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정란 교수
 김정란 교수
ⓒ 윤찬영

관련사진보기


"철저하게 몰락하는 영웅, 참회하는 영웅을 그려보고 싶었다."

김정란 교수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예의 그 똑 부러진 칼럼이나 유려한 시가 아니라 소설, 그것도 청소년을 겨냥한 판타지 소설 <두룬>(웅진주니어)과 함께다. '왜'라는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최근 만난 김 교수는 "한국 신화를 규모 있는 서사로 엮어보고 싶은 바람이 첫 번째 이유"라고 답했다. 그러나 어쩐지 그녀의 속내는 두 번째 이유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의 첫 머리에 올려놓은, '참회하는 영웅(지도자)'을 그려보고 싶었다는 바람 말이다. 겨우 몇 년 전까지도 그녀가 써왔던 강한 논조의 칼럼들을 떠올리면 무리도 아니다. 실제로 그녀는 두 번째 이유를 설명할 때 목소리에 더 힘이 들어갔다.

"현실에도 역사에도 참회하는 영웅은 없다. 변절자들만 넘쳐난다.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언론을 등에 업고 거룩한 척까지 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굉장히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타락한 데다 참회조차 모르는 기득권, 여기에 그것을 드러내야 할 언론이 죽어있다는 것, 그녀는 이를 두고 "우리 사회의 본질적 비극"이라고 꼬집었다. 나아가 우리의 문화 속에 참회와 속죄가 뿌리내리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참회를 몰랐던 역사가 오늘날 참회하지 않는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언제부턴가 성공하면 다 봐준다는 인식이 퍼졌다. '성공한 쿠데타'라는 말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김 교수는 우리 신화 속에서 참회하는 영웅(지도자)을 찾아내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고, 그 문화적 힘을 빌려 우리 사회에 문제를 제기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왜 하필 도깨비일까

김정란 교수가 펴낸 책 <두룬>의 겉그림
 김정란 교수가 펴낸 책 <두룬>의 겉그림
ⓒ 웅진주니어

관련사진보기

김 교수가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굳이 우리 신화 속에서 찾아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프랑스 유학시절 서양 신화를 통해 문학을 비평하는 것이 그녀가 익힌 연구방법론이었으니 신화와의 인연은 문학과의 연 못지않게 긴 셈이다.

학위를 받고 돌아와서는 학생들에게 서양신화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우리 것에 대한 갈증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결국 한국 신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해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맺은 첫 문학적 결실이 바로 <두룬>이다.

"우리가 가진 신화적 근원들을 끄집어내 재해석하고 풍요롭게 만들고 싶었다."

김 교수가 우리 신화에서 끄집어낸 존재는 다름 아닌 도깨비다. 왜 하필 흉한 몰골을 한 도깨비였을까.

그녀는 도깨비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품위있는 신적 존재일 수 있다"고 말한다. 유교 가치 안에서 초현실적 존재가 자리 잡기 어려웠던 탓에 우스꽝스럽게 변형됐을 것이라 여겨 원형을 추적하게 되었고, 결국 '비형랑 설화'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제멋대로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던 우스꽝스런 존재 도깨비는 신화적 해석과 상상력을 타고 불과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 신'에서 '연금술의 신'으로까지 뻗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서사가 완성돼가면서 우리 신화도 그만큼 풍성해졌다.

"우리의 신화 연구는 신화학이라기보다는 문헌학에 가깝다. 물론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콘텐츠에 이르지 못한다. 신화를 해석하려는 자세가 아쉽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연금술

소설 속 '연금술'은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어 신의 영역에까지 가 닿을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으로 그려진다. 주인공 두룬은 연금술을 익혀 죽은 사람도 살려낼 신묘한 능력을 얻지만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채우려다 모든 것을 잃고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참회와 속죄에 나서게 되는 두룬. 그가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고 다시 설 수 있도록 하는 힘도 연금술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연금술은 소설 속 온갖 신화적 요소들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진심어린 반성을 거쳐 비로소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난다'는 소설의 주제를 담고 있는 상징이기도 하다.

"(두룬은) 철저한 고백과 참회를 통해 새로 태어납니다. 제가 진정한 연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잘못에 대한 철저한 고백과 참회로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것."

그저 신화의 영역 속에 머물던 '연금술'은 김 교수의 새로운 해석을 거쳐 '내면의 깊은 성찰을 통해 다른 존재로 거듭난다'는 철학적 의미가 더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철학의 영역으로 올라선 연금술이야 말로 참회를 모르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갈고 닦아야 할 가치라고 그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그릇된 욕망을 좇는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불행해지는 우리 시대의 비극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김 교수는 "<해리포터>를 부러워하긴 했지만 흉내 낼 생각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철학적으로는 내 작품이 훨씬 윗길"이라며 웃었다. 만약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해리포터> 못지않은 멋진 그림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비치기도 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우리의 토종 영웅 '두룬'의 연금술이 '해리포터'의 마법을 뛰어넘어 우리 청소년들에게 널리 퍼져나가길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두룬>(1~3권) | 김정란 (지은이) | 김재훈 (그림) | 웅진주니어 | 각 1만2000원



불의 지배자 두룬 1 - 연금술사의 탄생

김정란 지음, 김재훈 그림, 웅진주니어(2014)


태그:#두룬, #김정란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