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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 명 가량 남은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는 상봉 때마다 반짝 관심을 받다가 금방 잊히기를 수년째 반복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이산가족 현상은 상봉행사 때만 피상적으로 잠시 보여지다가 잊히기에는 너무 아쉬운 비극이다.

1953년 7월 27일 종전 이후 가족들과 완전히 헤어지게 된 수백만 명의 사연은 이미 지난 60년간 대부분이 사망하며 소리 없이 묻혔고, 남은 이들도 매년 수천 명씩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있다.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그들의 기억을, 그 중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5편 연속 내러티브 형식으로 생생히 되살려 본다. 대부분의 이산가족처럼 일제시대, 남북분단, 6·25 전쟁과 같은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이 가족의 사연도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으로만 남을지 모른다.... 기자 말

[첫 기사: "아빠, 이제 평양에서 제사음식 맛나게 드세요" ] [둘째 기사: "이웃에게 빌린 그 돈, 평생 후회로 남았다"]

1945년 8월 15일, 흥남 화약 공장

유난히도 후텁지근하던 8월 15일 오전 11시, 공장 휴게실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좁은 휴게실에 앞쪽은 일본 직원들, 뒤쪽은 한국 직원들이 점점 들어차면서 더운 숨과 땀냄새로 숨이 턱턱 막혔다.

"갑자기 왜 여기로 모이라는건데?" "뭔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낮 12시가 되자 휴게실 맨 앞 나무책상에 놓여 있는 라디오에서 일본어 방송이 들리기 시작했다. 지직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봤지만 뒤쪽에 서 있는 수덕씨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곧 휴게실 앞쪽에서 쿨쩍쿨쩍 우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일본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걸어 나갔다.

"일본 놈들이 전쟁에서 졌다더라! 무조건 항복했다더라!"

누군가 외쳤다. 복도에서는 일본인 처녀 직원들이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통곡하기 시작했다. 현장 사무실에서는 한국인 직원들이 벌써 두두두두 책상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곧 흥남에서 썰물처럼 빠져 나갔고, 전쟁이 끝나니 한국인 직원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수덕씨가 내줄리를 떠난 지도 벌써 삼 년이 넘었다. 요맘 때면 매미 소리가 요란하던 동네 앞 개울물에 동네 또래 친구들과 발을 담그고 방금 캔 감자를 쪄 먹곤 했는데... 그 감자 맛이 그리웠다. 아니, 고향의 모든 것이 그리웠다.

그렇지만 아직 부족했다. 이렇게 내가 공부도 못하고 돈도 못 번 채 돌아가면? 백여 년이 넘게 아버지,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평생 호미질밖에 더 하겠나. 나도 나지만 동생들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키고 평생 다같이 고된 밭일만 하다가 죽기밖에 더 하고? 평생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호강 시켜 드리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수덕씨는 가진 건 똑똑한 머리밖에 없는 가난한 스무 살 청년이었고, 금의환향의 꿈은 아직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 그 시절 혈혈단신 시골을 떠나 도시로 상경했던 이 땅의 수많은 똘똘한 장남들처럼, 그도 어떻게든 온 가족을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릴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다. 아직은 고향에 돌아갈 때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지금 이곳 흥남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1951년 가을, 경북 영주시 안정면 내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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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국방부 한국전쟁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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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애애애앵... 하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빨간 별이 날개 양쪽에 그려진 비행기들. 저번처럼 인근 마을에 뭘 떨어뜨리고 가는 게 아닌가 불안하다.

"퍼뜩 안 드가고 뭐하노?!"

아버지가 역정을 내신다. 마을 어귀에서 서성거리던 순옥씨는 아기를 업고 얼른 초가집 안으로 냉큼 들어갔다. 며칠 전에도 산에 파놓은 굴에 온 동네 사람들이 대피했다가 답답해서 하루 만에 다 뛰쳐나왔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싶기도 하다.

6·25 사변이 터지고 나서도 내줄리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근처 마을에는 폭탄이 떨어져서 집이 몇 개 무너지고 불탔다는데, 이 산구석에는 부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지 양놈이고 빨갱이고 국군이고 찾아오는 이도 없다.

다들 '불안하니 피난을 가야 안 하겠나' 하면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 봤지만 한 삼십여 리 좀 나가고 나서 귀찮다며 이틀 만에 때려 치고 죄다 돌아와 버렸다. 먹을 게 부족했지만 어차피 예전부터 심심찮게 배 곯고 살던 시절이라 더 힘들 것도 없었다.

인근에 군대가 지나간다고 하면 동네 어른들은 행여 몰라 계집애들은 다 집에 들어가라고 호통을 치시곤 했다. 댕기머리의 열 여섯살 순옥씨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의 늦둥이, 이제 갓 돌이 된 막내 여동생 순조를 포대기로 등에 업고 방에 들어가 빼꼼히 밖을 내다보는 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행여 군대 행렬이 인근을 지나간다고 하면 어머니는 만사를 제쳐두고 동구 밖까지 나와 그 대열을 지켜보곤 하셨다. 혹시라도 그 속에 큰오빠가 있을까, 흙먼지와 땀에 젖은 얼굴로 터덜터덜 흙길을 지나가는 앳된 군인들의 철모 아래 얼굴을 먼 발치에서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마지막 한 명이 지나가면 그제서야 자리를 뜨곤 하셨다.

