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거니 뒤서거니 지상파 3사의 수목 드라마 KBS 2TV <아이언맨>, MBC <내 생애 봄날>, SBS <내겐 너무 사랑스런 그녀>(이하 <내그녀>)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듯한 이 세 편의 드라마, 꼼꼼히 뜯어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우선, 이 세 편의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나이가 제법 지긋한(?) 남자주인공들이다.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은 건 여자주인공과 열여덟 살 나이 차가 설정되어 있는 <내 생애 봄날>의 강동하(감우성 분)다. 마흔다섯 살의 그는 축산업체 대표다.

 MBC 수목드라마 <내 생애 봄날> 포스터

MBC 수목드라마 <내 생애 봄날> 포스터 ⓒ MBC


다음은 <아이언맨>의 주홍빈(이동욱 분)으로 서른여섯 살의 게임업체 대표다. 그 뒤를 이어 <내그녀>의 이현욱(정지훈 분)은 서른두 살의 작곡가이자 연예기획사 대표로, 매달 통장에 들어오는 저작권료로 놀고먹어도 상관없는 '유산 계급'이다.

그런데, 이 여유로운 싱글남들에게는 하나같이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있다. 과거의 여자들 때문이다. 강동하는 아내가 죽은 후, 그녀를 떠나보낸 자책감과 상실감에 축산업체 대표라는 걸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추레함'과 '궁상'을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살아간다.

주홍빈도 만만치 않다. 등에서 칼이 돋는 '괴물'이 되는 그의 트라우마에는, 과거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잃은 고통이 담겨 있다. 이현욱은 어떤가? 그가 이제는 작곡도, 연예기획사 일도 저만치 밀어둔 채 오직 애완견과 하루를 보내는 이유는 바로 사랑하는 그녀를 잃은 때문이다. 이들 모두 일상생활을 제대로 영유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 받지만(물론 그럼에도 경제적으로 누릴 것은 다 누리지만), 그들의 고통에 사회적 이유는 0.1%도 없다.

기가 막히게도 하나같이 과거의 순애보로 인해 현재의 삶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 남자들이, 새로운 여자를 만나게 되는 방식은 또 '기가 막히게도' 과거의 연인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다.

아내를 잃은 바다를 쓸쓸히 찾아간 동하, 그는 그곳에서 아내가 죽은 후 처음으로 그의 마음을 따스하게 녹이는 이봄이(최수영 분)를 만난다. 예전 아내가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듯, 처음 만난 그녀는 동하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KBS 2TV 수목드라마 <아이언맨> 포스터

KBS 2TV 수목드라마 <아이언맨> 포스터 ⓒ KBS


주홍빈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우연히 마주친 손세동(신세경 분)에게서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의 향기를 맡은 후, 그는 맹목적으로 그녀를 찾아내기 시작한다. 이현욱도 마찬가지다. 3년 전 죽은 애인의 핸드폰에서 윤세나(정수정 분)의 음성 메시지를 들은 후, 이현욱은 세나를 쫓는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남자 주인공과 엮인, '과거의 그녀'와 연관이 있는 그녀들. 이들은 자신에게서 사랑하는 과거 그녀의 흔적을 잊지 못하는 그들의 집착 혹은 배려로,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도움을 받게 된다.

세 편의 닮은꼴 '신상' 드라마들, 왜 이렇게 익숙할까

자, 여기까지. 이렇게 세 편의 드라마는 여자주인공에 비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자주인공, 그것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치는 그들을 등장시킨다. 이 나이차 덕분에 현실에서는 '도둑놈' 소리를 들을 만한 처지이지만, 그와 그녀를 매개하는 과거의 그녀 덕분에 그들의 사랑은 드라마 속에서 개연성을 얻기 시작한다.

이는 전형적인 재벌남, 혹은 그에 버금가는 부유한 남자주인공과 그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덜한 여자주인공 간의 결합이 변형된 형태다. 단지 그런 전형적인 버전이 동화 버전, 트렌디 버전, 컬트 버전으로 색채만 달리한 것이다. <아이언맨>의 경우만 봐도 등에서 칼이 돋는 기괴한 설정을 내세웠으면서도 정작 그걸 풀어가는 건 지극히 전형적인 멜로의 형식이다.

단지 과거 멜로의 전형에 비해 남자주인공의 나이는 지긋해졌고 여자주인공은 젊어졌다. 그는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그 상처를 얻은 시간만큼 부를 축적했다. 대번에 여자주인공의 허기를, 혹은 그녀를 위협하는 주변 상황을 일거해 해결해 줄 만큼의 능력을 지녔다. <아이언맨>의 손세동이나 <내그녀>의 윤세나는 현재 어렵지만, 시청자는 다 안다. 그런 그녀가 곧 넉넉한 그로 인해 그녀가 겪는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을.

 SBS 수목드라마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포스터

SBS 수목드라마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포스터 ⓒ SBS


더구나, 새롭게 등장하는 이 드라마들의 설정은 전혀 신선하지 않다. '사랑하는 여인의 심장을 이식받은 그녀'. 이건, 이미 윤석호 PD의 그 유명한 사계절 시리즈 중 하나인 <여름향기>(2003)로 유명해진 설정이다.

<여름향기>에서 유민우(송승헌 분)가 자신의 사랑했던 여인의 심장을 받은 심혜원(손예진 분)을 보고 과거의 그녀를 느끼듯이, <내 생애 봄날> 속 강동하도 아내를 잃은 바다에서 만난 이봄이에게서 동일한 감정을 공유한다. <내그녀>의 천재 작곡가와 작곡가 지망생의 만남 역시 익숙한 설정이다. 가요계를 배경으로 신데렐라의 탄생 역시, 낯설지 않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이렇게 상처받은 남자주인공들을, 그리고 그들을 구원해 줄 '동정녀 마리아' 같은 여자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방송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을이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리모컨을 쥔 여성 시청자에게 그녀의 불안한 사회적 정체성을 달래줄 만큼 넉넉하면서도 나잇값을 못하는 아이 같은 영혼을 지닌, 그래서 자신이 '구원해 주었다'고 자부할 만한 존재가 필요하다는 걸 말해주려는 것일까?

선선해지는 날씨와 함께 옆에 누가 있어도 가슴이 스산해 지는 가을에 따스한 멜로드라마 한 편, 좋다. 하지만 오직 사랑으로 인해 아파하고, 사랑으로 인해 고통 받으며, 사랑으로 인해 구원받는, 그 예전에 하던 이야기를 버전만 달리하여 도돌이표처럼 되풀이 하는 드라마들이 방영되는 것을, 그저 '계절 탓'이라고만 치부해야 할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내 생애 봄날 아이언맨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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