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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사로 가는 길의 동해바다
 보경사로 가는 길의 동해바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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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만든 국시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해마다 밀을 수확한 여름이면 거의 매일 한 끼는 국시를 했다. 할머니는 그해 추수한 밀을 빻아 넣어둔 길죽한 항아리에서 밀가루를 반 바가지 정도 들어낸 뒤 날콩가루 단지에서 두어 줌 꺼내 밀가루 7, 콩가루 3의 비율로 섞은 뒤 반죽하여 둥글게 만들었다. 그런 뒤 돗자리를 펴고 넓고 긴 홍두께 판 위에 반죽한 걸 올려놓고 밀가루를 뿌려가며 홍두께로 말아 밀었다.

그렇게 계속 홍두께로 밀면 밀수록 둥근 국시 판은 커갔다. 할머니는 너덧 차례 국수판을 홍두께로 민 뒤 마지막으로 밀가루를 뿌리고 그 판을 접었다. 그런 다음 부엌칼로 국시를 썰었다. 첫 부분은 자른 다음 나에게 줬다. 그런 뒤 일정 간격으로 촘촘히 썰었다. 썬 국시는 삼베보자기를 깐 밥상 위에 펼쳤다. 마지막 부분도 나에게 줬다.

그게 국시 꼬랑댕이(꼬리)였다. 나는 그걸 가지고 아궁이로 가져가 보리 짚 땐 불 위에 올려놓으면 노릿하게 구워졌다. 그게 그 시절 시골 어린이들에게는 주전부리 간식으로 그 맛은 구수했다.

할머니는 국시를 썰고 난 뒤 무쇠 솥에다가 두어 바가지 물을 붓고 불을 때 물이 펄펄 끓으면 삼베보자기의 국시를 손으로 흩어 넣은 뒤 촘촘히 잘게 쓴 애호박을 넣었다. 그런 다음 다시 아궁이에 불을 땠다. 무쇠 솥에서 한바탕 김을 뿜으며 국시물이 솥뚜껑 틈으로 쏟아져 나오면 국시가 다 익었다. 그러면 아궁이 불을 끄고 사발에다가 국수를 담아냈다. 나는 그 국시를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먹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거의 날마다 하루 한 끼씩 먹어도 물리지 않은 국시였다.

동해안 바위
 동해안 바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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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양푼의 국시를 먹다

대학교 3학년 때 육군 00 예비사단에서 4주간 학훈단 병영훈련을 마치고 고향에 가자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국시를 만들었다. 그 국시를 양푼에 담아 상 위에 올렸는데 나는 그걸 다 먹었다.

내 고향 아래구미 상모동에 사셨던 박정희 대통령도 어린시절 여름이면 그 국시를 날마다 먹었다고 한다. 대구사범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이 찾아와도 가난한 집의 그 어머니는 달리 대접할 게 없어 그 국시를 내놓았다고 그 시절 친구들은 회고했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것은 식성도 그런 모양이다. 1970년대 어느 날 할머니를 따라 효창동에 사시는 신문사네(셋째 형수 박상희 씨 부인 조귀분 여사)에 갔더니 홍두께로 국시를 밀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시를 좋아하기에 청와대로 보내고자 당신이 만든다고 했다. 청와대 요리사도 경상도 식 국시를 제대로 만들지 못해 그런다는 말을 했다. 아마도 가난했던 시절에 먹던 국시를 대통령이 된 시절에도 이따금 즐겨 드신 듯했다.

그런데 그 국시를 이즈음에는 맛보기가 매우 힘들다. 고향에 가도 이제는 그 국시를 옛날처럼 해먹는 집이 거의 없었다. 오래 전 항일유적답사 길에 안동 임청각에 가서 이항증 선생에게 그 국시를 말했다. 그러자 안동에도 그런 국시를 하는 집은 손꼽을 정도라고 하면서, 한 국시집을 안내하여 오랜만에 맛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들린 안동 하화마을에 한 집에서 홍두께로 직접 국시를 만들며 팔고 있어 다행히 맛을 본 적이 있었다. 다행히 서울 광화문우체국 옆 보험공사 지하 식당가에 안동 국시집은 내 고향 국시의 원형은 아니지만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이즈음도 서울에 가면 이따금 들린다.

내연산 보경사 일주문
 내연산 보경사 일주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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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

한 번은 국시를 찾아 일부러 열차를 타고 영주로 내려가 시내를 헤매다 겨우 국시집을 찾았지만 옛 맛은 아니었다. 주인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보경사 앞 밥집의 국시. 빛깔과 맛이 예전과 달랐다.
 보경사 앞 밥집의 국시. 빛깔과 맛이 예전과 달랐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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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요즘 옛 국시를 만들면 손님이 없어요. 우리 집 국시도 찾는 이가 드물어 할 수 없이 현대화시켰고, 하는 수 없이 메뉴도 다양화시켰어요."

얼마 전 나는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탈고하자 어디 가서 며칠 쉬고 싶었다. 그때 문득 포항 부근 보경사가 생각났다.

30여 년 전, 동료와 같이 그곳에 가자 보경사 들머리 좌우 가게에서 아주머니들이 홍두께로 국시를 밀고 있었다. 그때 그 국시를 사먹자 옛날 먹었던 그 맛이었다.

지난 일요일 목적지를 보경사로 정한 뒤 원주 역에서 강릉행 열차를 탔다. 동해 역에서 내린 다음 시외버스를 타고 강구로 갔다. 내가 탄 버스가 직행이 아닌 완행이라 근덕, 임원, 울진 등 대여섯 곳은 경유하다보니 어두운 밤에야 강구에 도착했다. 거기 한 민박집에서 묵은 뒤 이튿날 아침 산책 겸 보경사를 한바퀴 두른 다음 한 밥집에서 국시를 부탁했다. 그러면서 30년 전 홍두께로 국시 밀던 얘기를 했다.

"요샌 주말이나 그래 밀지요."

그러면서 당신네 가게는 아흔이 넘는 토박이 할머니가 만든 국시를 받아다가 끓여 준다고 했다. 곧 국시가 나왔는데 빛깔도 다르고, 입에 넣자 옛 맛이 아니었다. 그 까닭을 묻자 요즘은 건강에 좋으라고 검은 콩과 흰 콩을 섞어 빻는데 콩가루를 이전보다 훨씬 적게 넣는다고 했다.

나는 그 국시 집을 떠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태그:#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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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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