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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아래 알바)를 좋아한다. 위치와 시간 선택이 가능한 것, 다양한 물건을 진열하고, 그런 물건을 보는 것이 좋다. 또 물건만큼이나 다채로운 사람들을 부담 없이 만나는 것도 좋다. 좀 더 개인적인 취향으로 몇 개 아이스크림 제품이 섞여 만들어 내는 냉동고 속 '향기'가 정말 좋다.

최근 약 세달 동안 집에서 걸어 5분 거리 편의점에서 주말 알바를 했다. 앞서 말한 모든 장점들을 다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주인 부부도 비교적 양심적이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점주의 품성은 편의점 일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상당히 주요한 요소다.

점주와의 첫 전화 통화에서 나는 "손님이 없을 때 책을 읽어도 되나요?"라고 물었고, 그가 "그렇다"라고 답함으로써 우리의 노사관계는 성립되었다. 면접을 보러 가서 더욱 마음에 든 것은 계산대 안쪽에 언제든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비치해둔 것이었다.

'아이스크림 냉동고 냄새가 좋아!'
 '아이스크림 냉동고 냄새가 좋아!'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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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시작. 출근 시각은 토요일 오후 2시, 일요일 오전 10시. 온종일 늘어지기 쉬운 주말, 편안한 시간에 한적한 길을 걸어 출근하는 일도 좋았다. 근무지에 도착하면 넓고 깔끔한 매장 안을 한 번 점검하고, 계산대에 앉는다. 손님이 올 때까지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들으며 바깥 풍경을 보는 것 역시 좋았다.

그리고 사람들. 편의점에 오는 다양한 연령대, 직업, 성격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말 그대로 세상을 보는 것이었다.

바짝 여윈 몸에 늘어진 러닝셔츠를 입고 꼭 밤맛 나는 작은 빵 세 개와 소주 한 병을 사 가는 할아버지, 늘 2리터 생수와 막걸리 한 병씩을 사는 청년처럼 풍채 우람하고 목청 큰 할아버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 빵 두세 개와 우유 한 팩을 사는 근처 회사 경비로 일하는 할아버지 등등. 한날은 "왜 든든한 도시락 안 드시고?"라고 했더니 "미덥질 못해서"라고 말하며 웃었다.

근처에 항구가 있어 항만업체 직원들도 자주 왔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우주복과도 비슷하다) 인스턴트 도시락과 음료수를 고르는 청년 둘. 점심 메뉴를 최종적으로 고를 때까지 주머니 속 지폐와 동전을 신경 썼다. 건장한 체격에 일까지 고되니 언뜻 봐도 성에 찰 양은 아니었다. 역시나 소시지와 아이스크림을 추가로 샀다.

좀 전까지 식비를 아끼려 증정품과 적립카드 등을 꼼꼼히 챙기던 청년이 뭔가 결심한 듯 "복권 한 장 주세요"라고 말했다. 동전으로 긁어 번호를 확인하면 금세 당첨 여부를 알 수 있는 복권이었다. 첫 번에 1천 원이 걸렸다. 그랬더니 다시 5장을 샀다. 음식을 고를 때와는 딴판이다. 그중에 또 1천 원 당첨권 한 장이 나왔다. 이번엔 10장을 샀다.

9장이 전부 꽝. 마지막 한 장을 긁기 전 청년은 손을 올려 기도를 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15억 당첨되면 뭐하지?"
"난 이 길로 회사 나감" 

제법 진지하고 긴장된 몇 초가 지나고……. 최후의 결과는 야속하게도 꽝! 두 사람이 허탈해하며 일어섰다. 그들이 가고 호기심이 생긴 나도 복권 한 장을 샀다. 5천 원 당첨권이었다. 괜스레 미안하지만 신 났다.

5천 원 당첨 복권
 5천 원 당첨 복권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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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대원들도 왔다. 20대 중반의 예쁜 여자 대원은 단골이었다. 선배들의 심부름인지 올 때마다 아이스크림, 과자 등을 양손 가득 샀다. 지난 추석 연휴였는데 뉴스에서 본 119 대원들의 열악한 처우, 위험천만한 현장 작업 등이 생각이 나서 부러 말을 걸었다.

"쉬는 날에도 근무하네요."

아이스크림 하나를 급히 뜯던 대원이 야무지게 대답했다.

"쉬는 날이라도 사고는 나니까요."

