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밀란 쿤데라는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을 거스르는 기억의 투쟁"이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그 권력이 잔혹한 망각의 힘으로 기억 지우기를 강요하면 기억 지키기는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요체가 됩니다. 사랑이나 신뢰처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영화의 주요 테마이기도 했습니다.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인셉션>은 사람의 꿈에 들어가 특정 기억을 주입해 꿈에서 깨어난 후 그 기억을 자기 스스로 가졌다고 믿게 만드는 사고의 조작이 줄거리였습니다. 꿈을 통해 기억을 조작한다는 이 섬뜩한 기억 지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영화가 20일 개봉했습니다.

<더 기버 : 기억전달자>는 가상의 공동체에서 아예 모든 기억이 삭제된 채 태어난 후 시스템에 의해 양육되던 조너스가 '기억보유자'로 지명된 후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권력에 맞서 제거된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를 통해 기억이란 무엇이며,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를 탐구합니다. 

기억보유자는 삭제된 과거의 기억을 유일하게 간직한 사람입니다. 조너스는 기억보유자로 지명되기 전까지 원로들에 의해 정교하게 프로그래밍 된 공동체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억전달자 '기버'에게 과거의 기억을 하나둘 전달받으면서 완벽한 줄로만 알았던 공동체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의문의 출발점은 삭제된 기억의 복원으로 집약됩니다.

기억 지우기에 맞선 유민 아빠의 단식

 기억을 제거하는 권력에 맞서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기억에 관해 탐구하는 영화 <더 기버:기억전달자> 포스터

기억을 제거하는 권력에 맞서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기억에 관해 탐구하는 영화 <더 기버:기억전달자> 포스터 ⓒ (주)지어소프트


기억을 지우려는 권력에 대항해 기억을 지키려는 투쟁은 영화 속 가상의 세계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보다 더 사실적이며, 더 충격적이며, 더 잔혹하게 펼쳐지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세월호 대한민국'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0416'으로부터 넉 달 넘게 광화문 광장에서, 국회 앞에서, 동조단식에서, 안산의 합동분향소에서 직시하며 기억해 온 세계 말입니다.

그 현실 세계에서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병원으로 이송되고서도 단식을 접지 않는 것은 인간다움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선언입니다. 장애가 없는데도, 마땅이 기억해야 할 것을 잊는다면 짐승과 다를 게 없습니다. 짐승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은 당연한 순리입니다. 하지만 권력은 우리에게 '지겨운 세월호'를 끊임없이 주입하고, 기억을 조작하며, 짐승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행태는 제각각이지만 본질은 하나같이 '기억을 지우라'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에서도 구현됩니다. 원로들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가짜 세계에 충실히 복무할 것을 요구합니다. 기존의 가치와 제도, 질서에 순응하며 '늘 같음 상태'에 있는 구성원은 미래가 보장됩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시스템과 규칙을 흔드는 선택이나 행동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주면 잘못된 선택을 한다"고 단언하는 수석원로의 지침은 모두가 행복한 시스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대전제가 됩니다.

수석원로로 분한 메릴 스트립의 노회한 모습은 박근혜 대통령과 닮았습니다. 둘의 모습은 영화의 안과 밖에서 묘하게 닮았습니다. 박 대통령은 일찍이 "대처 총리가 영국병을 고쳤듯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워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겠다"고 역설했습니다. 지난 대선후보 시절에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100%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일은 지금 이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책무"라고 강조했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100% 대한민국'은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국민대통합을 가리킵니다. 기실 국민대통합은 아버지 박정희가 저질러 놓은 긴급조치 피해자와 부마항쟁, 간첩조작 사건 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버지 시대와의 화해를 통한 반쪽 대한민국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포부였으니까요. 당시 국민들은 그의 모습에서 100% 대한민국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합니다. 경실련이 지난 3월 발표한 '박근혜 대통령 대선공약 이행 평가 결과'를 보면 전체 20대 분야 672개 중 공약한 내용대로 이행된 공약은 27%인 183개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과거사와의 화해를 골자로 한 국민대통합 공약 5개는 이행률이 '제로'였습니다. 대신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제주강정마을에 이어 밀양송전탑,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갈등과 대립은 끊임 없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큰소리 친 국민대통합은 그가 취임식에서 약속한 '희망의 새 시대 열기'와 함께 헌신짝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취임 1년이 지나 세월호 대한민국의 한 복판에서 본 박근혜 정부의 민낯입니다.