사변이 터진 이후 큰오빠와의 연락은 끊겼다. 사변이 터지기 석달 전, 3월에 보낸 흥남에서 보낸 편지가 마지막이었다. 남북이 완전히 갈라져 버렸는지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없고, 그의 소식을 들은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으랴 싶었다.

난리 중이긴 하지만 당시만 해도 흥남은 기차 타고 몇 시간이면 가는, 조금 먼 도시에 불과했다. 38선이라는 말도 대부분의 평범한 이들에게는 낯설고 일시적인,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관념, 그냥 단어에 가까웠다. 그 세 글자가 순옥씨 가족을 비롯한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는 영원한 이별이라는 뜻이 되기까지는 오랜 체념의 시간이 필요했다.

1955년 내줄리

사변이 끝난 후에도 동네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그냥저냥 입에 풀칠은 하고 사는 집안 형편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집안의 식구는 늘어서 순옥씨 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생겼다. 둘째 오빠는 결혼해서 올케언니도 들어왔다. 그러나 집안의 가장 빛나던 보석 같은 큰오빠는 없었다. 식구들도 점점 희망을 버렸다. 남과 북은 확연히 갈라지고, 이제는 갈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수덕씨가 집을 떠난 지도 벌써 13년이나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늘 조용하고 말이 없었던 부모님은 말수가 더 없어지셨다. 그러나 매일 밤 어머니는 묵묵히 아들을 기다렸다.

순옥씨가 늦둥이 막내 동생을 포대기로 등에 업은 채 책상에 엎드려 까무룩 잠에 빠져들다 보면 옆 사랑방에서 들리는 차르륵 찰탁찰탁, 차르륵 찰탁찰탁 하는 어머니의 베틀 소리. 밤 공기 속 리듬을 타며 자장가처럼 들리는 베틀 소리 너머로 증기기관차 소리가 들린다.

매일 밤 열시에 영주역을 지나가는 청량리발 안동행 증기기관차. 혹시라도 큰아들이 그 기차에서 내려 내줄리까지 걸어와 문이라도 왈칵 열까 어머니는 매일 밤 기다리셨다. 산 아래에서 기관차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두 식경은 지나서야 비로소 베틀 소리도 멈추고 사랑방의 호롱불도 꺼지곤 했다.

늘 말수가 없었던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장날이면 큰 아들을 종종 찾곤 하셨다. 십여 리는 떨어져 있는 풍기장, 이십여 리 떨어져 있는 영주장이 끝나고 햇빛이 살풋하게 산 너머로 내려갈 때쯤 되면 노을을 등에 지고 터벅터벅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마을 어귀에서부터 아른아른했다. 그러면 또 무슨 돈으로 술을 드셨는지 불콰해진 얼굴로 마당에 들어오셔서는, 어머니에게 생전 안 하던 큰소리를 치곤 하셨다.

"자네가 그때 그 차비를 해주는 바람에..."
"우리 장손을 내쫓은 거 아이가!"
"그래서 나가 죽을 때까지 못 보고 죽는 거 아이가!"

그렇게 본인도 익숙하지도 않은 큰소리를 몇 번 외치고는 안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 저녁 내내 나오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끄응' 하고는 자리를 뜨셨지만 화를 내지 않으셨다. 어쩌면 어머니도 똑같은 후회를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의 길쌈 소리는 더욱 늦게까지 들리곤 했다. 기관차 소리가 영주역을 지나가고 두 식경이 한참 지나도록 사랑방의 호롱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그렇게 순옥씨의 큰 오빠는 죽지도 살아 있지도 않은 유령처럼 가족들의 기억 속을 맴돌았다. 마치 열 손가락 중 손가락 하나가 잘려나간 것처럼, 그러나 잘려나간 사지가 아직도 거기 존재하는 양 여전히 간지럽고 아프다고 느끼는 환상통처럼. 가족들에게 큰오빠는, 존재는 없어졌지만 통증으로만 여전히 남은 손가락이 되었다.

명절이면 통증은 조금 더 커지곤 했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 덕에 명절이면 집은 늘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손님들이 돌아간 명절날, 보름달 아래 산속에서 부엉이 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그런 밤은 유난히도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영주역에서 들리는 기관차 소리에도 더 들떠 보였고, 집 뜨락 바깥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 내다보시다가도 이내 멍하니 밤하늘의 달로 시선을 돌리곤 하셨다.

요새같이 좋은 시절이 아닌지라 보면서 그리워할 사진 한 장이 없었다. 보고 싶어도 머리 속에서 그려 볼 뿐, 기억 속의 얼굴이 흐려지면 그만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밤 하늘의 보름달만 멍하니 바라보셨다. 

그렇게 그리움만 안고 아버지는 1959년 6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아들을 보기 전엔 절대 눈을 못 감는다고 하시던 어머니도 6년 후 결국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하나 하나 내줄리를 떠났다. 둘째 팔성씨만 남아 고향집을 지키고, 나머지는 부산, 서울, 대구로 직업을 찾아, 결혼을 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순옥씨는 결혼을 해서 인근 안정면에 자리를 잡았다. 오빠의 기억은 점점 흐려져 가며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난 4월부터 기자가 김순옥씨와 가족을 인터뷰한 내용, 그리고 김순옥씨의 오빠 김수덕 할아버지의 에세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산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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