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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세상 속 사회적인 성(Gender)', 인도의 하이데라바드 시에서 8월 18일부터 5일간 제 12회 '세계여성학대회'가 열렸다. '유엔 여성총회'라는 별칭이 붙은 이 행사는 지난 2005년 한국에서 ‘화통’을 주제로 개최된 바 있다. 주요 의제는 성차별을 비롯해 식민지주의, 구조적 빈곤, 전쟁 문제 등 여러 종류의 억압·불평등 등이다. <오마이뉴스>는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한국 여성들의 삶을 '쾌락', '관리', '파괴'라는 주제로 풀어봤다. [편집자말]
"담배를 피우더라도 남 안보는 데서 피우라고? 시민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 즉 성인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기호품을 왜 숨어서 남 몰래 피워야 하나. 여자는 임신·출산을 해야 하는 '귀하신 몸'이라고? 그렇다면 독신녀나 이미 출산을 마친 여자들은 왜 못 피우게 하는 거야? 남자도 담배를 피우면 정자 수가 줄어들고 정자의 힘도 약해진다는데 왜 여자에게만 금연을 강요하는 거야?" (<흡연 여성 잔혹사> 서명숙 저, 2004)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흡연 여성 잔혹사>라는 책을 통해 흡연 여성에 대한 부정적 사회 인식에 반기를 든 지 10년이 흘렀다. 과연 흡연 여성들의 잔혹사는 일단락되었을까? 10년 전보다 여성흡연자들이 양지로 나와 담배를 피우긴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성흡연자들은 '담배 피운다'는 사실보다 '여자가 담배 피운다'는 이유로 감내해야 하는 껄끄러운 시선이 여전하다고 입을 모은다.

"'길빵'하는 여자 봤어요?"... 흡연 여성의 수난은 현재진행형

여성들은 카페나 술집 등 밀폐된 공간에선 편하게 흡연하지만, 공개된 흡연구역에서는 흡연을 꺼리기도 한다.
▲ 서울시내의 흡연구역 여성들은 카페나 술집 등 밀폐된 공간에선 편하게 흡연하지만, 공개된 흡연구역에서는 흡연을 꺼리기도 한다.
ⓒ 정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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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소드 1
"혹시 담배 피우세요?" 소개팅에 나온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물었다. "피우긴 하는데 많이는 안 피워요." 다행이었다. 그러나 막상 "저도 피워요!"라고 말할 순 없었다. 자신이 흡연자여도 여자친구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면 하는 남성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흡연자보다는 나의 흡연을 이해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되면 슬쩍 같이 피워야지.-지금은 남자친구와 맞담배를 피우는 한 여성흡연자(26, 여)

# 에피소드 2
골목에서 담뱃불을 붙이고 한숨 들이마셨다. 아까부터 날 쳐다보던 할아버지가 신경쓰인다. 역시나, 지나가며 인상을 찌푸리고 혀를 끌끌 찬다. "말세야"라는 말과 함께 욕이 들려온다. 손찌검하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그의 검지손가락엔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할아버지도 담배 피우시면서 왜 그러세요'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나는 그저 담뱃불을 재빨리 끄고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종로의 한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여성흡연자 (27, 여)

여성흡연자들이 흡연 때문에 겪은 에피소드들이다. 홍익대학교 흡연구역에서 만난 최아무개씨(25, 여)는 "확실히 여성들의 흡연이 늘어난 느낌이고, 보이는 곳에서도 많이 피우지만 그걸 바라보는 좋지 않은 시선은 옛날 그대로 인 것 같다"면서 "동네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살 때 눈치도 보이고 특히 나이 드신 분들 앞에선 모르는 사람이라도 안 피우게 된다"고 말했다.

여성흡연자들은 카페나 술집 등 실내의 흡연실에서는 자유롭게 흡연하지만 아직 외부의 공개된 장소에서 흡연하기는 꺼려진다고 말했다.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만난 조아무개씨(28, 여)는 '최근 여성흡연자에 대한 시선이 관대해지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길빵(길에서 담배피는 행위)하는 여자 봤어요?"라고 반문했다. 여전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불량해 보인다?"