권력은 위기 때마다 '기억 조작'을 시도한다

 기억보유자로 지명된 조너스가 기억보유자 기버의 서고에서 제거된 기억의 역사를 듣고 있다. 이곳에서 조너스는 인간의 역사를 기버로부터 전달받고 기억복원 투쟁에 나선다.

기억보유자로 지명된 조너스가 기억보유자 기버의 서고에서 제거된 기억의 역사를 듣고 있다. 이곳에서 조너스는 인간의 역사를 기버로부터 전달받고 기억복원 투쟁에 나선다. ⓒ (주)지어소프트


영화에서 원로들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비결은 소통입니다. 수석원로는 홀로그램을 통해 구성원들과 언제 어디서든 이야기를 나눕니다. 물 흐르듯 흐르는 소통이 넘치는 공동체는 비록 일체의 개별 선택을 허용치 않는 '매뉴얼 삶'이지만 불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강요된 공존, 평등, 평화의 이면에는 제도화된 폭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용도가 다 된 노인이나 장애인, 표준 몸무게가 아닌 신생아 등 사회적 약자는 임무해제 즉, 살해처분을 당합니다.

권력에 순응하지 않고 통제에 거역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사회는 비단 소설이나 영화 속 가상 세계만은 아닙니다. 단지 그 모습과 색깔을 달리할 뿐 현실 세계에서도 엄연히 현존했습니다. 박정희로부터 전두환-노태우를 거쳐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는 위기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레퍼토리가 있습니다. '민심은 민생과 경제살리기에 있다'와 '종북좌파'입니다.

이 레퍼토리는 세월호 대한민국에서 고개를 치켜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원인 제공자가 박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복기해 봅시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세 곳-5월 4일 팽목항, 16일 청와대 유가족 면담, 19일 대국민담화-에서 결정적 실언(?)을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철저한 진상규명으로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유족의 애끓는 마음이 잘 반영이 되도록 특별법 등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스스로 약속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지울 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로 자신을 몰아간 셈입니다.

어떻게 난국을 돌파할 것인가. 박근혜 정부는 '민심은 민생과 경제살리기에 있다'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으로 집중했습니다. 세월호 외부세력을 언급하며 유가족까지 싸잡아 종북좌파로 군불을 지피려던 공작은 교황의 방한으로 제동이 걸렸으니까요. 실행을 위한 비장의 카드는 '기억 조작'이었습니다.

먼저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등이 나서 경기침체를 세월호 사태의 영향으로 규정해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경기침체는 부침을 거듭하는 세계경제와 수출기업의 부진, 청년실업, 가계 가처분 소득감소 등 구조적 문제에 있다는 것은 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합니다. 헌데, 국민들에게 먹혀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야당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탓이 큽니다.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도 거들고 나섰습니다. 세월호법으로 민생관련법이 발목이 잡혔다느니, 대의정치가 붕괴할 수 있다느니, 의사자 지정과 대학특례입학 등으로도 부족하냐며 연일 갈등과 대립을 확장해 왔습니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은 법안의 분리대응은 물론이고 유가족이 제출한 '4·16 참사 진실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마저 뒷전으로 밀어놓은 채 두 차례 협상을 거치며 지리멸렬을 자초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구사한 기억 조작이 SF영화의 뺨을 후려칠만큼 정교하고 주도면밀했다는 반증입니다. 그 결과 박 대통령은 유민 아빠의 면담 요청에 대해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선을 긋고 민생과 경제살리기 행보에 나섰습니다. 이에 질세라 김무성 대표는 루게릭병 알리기 자선모금 캠페인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서 만면에 함박웃음을 띄우며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퍼포먼스를 연출했습니다.

