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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은 누구일까? 홍익인간의 웅녀? 동명성왕을 알로 낳은 유화부인? 박혁거세와 더불어 '두 성인(二聖, 삼국사기의 표현)'으로 추앙받은 알영? 백제의 실제 건국주였다는 설이 회자되는 소서노? 시대를 초월하여 뭇 남성들의 구애를 받는 황진이? 5만 원권 지폐에 얼굴이 실린 신사임당? 아니면 '유관순 누나'?

물론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가장 뛰어난 여성'은 각각 다를 것이다. 필자는 선덕여왕을 답으로 떠올린다. 그녀는 세계적 명물 첨성대와 현존 최고의 석탑 분황사 탑을 지었고, 여근곡 등의 신비로운 전설들을 창조했다. 게다가 '왕'이었다. 심지어 비담의 반란 와중에 궁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더이상 비교 불가한 '신비의 여인'이었다는 말이다. 어떤가, 이만 하면?

선덕여왕을 모델로 한 작품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는 남산의 감실석불
 선덕여왕을 모델로 한 작품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는 남산의 감실석불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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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만이 아니라 선덕여왕은 신라 당대에도 무수한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지귀 설화는 그 사실을 말해주는 상징이다. 지귀는 선덕여왕에게 혼이 빠져 세상을 떠돌던 중 우연히 그녀가 준 금팔찌에 감동, 온몸이 불덩이로 변해 산화한다. 그랬던 지귀처럼, 아마 당대에도 "선덕여왕"이라는 말만 들어도 짝사랑의 혼불이 가슴을 치고 일어나는 남자들은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지귀와 할매부처

또 하나의 상징이 있다.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이라는 공식 명칭을 가진 '남산 감실석불', 아니 더욱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름으로 말하면 '남산 할매부처'가 바로 그것. 이 석불은 석굴암의 원형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선덕여왕을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되는 보물 198호이다. 깊이 60cm, 높이 1.7m, 폭 1.2m 정도 되는 굴(감실)을 인공적으로 파고 그 안에 1.4m 가량 되는 부처를 모셨다.

속칭 '할매 부처'답게 그녀의 미소는 은근하다. 깊게 파진 입 주위에 잔잔한 미소가 가득하다. 게다가 아침 나절에만 얼굴을 온전히 드러낼 뿐 그 이후로는 그늘에 가려 반쯤 숨어 버린다. 두 손도 소매 안에 넣어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있고, 둥근 얼굴은 약간 숙이고 있다. 그래서 선덕여왕만큼이나 은은한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흔히 "부처골"이라 부르는 남산 서편 골짜기 깊숙한 산길 옆에 있다. 주소는 경주시 인왕동 산56번지.

밤에 본 첨성대
 밤에 본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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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을 말하면서 첨성대를 빠뜨릴 수 없다. 국보 31호인 첨성대 또한 신비로운 유적이다. 대체로 천문대로 이해하지만 아직도 그 정체성이 딱 부러지게 확실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역사적 기록도 없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는 대목뿐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선덕여왕을 연상하게 하는 분황사도 빠뜨릴 수 없다. 분(芬)은 향기롭다는 뜻이고, 황(皇)은 임금이니, '향기로운 임금'이라면 단연 선덕여왕이 아닌가! 하지만 당시의 분황사 법당은 지금 찾아볼 길이 없고, 본래 7층이거나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9.3m 모전석탑만이 고색창연한 빛깔을 간직한 채 의연히 남아 있다.

'향기로운 임금'을 위해 세워진 절, 분황사

그래도 국보 30호인 이 분황사 석탑은 신라 최고의 석탑이라는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물론 분황사 석탑은 돌을 네모나게 다듬어 쌓아 벽돌로 만든 전탑처럼 세운 모전석탑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이다.

분황사. 신라 때 건축된 탑 중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이다.
 분황사. 신라 때 건축된 탑 중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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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최고는 최고(最高)가 아니라 최고(最古)를 뜻한다. 국보 20호 다보탑, 국보 21호 석가탑, 국보 38호 고선사터 삼층석탑, 국보 112호 감은사 쌍탑 등과 겨뤄 분황사탑의 품격이 꼭 더 높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분황사탑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 석탑"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분황사 석탑을 두 번째 모전석탑인 의성 금성 탑리 오층석탑(국보 77호)과 견줘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모전석탑"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옳은 표현이다. 분황사 석탑이 634년(선덕여왕 3)에 세워진 데 비해 탑리오층석탑은 통일신라 때 건축된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백제군의 은밀한 침입을 간파한 선덕여왕

신라 때 한반도에는 모란꽃이 없었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중국에서 보내온 그림만 보고도 모란꽃에 향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맞췄다. 그림 속에 나비가 없는 것을 통해 꽃의 성질을 간파해낼 만큼 그녀는 총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은밀히 경주 인근에 잠입해온 백제군도 그녀의 손바닥 안이었다. 겨울에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우는 소리를 들은 여왕은 그것이 경주 서쪽 여근곡에 백제군이 숨어 있다는 징조로 파악했고, 알천과 필탄 등 장졸들을 보내 500 적군을 모조리 죽이고, 뒤따라 온 후속 부대 1200명도 남김없이 척살했다.

여근곡은 경주시 건천읍 신평2리의 뒷산인 부산(富山)에 있다. 약 730m 정도에 지나지 않는 부산은 꼭 한번 올라가볼 만하다. 이 산을 여근곡이라 부르는 근거의 하나인 옥문지를 볼 수 있고, 사적 25호인 부산성에 올라 아득한 곳까지 조망하는 가슴 시원한 시간도 가질 수 있다.

