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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병원 수술실에서 의사들이 수술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한 병원 수술실에서 의사들이 수술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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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날짜가 잡히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 생각해봤다. 주변 정리가 필요했다. 먼저, 보험증권을 확인했다. 수술에 필요한 경비는 충분하다. 다음으로 옷 정리를 했다. 외출할 땐 입을 게 없었는데 막상 꺼내 놓고 보니 웬 옷이 그리도 많은지. 하나하나 다시 만져 보니 옷 속에 숨어 있던 지난 얘기들이 막 쏟아져 나온다. 귀를 막고 두 눈 질끈 감고 보따리에 싸서 의류함에 넣었다. 장롱이 헐렁해졌다. 금붙이는 남매를 불러 앉혀놓고 두 무더기로 나누며 당부했다.

"딸, 잘 들어. 엄마 반지는 알이 크니까 동생 장가들 때 니 올케 될 사람 반지해 줘. 목걸이는... 남자는 알이 크지 않아도 되니까, 니 신랑 될 사람 반지해 줘."

나이 서른을 바라보는 남매가 앉아서 코를 훌쩍이며 운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차분한 어조로 나머지를 공평하게 나누며 남매가 의좋게 살 것을 당부했다. 다음은 부엌 살림을 정리했다. 버리자니 아깝고, 쓰자니 불편해서 끌어안고 있던 것들, 그다지 쓰지 않고 처박아 둔 그릇들이 꾀죄죄한 몰골로 쏟아져 나온다. 미련 없이 다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남기니 싱크대와 찬장도 헐렁해졌다. 세간도 정리했다. 집안을 둘러보니 버릴 때는 서운했는데 버리고 나니 여유가 있어서 좋다. 이래서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강조하셨나 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인간 관계를 잘 정리해야 한다.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은 없는지, 신세지고 인사 못한 사람은 없는지, 이런저런 사람들 이름에 제목을 붙여서 명단을 만들었다. 아프다는 내색하지 않고 그들과 차례로 밥을 먹었다.

지나는 말처럼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이 밥하고 같이 꿀꺽 삼키고 황금 똥으로 다 배출해 버려"하며 맛있게 밥을 먹었다. 이 모든 일을 시골에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상대방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은 편했다. 홀가분했다. 기분이 좋았다.

수술하려고 병원에 들어가는 날 저녁, 집을 한 바퀴 휘 둘러봤다. 이 정도면 내 죽고 난 뒤가 깨끗하리라. '뭐 이따위로 살다 갔어' 소리는 안 듣겠다 싶었다.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기 낳으러 방에 들어갈 때 댓돌 위에 벗어놓은 신발을 돌아 봤단다. 이 신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서. 그 때 집을 나서는 내 심정이 그랬다. 요즘 암 환자가 얼마나 많은데, 의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그딴 소리를 하면서 유별을 떠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두 가지 암으로 수술 받아야 하는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장례는 가족끼리... 당신 홀아비 된 거 알리기 싫어"

내가 입원해 있는 방으로 갑상선 수술 담당의가 오셨다. 갑상선은 별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유방 수술이나 잘 받으라며 위로를 하셨다. 나도 몰래 뜬금없는 주문을 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저는 시낭송가예요. 그러니까 목소리 잘 나오게 해주세요."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알았다"고 하셨다. 나의 이 뜬금없는 말에 우울해하던 가족들도 모처럼 웃었다. 유방을 수술하는 선생님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분이 수술을 할지 무척 궁금했다. 진짜 내일 수술을 하는지 불안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집에 보내고 남편과 둘이 남았다. 남편에게 할 말이 있는데 입이 안 떨어져서 못했던 말을 해야 한다.

"여보, 내가 죽으면 가족들끼리 장례 치르고 남에게는 알리지 마세요. 당신 홀아비된 거 알면 사람들이 괜히 당신을 측은하게 본단 말이에요. 난 당신이 그런 취급 받는 거 싫어.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아직 둘 다 미혼이니까 새장가는 들지 말고 연애만 해요. 다 큰 아이들 새엄마 눈치 보는 일 없게."

남편은 쓸데없는 소리 한다며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날이 밝았다. 수술실로 가는 침대로 옮겨 타고 누워서 복도를 가는데 천장의 전등이 내 마음처럼 흔들린다. 남편과 아이들이 침대 모서리를 잡고 바짝 긴장해서 따라 온다. 언니는 아직 안 왔나 보다. 뭐라고 가족들을 위로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난다.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오전 8시 수술실, 여러 명의 인턴이 둘러서서 나를 들여다보며 확인을 한다. 이름, 생년월일, 수술 부위. 그리고는 뭔가를 코에 대고 숨을 크게 들이 마시란다.

눈을 떴다. 수술실 전등만큼이나 많은 눈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수술이라는 긴 터널을 빠져 나왔구나. 비몽사몽간에 그 눈들의 주인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아, 찾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다. 안심이다. 나는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태그:#수술 , #주변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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