정부의 담뱃값 인상안 발표가 있던 시점에는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한 보루에서 최대 10보루씩 사재기 열풍이 미친 것. 다들 계산하면서 걱정 섞인 말들을 했다. "정말 오르려나?","언제쯤 오른다고 합니까?", "이렇게 사는 건 법에 안 걸리지?" 등등. 반대로 담담한 이들도 있었다. "오르면 끊으면 되지" 하면서. 하지만 알다시피 열풍은 이내 사라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갑다…… 싶어요. 그래도 이거 한 대 피고 살아야지!"

까맣고 주름진 얼굴에 체구가 작았던 한 담배 손님의 말이 기억난다.

떼로 몰려와서 휴대전화 게임에 몰두하며 인스턴트 식품으로 배를 채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십대 초·중반쯤으로 보였다. 용돈으로 살 수 있는 음식들을 확인하곤 음료수를 무료로 주는 햄버거를 고르거나 새로 나온 사발면을 사 먹었다. 일차로 식사가 끝나면 남은 돈을 계산해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추가로 먹었다. 그러면서 계속해 게임을 하며 왁자지껄 수다를 떨었다.

손님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문 앞에서 야옹야옹 울어 재꼈다. 곁에 가도 피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가까운 식당 아주머니가 저를 위해 참치 통조림을 사러 오는 중이었다. '이미 알고 있다'는 투였다. 하지만 사람 먹는 음식은 작은 동물들에 되레 해로울 수 있음을 아주머니께 알렸다. 그리고 논의 끝에 생선살을 물에 한번 헹궈 주었는데 녀석은 영 마뜩잖은 표정으로 냄새만 몇 번 맡곤 어둠 속으로 뛰어가 버렸다.

간식 사러왔다 호출 문자를 받고 급히 달려 나가는 119 대원.
 간식 사러왔다 호출 문자를 받고 급히 달려 나가는 119 대원.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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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편의점에서는 각기 다르지만 또 비슷한 이웃들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이따금 기분 상하게 하는 진상 손님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리고 좋았던 건,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 수 있단 사실이었다. 비록 고단하고 외로운 삶 전체를 바꿔주진 못해도 내가 웃으면 어두웠던 표정의 이들도 덩달아 웃었고, 가끔은 '남몰래 서비스'로 주머니 헐거운 택시기사, 고물장수, 건축현장 노동자 아줌마 아저씨들에 사소한 기쁨을 드릴 수도 있었다.

이렇게 즐거웠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였지만 나는 지난 13일에 일을 관둬야 했다. 허리 디스크가 재발해 출근할 수 없었던 토요일, 점주는 "일단 병원에 다녀오라"는 말을 했고 오후에 내 상태를 확인한 뒤 "아무래도 금세 낫는 병이 아니니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분명 일하는 동안은 좋은 분들이라 여겼지만, 이 대목에선 서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도록 하고 싶던 일이라 법적 최저임금보다 적은 시급도 감내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병가를 낸 지 반나절 만에 해고 통지하는 데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었다. 결국, 조목조목 따져 그간 받지 않은 급여 부족분을 받았다. 사람이 좋고, 내가 그 일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기에.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차가운 밤에>란 소설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그야 물론 나는 편의점을 좋아하지. 늦은 밤에 일하기 때문에 월급도 꽤 많고. 아르바이트치고는 상당히 마음에 드는 일이야. 잡지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고, 팔다 남은 빵이나 김밥을 얻을 수도 있고, 점장도 좋은 사람이거든."

상당 공감 가는 부분이다. 나를 비롯해 많은 편의점 알바생들이 '꽤 많은 월급'과는 거리가 있고 그 외에도 많은 현실적 문제들이 있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일이 가진 순수한 즐거움이다. 여튼 이리하여 나는 절대 본의 아니게 좋아하는 편의점 일을 관두고, 현재는 원래의 여행자 공간지기와 만학도를 가르치는 시간강사 일을 하고 있다. 또다른 재미난 일들도 늘 찾으면서! 

편의점은 물건만 사는 곳이 아니다. 기다림, 만남, 휴식, 대화, 이 모든 게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편의점은 물건만 사는 곳이 아니다. 기다림, 만남, 휴식, 대화, 이 모든 게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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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3년 전 귀향해 아주 작은 여행자 공간을 꾸림과 동시에 여러 다른 하고 싶은 일들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정해진 매뉴얼이 없는 삶은 매일매일 스스로 문제를 내고 푸는 과정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억압 당하지 않고 무감각해지지 않고 부도덕한 일에 가담하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것은 정말로 재미나고 가치있는 여정이란 생각을 합니다.



태그:#아르바이트, #꿀알바, #인간의조건, #노동의의미 , #파트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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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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