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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을 모신 남해 충렬사 모습. 왼쪽 모서리가 땅속에 매몰됐다 다시 발굴된 충민공비와 오른쪽에 충무공비가 보이고 뒷편에 가묘가 살짝 보인다.
 이순신장군을 모신 남해 충렬사 모습. 왼쪽 모서리가 땅속에 매몰됐다 다시 발굴된 충민공비와 오른쪽에 충무공비가 보이고 뒷편에 가묘가 살짝 보인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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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지인들과 함께 남해충렬사를 찾았다. 여수를 떠난 버스는 한 시간도 못돼 남해대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오른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노량 앞바다는 1598년 11월 19일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및 왜 수군 1천여 척이 서로 뒤섞여 격전을 치른 곳이다.

노량해전은 양측 함대가 노량 해구에서 조우하면서 시작되었다. 달빛도 없는 컴컴한 새벽 2시에 시작된 전투는 임진왜란 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가 됐다.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왜군이 관음포가 남해도를 돌아나가는 해로로 착각해 포구 안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날이 밝자 포구 안에 갇힌 것을 안 왜군은 죽기 살기로 탈출할 길을 찾았다.

여수넷통 시민기자단과 함께 남해 충렬사를 찾았다
 여수넷통 시민기자단과 함께 남해 충렬사를 찾았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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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넷통 회원들이 남해 충렬사를 방문하기 위해 입구로 들어가고 있다
 여수넷통 회원들이 남해 충렬사를 방문하기 위해 입구로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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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포 입구에서 퇴로를 차단한 조선수군과의 전투는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는 다음날 정오경에 끝났다. 그러나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며 독전하던 이순신 장군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의 첫 시호는 충민공이었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노량앞바다는 양식장과 평화롭게 바다를 오가는 어선들만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광양제철단지가 보이고 조금만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산 아래를 보면 석유와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여수국가산업단지가 보인다. 와!와! 하는 함성이 들릴 것 같지만 무심하기만 한 바다를 바라보다가 당시를 생각하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사람들은 장군의 시신을 충렬사 자리에 잠시 모셨고 이 무덤이 이순신 장군의 가묘다. 이순신 장군 영정이 그려진 사당의 뒤에는 지금도 가묘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 세웠던 남해충렬사의 충민공비. 나라에서 충무공이란 시호가 내려오자 땅에 묻었던 충민공비는 1973년에 주변정화 작업을 하던 중 발견하여 충렬사 왼쪽에 다시 세웠다. 사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충무공비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 세웠던 남해충렬사의 충민공비. 나라에서 충무공이란 시호가 내려오자 땅에 묻었던 충민공비는 1973년에 주변정화 작업을 하던 중 발견하여 충렬사 왼쪽에 다시 세웠다. 사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충무공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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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 아래에 있는 거북선 모습. 남해충렬사와 지척이다
 남해대교 아래에 있는 거북선 모습. 남해충렬사와 지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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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 1633년 이 고을 사람 김여빈은 초가집으로 사당을 짓고 장군을 추모하자 당시 현령 이정건이 충민공비를 세웠다. 그러나 1643년에 나라로부터 충무공의 시호가 내려지고 1658년에 국가의 지원으로 사당다운 사당이 세워지자 충무공의 5대손인 이명상이 새로이 '충무공비'를 세우고 충민공비는 땅에 묻었다. 시호(諡號)는 임금이나 정승,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해 주던 이름이다.

그 후 1973년에 남해충렬사가 국가사적 233호로 지정되면서 주변 정화작업을 하던 중 땅에 묻혀 있었던 비를 발견하여 충렬사에 안치시켰다. 현재 충민공비는 충렬사 사당 왼쪽에 세워져 있다.

이 충무공과 관련된 최초의 사액사당 여수 충민사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는 마래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선조 34년(1601년) 체찰사 이항복이 왕명을 받아 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민심을 살펴본 후 통제사 이시언에게 명하여 건립한 것이다.

여수 충민사 모습. 선조가 충무공을 위해 직접 이름을 짓고 그것을 새긴 현판을 내린 충무공 관련 최초의 사액사당이다
 여수 충민사 모습. 선조가 충무공을 위해 직접 이름을 짓고 그것을 새긴 현판을 내린 충무공 관련 최초의 사액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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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충민사는 우부승지 김상용이 임금께 이 사우(祠宇)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여 선조가 직접 이름을 짓고 그것을 새긴 현판을 받음으로써 이 충무공과 관련된 최초의 사액사당이다. 사액(賜額)은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말한다. 사우(祠宇)란 조상의 신주를 모셔놓은 집을 말한다.

함께 충무공을 모시는 통영의 충렬사보다는 62년, 숙종 30년(1704년)에 세워진 아산 현충사보다는 103년 전 일이다. 여수 충민사는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충민단만 남기고 모두 철거되었으나 고종 10년(1873년) 지역 유림들의 진정으로 건물을 다시 세우고 판서 윤용술이 쓴 충민사 현판을 걸었다.

1919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된 후, 1947년 2칸 집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지역 주민의 노력으로 다시 세워 1993년 6월 1일 국가 사적 제 381호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과소평가 되어 충민공으로 불렸던 이순신의 공덕이 커지자 후일 나라에서는 충무공으로 불렀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남해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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