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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성당
 계산성당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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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대구를 방문해 달성·서문시장, 계성학교, 동산, 3·1운동로를 방문한 경북 고령군 우곡중학교 학생들은 마지막 여정으로 계산성당, 상화고택, 서상돈 고택, 뽕나무골목, 한방체험관을 찾았다(관련기사: 대구3.1운동로를 걸으며 "독립만세"를 외쳐보다).

계산성당은 사적 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계산성당이 국가 사적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은 1902년에 지어져 영남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당은 국가 사적이라는 점보다도 1950년 12월 12일,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주례사 아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씨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더 유명하다. 주례는 '박정희'를 신부의 이름으로, '육영수'를 신랑의 이름으로 착각한 것이다.

계산성당에서 되돌아 나와 왼쪽으로 100미터 정도 걸으면 다시 왼쪽으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이 나타난다. 골목 입구에는 상화고택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물론 이정표가 없어도 고택으로 가는 길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가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고, 이상화 시인의 얼굴도 커다랗게 벽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골목을 50미터 가량 들어가면 민족시인 이상화가 마지막으로 거주한 집이 나온다. 1901년 4월 5일 대구에서 태어난 시인은 1943년 4월 25일 대구에서 타계했다. 하지만 이 집은 상화 생가는 아니다. 상화 생가는 서문로 2가 11-1번지에 따로 있다.

집은 상화 기념관 형태로 꾸며져 있다. 마당에는 당시에 썼던 펌프가 있지만 물은 뽑아올리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장독대 건너편에는 시비 셋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어본다.

상화 고택
 상화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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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상화고택에 왔으면 꼭 이 시 전문을 읽어보아야 한다. 시인의 대표작도 읽지 않고 고택 답사를 마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가능하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가사로 하여 만들어진 노래도 불러보는 게 바람직하다. 그래서 해설을 맡은 정만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파견예술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 앞에서 선창을 해가며 우곡중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상화고택 전경
 상화고택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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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고택은 상화고택과 마주보고 서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이 강제로 떠맡긴 나라빚 1300만 원을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갚자면서 일어난 운동이다. 1300만 원은 당시 나라의 1년 예산에 맞먹는 금액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300조 가량 된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국채보상운동은 끝내 실패로 종결되었다.

상화고택과 서상돈 고택을 좌우로 두고 그 사이를 걸으면 20미터쯤에 이상정 독립군 장군 고택도 만나게 된다. 이상정 장군은 이상화 시인의 형이다. 장군의 집은 지금 식당이 되어 있다.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정 장군과 이상화 시인 형제의 집이 이렇게 한 골목에 나란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장군 고택을 지나면서 곧장 왼쪽으로 접어들면 담벽에 어떤 사람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뒷날 '뽕나무골목'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이 골목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누에고치 기르기를 장려했던 인물의 얼굴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중국인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로 왔다가 종전 이후 대구에 눌러얹은 두사충이다.

뽕나무골목의 두사충 벽화
 뽕나무골목의 두사충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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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학생들은 한방 웰빙체험관을 답사했다. 체험은 이 건물 2층에서 실시한다. 그러나 곧장 2층에 입장해서는 안 된다. 1층에서 자신이 사상체질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검사를 받은 후 2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한방 웰빙체험관이 있는 이 거리를 흔히 '약전골목'이라 한다. 약을 파는 가게가 많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공식 명칭은 대구약령시로, 1658년부터 개장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규모가 가장 큰 한약 도매 거리로 한국기네스의 인증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약전골목에 점점 한약 파는 가게가 줄어들고 그 대신 커피점 등이 늘어나고 있다. 가게 임대료가 너무 높아져 한약상들이 영업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약의 향기가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고 있는 대구약령시, 그래도 고령에서 온 학생들은 그 약향을 맡으며 신기해하고 있다.

한방 웰빙체험관
 한방 웰빙체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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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우곡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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