"침묵으로 유가족을 죽이지 마십시오"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664 삼두상가 203호에 마련된 세월호 1호 기억저장소가 단장을 끝내고 8월 중에 문을 연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와 각계각층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참여해 만든 공간에서는 세월호와 관련된 갖가지 슬픔과 분노, 사랑과 연대를 보관 전시한다.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664 삼두상가 203호에 마련된 세월호 1호 기억저장소가 단장을 끝내고 8월 중에 문을 연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와 각계각층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참여해 만든 공간에서는 세월호와 관련된 갖가지 슬픔과 분노, 사랑과 연대를 보관 전시한다. ⓒ 박호열


어쩌면 박 대통령이 그리는 이상형 국가는 수석원로에 의해 운영되는 영화 속 공동체인지도 모릅니다. 완벽히 통제된 시스템을 갖춘 공동체라면 그것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불순한 기억을 깡그리 제거해서라도 구현해 보고 싶을 정도로 권력자들에게 매력적인 모델일 테니까요. 그렇지만 현실도 영화처럼 언제나 기억을 지우고 조작하려는 권력에 맞서 기억과 선택의 자유를 위해 행동하는 이들이 대결을 펼쳐 놓습니다.

세월호 대한민국에서 그 구심은 광화문 광장과 유민 아빠입니다. 전국에서 2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동조단식을 하며 인증샷을 올리는 것은 기억을 지우려는 권력에 대항하며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연대입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잔인한 망각의 힘에 대항하는 기억을 낱낱이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작은 실천 또한 각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 소문 없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안산에서는 며칠 전 단원고 인근 주택가에 자리 잡은 '세월호 1호 기억저장소'가 꾸미기 작업을 마치고 이달 중으로 문을 엽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와 각계각층 재능기부자들이 참여해 만든 공간에는 원통이 설치됐습니다. 이 원통에는 앞으로 세월호 참사 메시지와 사진 등 그동안의 슬픔과 분노, 사랑과 연대를 보관 전시할 예정입니다. 또 상자 400개 분량의 기록물은 서고에 별도로 보관합니다.

이렇듯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 시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기억을 되찾고, 되찾은 기억을 저장하는 '사회적 기록'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모아진 사회적 기록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며, 재발 방지의 굳건한 토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권력에 의한 기억지우기와 기억 조작에 맞서 '리멤버 0416'을 지켜온 2014년 대한민국을 생생하게 보존하는 역사가 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조너스는 임무해제 당할 뻔한 아기를 품에 안고 공동체와 비밀의 땅을 가르는 경계선을 넘어갑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기억을 회복시켜 인간다움을 복원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그런 조너스의 고난에 찬 실천에 유일한 나침반은 기억전달자 기버가 남긴 "눈에 보이는 것과 실체적 진실은 다르다"는 말뿐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찾아 나선 조너스의 고행에서 관객들은 희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다시금 고행에 나섰습니다. 22일 저녁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철야농성을 시작하기에 앞서 유가족들은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띄웠습니다. 국민은 대통령의 답변을 통해 그가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가 아님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다시 길거리에 나앉은 유가족을 대통령이 노숙자나 일개 벌레가 아닌 국민으로 인정하는지 아닌지 그 여부도 알고 싶어 합니다.

"참사 이후 지금까지 목소리 작고 힘없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를 부축해준 덕분에 여기까지 살아 왔습니다. 단식을 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 역시 우리와 함께 하는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더 이상 침묵으로 우리를 죽이지 마십시오. 귀를 열고 우리 가족이 원하는 특별법이 어떤 것인지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말씀해주십시오. 그것만이 유민 아빠를 살리는 방법입니다. 대통령님의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유민 아빠 세월호 1호 기억저장소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더 기버:기억전달자 세월호 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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