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톤>  조동인, 김뢰하, 박원상 주연 살벌한 복수극도 아니고, 내기 바둑으로 큰 돈을 챙기는 부류의 영화가 아니다. 단지 바둑으로 인생을 논하고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이다.

▲ 영화 <스톤> 조동인, 김뢰하, 박원상 주연 살벌한 복수극도 아니고, 내기 바둑으로 큰 돈을 챙기는 부류의 영화가 아니다. 단지 바둑으로 인생을 논하고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이다. ⓒ 씨너스 엔터테인먼트

감독과 주연이 모두 생소하다. 조세래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니 이력이 다양하다. 정지영 감독과 함께 집필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로 춘사영화제 각본상을 받고, <하얀 전쟁>(1992)에서는 각본을 맡아 대종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이후 바둑영화 <명인>을 집필하다 캐스팅에 난항을 겪고 영화판을 떠난 뒤, 1997년 바둑에 대한 애정으로 3부작 소설 <역수>라는 작품을 내놓는다.

50대 중반이 넘어서야 비로소 그가 담고 싶었던 바둑소재 영화 <스톤>이 탄생하게 된다. 내가 <스톤>에서 가장 마음에 담았던 대사는 이것이다.

"인생이 바둑이라면 첫 수부터 다시 두고 싶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문장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현재까지 이어온 내 발자취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새로운 인생, 경험하지 못한 세상 혹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와 상처를 싸매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세래 감독도 자신의 인생을 첫 수부터 다시 두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많지 않은 나이 50대 중반에 유명을 달리하셨다.

바둑은 서로가 한 수씩 두는 공정한 게임

기원에서 훈수나 내기 바둑을 두며 하루하루를 별 일없이 살아가던 아마추어 바둑고수 '민수(조동인)'는 어느날 깡패 두목인 '남해(김뢰하)'와 만나며 그의 바둑사범이 된다. 어색하던 그들의 관계는 바둑돌을 하나하나 올려놓으며 서로에게 깊이 다가간다. 바둑판 위에서 지나간 삶을 이야기하고,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한편, 좀 더 여유있고 낭만적인 삶을 꿈꾸는 대화가 이어진다.

영화 <스톤> 2014년 개봉 깡패 두목과 젊은 아마추어 바둑기사가 만나며 벌어지는 그들의 우정과 인생에 대한 성찰. 인생은 목숨을 걸듯이 바둑도 목숨을 건다. 그것은 바둑판과 인생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영화 <스톤> 2014년 개봉 깡패 두목과 젊은 아마추어 바둑기사가 만나며 벌어지는 그들의 우정과 인생에 대한 성찰. 인생은 목숨을 걸듯이 바둑도 목숨을 건다. 그것은 바둑판과 인생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씨너스 엔터테인먼트


<타짜>와 <신의 한 수>가 느와르 풍의 미장센과 배경음악을 깔고, 조승우식 <타짜>의 문법을 답습했다면, <스톤>은 우리네들의 인생을 바둑이라는 도구로 한 땀 한 땀 소중하게 그려냈다.

영화의 70%는 바둑 두는 장면으로 채워진다. 그만큼 영화에서 바둑의 흰 돌과 검은 돌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필자가 바둑 두는 법을 알았다면 아마 더 깊은 세계를 경험했으리라. 그러나 이 영화는 바둑을 모르는 사람도, 어느 정도 바둑과 인생을 동일 선상에 놓고 우리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준다.

민수에겐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도박중독자인 어머니가 있다. 그가 바둑을 두게 된 것도 어머니가 시켜서 한 것이란다. 남해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잃고 살았는데, 깡패 질로 중년까지 버텨내면서 누구에게 한 번 칭찬이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남해는 민수에게 바둑과 인생의 공통분모를 짚어주며 삶의 목표를 찾으라 조언을 해준다. 민수는 남해에게 인생의 바둑판을 첫 수부터 다시 둘 것을 제안한다.

바둑이 먼저냐 사는 게 먼저냐 그걸 알면 고수다

나이 차이로 따지면 남해와 민수는 아버지와 아들 뻘이지만, 둘은 바둑을 매개체로 서로의 인생에 관여하며 우정을 쌓아 나간다. 이세돌 9단만이 프로기사가 아니고, 박지성만이 축구선수가 아니듯 신입 프로 기사에게도 그만의 바둑판처럼 무수한 경우의 수를 가진 인생이 펼쳐져 있다. 우리는 이 널려진 경우의 수에서 돌 하나씩 짚어가며 바둑판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영화에도 나오듯 남해는 자신의 조직을 재개발 지역 용역으로 동원시켜 시민들을 쓸어버리려 한다. 남해는 여기에서 바둑돌을 어느 지점에 놓아야 할지 중요한 결정을 필요로 한다. 그가 말하듯 경북 평해읍에 작은 기원 하나 차려서 밥벌이를 할 것인지, 아님 낚시꾼이 되어 세월을 낚으며 살 건지 말이다. 그러나 묘수에도 타이밍이 있는 것이다. 바둑에서의 돌 하나는 다 차려놓은 밥상을 한 번에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남해는 바둑돌의 타이밍을 놓쳤다. 민수와의 마지막 대국을 끝내지 못하고 조직원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 <스톤> <스톤>의 마지막 장면, 한번 어긋난 바둑돌은 돌이키지 못한다. 자신이 큰 형님에게 그랬듯, 부하 조직원으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남해는 민수와의 바둑을 끝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 영화 <스톤> <스톤>의 마지막 장면, 한번 어긋난 바둑돌은 돌이키지 못한다. 자신이 큰 형님에게 그랬듯, 부하 조직원으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남해는 민수와의 바둑을 끝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 씨너스 엔터테인먼트


사실 바둑이 먼저인지 사는 게 먼저인지는 해답을 찾기가 무척 어렵다. 서양의 체스가 그러하듯 동양의 바둑과 장기는 단순한 놀이 차원을 넘어서 우리네 인생과 또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농도 짙은 질문을 던지는 게임이다. <타짜>나 <신의 한 수>처럼 도박중독자들의 희뿌연 한 눈동자를 쳐다보는 것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다. 결국 도박으로 시작해 도박으로 끝나는 그들의 결말은 아무도 행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톤>에서 말하려는 바둑이라는 게임은 인생을 돌아보고 한 돌 한 돌을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성찰을 가져다준다. 영화는 이런 것이다.

슈퍼컴퓨터도 인간을 이길 수 없다는 바둑

가로 19, 세로 19 칸에서 만들어지는 361개의 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경우의 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컴퓨터로도 바둑의 고수를 이길 수 없다. 인간의 지능은 경우의 수를 넘어서 삶과 죽음의 강가를 직접 경험하기 때문이다. 땀내나는 인생을 살아보지 못한 슈퍼컴퓨터는 바둑판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절망과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인간을 이길 수 없다.

이토록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돌아보도록 해주신 고 조세래 감독께 감사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김뢰하와 박원상의 찰떡 연기는 보면 볼수록 왜 이리 사랑스러운지! 마지막에 김뢰하가 모시던 형님(오광록)을 찾아가 인사드리는 장면 또한 눈물짓게 한다. 그들이 원하던 바둑판을 새로 쓸 수 있다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까?

덧붙이는 글 http://blog.naver.com/office3000/220159874022 본인 블로그에 중복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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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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