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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되었고, 다음은... 참! 집은 자가죠?"

카드설계사 아주머니의 질문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아, 아니에요."
"네? 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만요. 사무실에 전화 좀 해볼게요."

순간 아주머니의 눈빛 속에는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네? 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머니가 통화하는 동안 카드 신청 용지만 들여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만두고 싶었지만. 내 앞에 앉아 있는 카드설계사 아주머니는 붙임성이 좋아 그럭저럭 알고 지내는 사이다.

그런데 그분이 얼마 전 보험 일을 그만두고 카드 회사로 옮겼는데 기본적인 급여를 받으려면 할당된 만큼 카드 발급을 받아야 한다면서 신청서를 내밀었다. 솔직히 말하면 굳이 새로운 카드를 만들 필요는 없었지만,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주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신청서를 쓰면서 가정주부는 집이 '자가'여야 신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듣고 오히려 내가 미안해졌다. 거기에 아주머니가 당연히 내 집을 자가로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치부를 들킨 것처럼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거의 10여 년 넘게 살고 있는 집이지만 '월세'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고, 거의 10여 년이 넘게 이 집에 살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올 때는 정말 빈손이었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우리는 모든 것은 내놓아야 했다. 남편의 사업은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러나 가진 것 없이 의욕만으로 사업을 시작하다 보니 한두 번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서 급기야는 두 손을 들게 되었다. 빚만 잔뜩 진 채.

하루 종일 울려대는 빚 독촉 전화에 전화기 코드를 뽑아 놓기도 하고, 느닷없이 집으로 들이닥친 사채업자와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거기에 남편은 한동안 무기력한 상태에서 빠져 정말이지 하루 세끼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를.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부동산. (자료사진)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부동산.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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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선택한 것이 집을 전세에서 월세로 옮기고 내가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월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지하 단칸방으로 가야 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기에는 아파트가 좋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월세 정도는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월세살이는 오히려 나에게 용기를 갖게 했다. 밑바닥까지 내려온 지금,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은 없으니 이제 위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는 생각으로.

그때는 초등학교에도 오전, 오후반이 있어서 나는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오후 1시부터 오후 7시까지, 거실 마루에 상을 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생계가 달려 있는 일이라 진심으로 아이들을 대했고,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엄마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현관에는 아이들의 신발로 꽉 차곤 했었다.

덕분에 기본적인 생계는 물론 월세도 충당할 수 있었고 다달이 빚도 갚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남편도 직장 생활을 시작해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도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그렇게 10여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지금은 빚도 다 갚고 더 이상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게 치열하게 버티면서도 늘 마음 속에는 집에 대해 아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양가집안의 반대로 빈손으로 결혼한 탓도 있고, 가진 것 없이 사업을 시작해 그나마 있던 것도 내주다 보니 내 집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제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면서 또다시  내 집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동안 오래 살아서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그래도 주변 시세보다 훨씬 싸게 살고 있는 거예요. 너무 싸도 그러니까 이번 계약할 때는 월세 10만 원 올려야겠어요."
"싸게 사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10만 원씩 올리면 저도 힘들어요. 차라리 보증금을 올리는 게 어때요? 지금 아이들도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가서요."

휴대폰 창에 '주인'이라는 이름이 뜰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인데도 집주인이라는 이유로 유세를 부릴 때면, 사실 심기가 불편하다. 월세를 밀리는 것도 아닌데….

"아유, 안 돼요. 나는 다달이 세를 받아야 해요. 보증금 올리면 빚이 되는 것 같아서. 힘든 건 알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조금의 틈도 주지 않는 주인 여자에게 사정도 해보고 떼를 써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올려주고 만다. 그럴 때면 답답한 마음에 부동산을 기웃거려 보기도 하지만 늘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예전에는 신용불량으로 은행대출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신용회복이 된 후에는 월세를 내는 것보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강행하기에는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겪었기 때문에 다시 그 과정을 밟고 싶진 않았다.

온수 배관 터져 주인에게 전화하는 일, 유쾌하지 않지만

"또 터졌어요? 다른 집들은 다 괜찮은데 왜 유독 우리 집만 호스가 터지는지, 이번에는 제가 알아서 사람 보낼게요. 이건 고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말썽이야?" 

작년 겨울, 거실 바닥에 물이 흥건해서 뜯어보니 온수 배관이 터져 거실 바닥을 다 들어내고는 호스를 다시 깔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안방 바닥에도 물이 새서 바닥을 다 들어내고 호스를 다시 깔아야 했다.

두 번의 대공사를 하느라 소음에 먼지는 물론 온수도 쓰지 못하는 것도 답답했는데, 그보다 난방을 틀지 못해 온 가족이 추위에 떨었던 게 제일 힘들었다. 그런 일로 전화를 거는 것도 유쾌하지 않은데 정작 주인은 잦은 공사로 불편해할 우리를 염려하기 보다는 돈이 들어갈 것에 짜증이 날 뿐이었다.

'가난한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은, 집 없이 산다는 게 죄인 아닌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집은 꼭 있어야 헌다. 그것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 기를 쓰고 모아서 단칸방이라도 내 집이 있어야 헌다. 아님 살기 힘들어야."

엄마가 생전에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엄마는 당신의 말씀처럼 수십 번 이사를 하고 나서야 집을 장만하셨다. 쉰을 훌쩍 넘긴 나이인데도 월세를 사는 나를 보면 엄마는 뭐라고 하실까? 그나마 위안을 삼는 것은 나는 내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다시 또 부동산을 기웃거리고 있다. 내년쯤이면 다시 주인 여자가 월세를 올릴 것 같고, 부동산 규제 완화로 은행 대출 폭도 커졌으니 좀 무리다 싶어도 이번만큼은 이 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은 가르치는 아이들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니 굳이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세상 전부가 아빠, 엄마인 것처럼 까만 눈동자로 바라보던 두 아이도 언젠가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것이다. 그때 나도 말해 줄 것이다.

"내 집은 꼭 있어야 해. 아이들이 어렸을 때 부지런히 모아서 꼭 집 먼저 마련하도록 해."

아이들만큼은 당당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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