'담배 피운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담배 피운다'는 이유로 눈치봐야 하는 여성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 흡연 여성 '담배 피운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여자가 담배 피운다'는 이유로 눈치봐야 하는 여성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 구글 무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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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OECD Health Data 2014'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37.6%가 흡연을 하는 반면 한국 여성은 5.8%가 흡연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흡연율은 20.3%다. 남성 흡연율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그리스에 이어 두 번째로 높지만, 여성 흡연율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

정말 한국 여성의 흡연율은 5.8%에 지나지 않을까? 조주은 국회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 입법조사관은 "일본 또는 유럽에서는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것에 큰 저항감이 없지만 우리나라는 여성이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한 보수적인 문화가 아직도 남아있다"며 "이런 이유 때문에 여성 스스로 흡연욕구를 안 가질 가능성이 높고, 흡연을 한다고 하더라도 숨어서 피우거나 흡연율 조사에서 응답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흡연'을 혐오하는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가 가장 크다. 지난 6월 서울의대 예방의학교실 유근영 교수 연구팀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7개국 21개 코호트 연구에서 선정된 45세 이상 성인 105만 명을 10년 이상 장기간 추적 관찰한 결과, 흡연자의 사망률이 비흡연자에 비해 약 1.4배 정도 높다고 밝혔다.

문제는 남성과 달리 여성의 흡연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다. "담배 피우는 여자는 여성스럽지 못하고 성적으로 문란할 것 같다"는 편견이 대표적이다. <숙대신문>이 지난해 11월 보도한 '늘어나는 여성 흡연, 여성 흡연 실태와 인식'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20대 남성들을 대상으로 여성흡연에 부정적인 이유를 물은 결과, 1위 건강(44%) 문제에 이어 '여성으로서 불량해보인다'(25%)는 답변이 2위를 기록했다.('청결문제' 17%, '경제적 낭비' 13% 등)

실제 광화문에서 만난 남성흡연자 이아무개(33, 남)씨는 "(흡연하는 여성은) 쉬워보인다"고 잘라 말했다. 건물에서 경비일을 하고 있는 김아무개(60)씨는 "늙은이는 외로워서 피우지만 젊은 여자애들이 뭐가 아쉬워서 담배같은 걸 피우느냐"고 말했다. 홍익대 주변 흡연구역에서 만난 최승호(21, 남)씨는 "(담배 피우는 여성이) 좀 쎄 보이기도 하고 자기만의 세상이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편견은 1900년대 초 기생들이 담배를 피우던 이미지가 아직까지 남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제시대 여성 흡연에 대한 담론분석> (서울대 대학원, 연구자 고한나, 2003)이라는 제목의 석사 논문은 기생의 흡연에 관대했던 과거의 문화가 현대의 여성흡연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한다.

"기생에 대한 부정적 관념과 이들이 공개적으로 사용한 담배의 결합에서 오는 이미지는 20세기까지 여성흡연자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하나의 요소로 등장한다. 즉 유교적 윤리와 관념을 내포하고 있는 여성성인 '여염집 부인'의 공개적 흡연은 기방 처녀의 이미지와 구별짓기 위해서라도 금지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신할 몸이 담배를?"... 남성의 생존위기도 한 몫

여성은 임신을 해야할 몸이기 때문에 여성흡연이 남성흡연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논리 역시 '여성 흡연'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대표적인 이유다.

이에 대해 조주은 입법조사관은 "물론 흡연이 여성들의 건강에 좋지 않지만, 임신 때문이라면 남자도 금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형아 출산에 대한 발생 원인은 너무나 다양하고 어떤 것이 가장 큰 이유인지 정확히 밝힐 수가 없는데도 임신기간이 아닌 여성의 흡연까지 관여하는 것은 남성과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난과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사회분위기에 생존위기를 느낀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이유없는 적대감을 보인다는 분석도 있다. '여성흡연'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경제적 경쟁상대로 부상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전반적인 혐오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여성흡연'이 그 매개체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신주진 연구원은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피해의식이나 적대감 같은 것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아 간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그 책임을 여성들에게 전가시키는 과정에서 여성혐오가 나타난다"며 "여성들은 쉽게 그 희생양이 되곤 한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정민경 기자는 <오마이뉴스> 20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흡연 여성, #흡연 여성 잔혹사, #흡연구역, #여성 혐오, #여성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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