 숟가락질을 멈춘다. 그래도 아쉽다는 듯이 몇 번을 멈칫하다가...

젖을 떼고 밥을 먹기 시작한 이후의 내 기억에는 늘 밥상 한가운데에 불고기가 올라가 있었다. 아마도 내가 불고기를 매우 좋아해서 엄마가 자주 차려줬기 때문일 게다. 물론 내 기억이 과장된 편집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막내아들이 눈이 휘둥그레 커질 정도로 반해버린 음식이니, 어느 집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끼니 때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았던 '어머니표 불고기'

나는 자다가도 불고기라면 벌떡 일어나는 아이였다
 나는 자다가도 불고기라면 벌떡 일어나는 아이였다
ⓒ commons.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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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아버지를 닮아 뭔가에 쉽게 질리지 않는 성격이지만,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은 특히 더 그랬다. 워낙 손이 큰 어머니는 음식을 한번 하면 몇 끼는 먹을 만큼 많은 양을 만들어서 가족들의 원성을 듣곤 했는데, 항상 나만 예외였다. 소풍 전날이면 갖가지 김밥 수십 줄이 쏟아지고, 한 솥 가득 카레를 만들어서 사흘 내내 먹어야 바닥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도 식구들이 "도대체 이 많은 걸 누구 먹으라고 만든 거냐"고 장난 섞인 푸념을 할 때, 나는 늘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루 세 끼를 똑같은 반찬으로 먹어도, 어머니가 해준 반찬이라면 최고로 맛있는 걸 어쩌겠는가.

불고기는 더 그랬다. 어머니가 불고기를 한 날에는, 아침에 그걸 먹고도 저녁에 또 먹으려고 일부러 일찍 집에 가기도 했다. 어린 꼬마 시절에는 "불고기!"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장난 삼아 그렇게 나를 깨우기도 했다. 실제로 불고기 반찬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환호가 절로 나왔고, 만약 아니었으면 다음 날 요리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다시 잠들었다.

일곱 살 땐 밥상 위에 올라온 불고기를 보고 너무 좋아서 제대로 씹지도 않고 급하게 삼킨 나머지, 소화가 안 돼서 밥상에 그대로 토해버린 적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때는 불고기를 접시에 덜어놓지 않았고 프라이팬째 올려놓고 먹던 터라, 저녁식사의 메인반찬이 고스란히 주방 싱크대로 퇴장해야만 했다. 이 사건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식구들한테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날이 기운 집안 형편... 점점 사라진 어머니 자리

나쁘지 않았던 집안 형편은 내가 커 갈수록 나날이 기울어갔다. 결국 어머니도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왔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때쯤 빚을 내서 작은 식당을 차리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가게를 열고 저녁 늦게까지 일했다. 당시 가게와 집은 거리가 상당히 멀었고, 어머니가 일을 마치는 시각은 버스와 지하철이 끊긴 뒤였다. 택시를 타고 오기엔 교통비가 감당이 안 돼, 결국 어머니는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아끼자는 생각에 식당에 딸린 방 한편에서 잠을 잤다.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점점, 가족의 풍경에서 어머니의 자리가 사라져갔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실 빈자리가 컸음에도 다들 각자의 일상에 바빠서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할 틈조차 없었다고 해야겠다. 그러다가 한 달에 두어 번, 미리 전화를 하고서 주말 낮에 잠시 집에 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직접 요리한 반찬을 가득 들고 와서, 사이가 소원해진 아버지와 어색한 대화를 짧게 나누고, 내게 용돈을 쥐여주고 떠나는 일이 반복됐다. 그때 가족 사이에 생긴, 보이지 않는 균열이 점점 벌어지는 것을 느낀 사람은 아마 어머니뿐이었을 것이다. 그 외로움을 견디고자 2주에 한 번이라도 굳이 나를 보러온 것인지도 모른다.

2003년이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집 안은 늘 텅 비어 있는 날이 많았다. 나는 매일 아침 7시까지 등교하고 밤 10시에 하교했다. 아버지도 일을 마치고서 잠만 자러 들어올 때 겨우 얼굴을 보곤 했다. 평생 해오신 안경가게가 나날이 더 힘들어지는 것을 아버지의 굳은 표정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아, 왜 이래요... 돈 주고 가면 나중에 사먹을게요"

6월의 첫째 주 일요일 아침,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평소와 다르게 미리 연락을 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집에는 나 혼자였다. 평일에는 학교에 매여 사느라 나도 좀 피곤했다.