여근곡을 거느린 부산, 한번 올라볼 만해

마을 안으로 들어가 조금만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길은 부산성에 닿는다. 두 갈래 길이 중간쯤에서 다시 만나 한 길을 이루는 까닭이다. 하지만 필자는 왼쪽 길을 추천할 수밖에 없다.

유학사라는 사찰을 지나 왼쪽으로 호젓한 산길을 걸으면 이내 옥문지가 나온다. 그래서 왼쪽길을 걸으시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또 하나. 왼쪽길이 오른쪽 길보다 좀 더 산을 오르는 기분을 안겨준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다'는 말도 있듯이, 이왕 산에 온 이상 유적도 봐야겠지만 땀도 좀 흘리는 것이 사람에게 좋지 않겠나.        

여근곡 입구 등산로 안내판의 그림
 여근곡 입구 등산로 안내판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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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쉼터'라는 팻말이 서 있다. 여기서는 쉬어야 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은 따르면 안 되지만, 이곳에서는 팻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좋다. 부산의 등산로가 높이에 비해 기이할 만큼 오르는 사람을 숨차게 하는 탓이다. 험난하지는 않지만 한 사람이 간신히 걷기에 적합할 정도의 가느다란 산길 탓으로 여겨진다.

정상이 곧 부산성 유적이다. 여근곡을 앞에 두고 좌우로 길게 이어지는 능선 자체가 성터로, 지금도 곳곳에 성곽 흔적이 선명하다. 하지만 부산성이 선덕여왕 유적인 것은 아니다. 화랑 득오가 <모죽지랑가>를 지은 지리적 배경으로 전해지는 이 성은 문무왕 때에 축조되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묘역 내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솔숲이 능의 주인만큼이나 아름다운 선덕여왕릉.
 묘역 내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솔숲이 능의 주인만큼이나 아름다운 선덕여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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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16년 동안 재위했다. 그녀가 세상은 뜬 때는 647년으로, 비담의 난 와중이었다. 비담 등은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 여왕이 '궁 안에서 반란군들을 방어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여왕이 피살된 것은 아닌 듯 보인다.

비담의 반란군이 주둔했던 명활산성(사적 47호)은 보문호를 왼쪽으로 끼고 동해 쪽으로 들어서는 굽잇길 오른쪽 산중에 있다. 즉, 동해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명활산성은 왜구의 침범으로부터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듯하다. 하지만 역사에 뚜렷한 이름을 남긴 계기는 비담군의 반란 덕분(?)이니 어째 축성의 의의가 반감되는 듯하다. (현재는 복원 공사 중이므로 답사를 해도 보람을 느끼기는 어렵다.)

눈 내린 날이면 환상적으로 아름답다는 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사적 182호)은 찾아가는 길의 아름다운 솔숲이 인상적인 답사 유적이다. 특히 눈이 내린 날 선덕여왕릉을 바라보노라면 혼이 어느샌가 사라져 버리고 없는 듯한 황홀감에 젖는다고 한다. '젖는다고 한다'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필자가 아직 선덕여왕릉에 눈 내린 절경을 눈에 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주는 1년에 거의 하루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곳이다. 당연히 눈으로 자태를 꾸민 선덕여왕릉을 보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몇 해 전, 대구에 폭설이 와서 새벽같이 경주로 출발한 적이 있다. 선덕여왕릉을 보리라는 야심의 발로였다. 하지만 차가 여근곡 앞을 지나는 순간 절망해야 했다. 건천부터 경주까지의 땅에는 단 한 송이의 눈도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깨달았다. 눈 내린 선덕여왕릉을 보려면 폭설 전 날 밤을 경주에서 보내야 한다.

팔공산 부인사는 선덕여왕의 원당이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선덕여왕을 제사지내는 사당 선덕묘가 있었다. 지금은 선덕묘가 무너진 후 새로 지은 숭덕전이 있다. 숭덕전 안에는 선덕여왕 초상(사진 왼쪽)이 있다. 물론 신라 때 그림이 아니라 현대화이다. 하지만 그 그림도 쉽게 보지는 못한다. 숭덕전은 음력 3월 15일에만 개방된다.
 팔공산 부인사는 선덕여왕의 원당이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선덕여왕을 제사지내는 사당 선덕묘가 있었다. 지금은 선덕묘가 무너진 후 새로 지은 숭덕전이 있다. 숭덕전 안에는 선덕여왕 초상(사진 왼쪽)이 있다. 물론 신라 때 그림이 아니라 현대화이다. 하지만 그 그림도 쉽게 보지는 못한다. 숭덕전은 음력 3월 15일에만 개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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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도 선덕여왕 유적이 있다. 품고 있던 초조대장경을 몽고군의 방화로 몽땅 불태워버린 팔공산 부인사가 바로 그곳이다. 파계사가 영조의 원당었듯, 부인사는 선덕여왕의 원당이었다.

부인사에는 지금도 선덕묘가 남아 있다. 이 때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이다. 아마 이 사당은 선덕여왕 사후, 신라 때 처음 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 때의 목조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 부인사 선덕묘만 고이 건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선덕묘 본래 건물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때에 삭아 없어졌고, 지금 것은 근래 건물이다. 이름도 선덕묘에서 숭덕전으로 바뀌었다.

숭덕전 안에는 선덕여왕의 초상이 걸려 있다. 그러나 답사자가 직접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꼭 보려면 음력 3월 15일에 부인사를 찾아야 한다. 숭덕전에 제사를 지내는 그 날, 여왕과 만날 수 있다. 그 날 부인사 하늘에는 온몸이 불덩이로 변한 지귀까지 나타나 정성스러운 답사자를 환영할지도 모른다.


태그:#선덕여왕, #분황사, #여근곡,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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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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