"잠깐 나갈래? 너, 회 좋아하잖아. 근처에 횟집 생겼던데 먹으러 가자."
"아, 갑자기 와서 왜 이래요. 모처럼 잠 좀 푹 자려는데…. 돈 주고 가면 내가 나중에 사먹을게요."

한 주에 한 번뿐인 일요일 아침의 늦잠을 방해받은 나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덜컥 짜증부터 내고 말았다. 고3이라는 신분이 그래도 된다는 면죄부를 준 것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외식을 권하는 어머니를 끝내 차갑게 뿌리쳤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간절했다는 것을 그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회 안 먹고 싶어? 그러면 나가서 치킨 사올까?"
"아으, 정말…. 됐다니까요."

계속 짜증만 내는 나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결국 한숨으로 끝이 났다. 어머니는 못내 아쉬운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돈 몇 만 원인가를 내 책상에 올려두고, 느린 발걸음으로 가방을 메고 다시 집을 나섰다. "다음번에 올 때는 반찬 뭐 해줄까" 하고 묻는 질문에도 나는 퉁명스럽게 "불고기" 하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대문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라도 어머니를 붙잡고 미안하다고, 나가서 무엇이든 좋으니까 같이 사먹고 들어오자고 말했어야 했다. 물론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이 순간을 후회할 날이 올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는데도 말이다.

그날 본 어머니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날은 현충일. 어머니는 휴일에도 식당에서 일을 했다.
 그날은 현충일. 어머니는 휴일에도 식당에서 일을 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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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로 돌아가 고3인 '김준수'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는 상상을 했다. 그래. 그때 나는 고작 열아홉이었고, 그 짧은 한마디를 할 용기를 내기에도 너무 어렸다. 한껏 짜증을 낸 직후에 먼저 사과하는 일이 어디 그리 쉽던가. 그렇게 쥐어짜내듯 변명을 생각해내고 나서야, 그런 상상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날 본 어머니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6월 6일 아침에 대구의 어느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어머니가 끝내 숨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현충일이라 휴일이었지만 그날도 어머니는 쉬지 않고 식당 문을 열었고, 평소 앓던 심장질환에 과로가 겹쳐 쓰러진 것이었다.

의사는 어머니가 병원으로 옮겨지기 전에 구급차에서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평생 눈물을 보이질 않던 아버지도,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잠든 새벽이 되어서야 "끄윽, 끅" 하고 삼켰던 울음을 토해내듯 흐느꼈다. 나는 잠에서 깨지 않은 척 누워서 눈물을 뺨으로 흘렸다.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장례식이 끝나는 순간까지 울지 않았다. 적어도 '누가 보는 앞에서는' 그랬다. 참고 참다가 결국 눈물이 터져나올 때는, 화장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죽여 혼자 울었다. 차마 어머니의 마지막 방문을, 그때 나누었던 대화를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나조차도 내가 미워질 정도였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말하고 감히 용서를 구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1년쯤 지난 스무 살의 여름 어느 날, 꿈에서 어머니를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지 못할 것 같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니 끝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래, 네 마음 다 알고 있단다' 하는 표정으로 나를 안아주었는데, 나는 그 품 안에 안겨서 와르르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고 펑펑 울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베개가 온통 축축하게 눈물로 젖어 있을 정도로.

어머니표 불고기, 다시 만나는 날 꼭 해주세요

나는 불고기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어릴 적 어머니가 해준 불고기와 같은 맛을 결코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어느 맛집에 가도 기분이 가라앉는다. 11년의 시간이 흘러서 이제는 다 괜찮다고,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내자고 스스로에게 말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지나도 그럴 거 같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내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몫이다.

어머니에게 마음속으로 편지를 쓴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에 약속한 그 불고기 요리를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에 꼭 해달라고 전하고 싶다. 어머니가 살았던 시간만큼의 시간이 더 지나고, 그녀가 혼자서 감당했을 외로움과 삶의 무게가 내 어깨에도 내려앉은 뒤에는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머니도, 밥상에 따스하게 올려진 어머니가 요리한 불고기도.


태그:#어머니, #불고기,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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