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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거대한 고목은 많은 상수리를 우리에게 선물했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거대한 고목은 많은 상수리를 우리에게 선물했습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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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집에 오래된 참나무, 상수리나무가 있다는 말씀 드렸지요? 바람이라도 불면 참나무 잎이 우수수 날리는 광경과 소리! 정말 끝내주거든요.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 한 사람으로는 안을 수 없는 커다란 나무를 누군가 베어내려 했던 흔적을 보고 많이 언짢았습니다.

집 뒤에 산소가 있는, 80세가 넘은 노인께서 집에 오셔서 자기 어렸을 적에도 우리 집 참나무가 컸었다고 회상하시는 걸 보고 100년은 되지 않았을까 짐작했었거든요. 그런 나무를 세상에…. 그림자가 져 못쓰겠다고 톱질을 해 그 상처가 지금도 마치 사람의 흉터 자국처럼 기다랗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주변에 돌을 쌓고 흙을 메워 튼튼하게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마, 참나무님께서 나름대로 흡족하실 걸요?

그래서 그런지 그 참나무 형님이 지난 가을에 엄청나게 많은 상수리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알밤만한 상수리였습니다. 어렸을 적에 그걸로 구슬치기를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사람들이 그처럼 상수리를 좋아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동네 분들도, 얼마 전 산골 집을 방문한 동서도, 주워놓은 상수리 자루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이렇게 많이 어디서 났느냐는 표정이었지요. 허허, 그런데 사실은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동네는 상수리가 아직도 산 속에 지천으로 깔렸거든요.

산에서 가져온 상수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10월 중순 쯤 이었을까요? 아내와 함께 뒷산에 땔나무를 하러 올라갔습니다. 요즘 산에 쓰러진 나무들이 정말 많습니다. 길가의 고사목을 금방 한 짐 베어, 지게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디 보자, 가을 산인데 뭐가 있을꼬?'하는 마음으로 산허리를 한 바퀴 돌았지요.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상수리 나무가 보였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상수리를 올해 처음 보았습니다. 이게 다 산골에 사는 덕분이지요. 도토리는 길쭉하잖습니까? 이건 그야말로 동그랗습니다. 제가 직접 구슬치기를 해봤더니 와, 손톱에서 튕겨져 나가는 게 범상치 않았습니다. 제 친구 윤섭이와 종갑이가 우긴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그날 저희 못난이 부부는 더덕을 캐겠노라고 배낭을 가져갔는데요, 거기에 더덕 대신 상수리를 한 가득 담아 왔습니다. 기분 정말 좋았지요. 산골이라고는 모르던 사람들이 웬걸 산열매를 가득 수확했으니 산사람이라도 되는 양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런데요, 그런데…. 그건 별거 아니었습니다요.

우리 집 참나무 형님이 본격적으로 열매를 뿜어내시는데요. 와, 아침저녁마다 마트 봉지로 하나씩 주시더라고요. 주중에 아내는 돈 벌러 나가고 없고 저 혼자 흙바닥에 엎드려 그걸 줍는데요, 허리가 끊어지게 아팠습니다. 그것도 과유불급인가요? 바람이라도 부는 날은 허리가 더 아팠고, 거기에 비라도 내렸다면 진창에서 줍느라고 저녁이면 삭신이 쑤셨습니다. 허리가 아프다고 그걸 그냥 바라보고 있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들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가을 열매를 그냥 둔다고요. "저런 못된 놈!"이라는 호령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렇게 보름 가까이 지내다보니 나중에는 지겹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 아내 숙이는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며칠에 한 번씩 산골에 오면 상수리 자루가 불어 있고, 또 불어나 있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인터넷에서 묵을 만드는 방법을 힐끔거리더니, 아, 이 겨울 내내 조금씩 만들어 먹을 거라면서 휴일이면 밤 12시가 되도록 같이 상수리 껍질을 벗기자는 겁니다.

그거요? 쉽지 않습니다. 알맹이만 쏙 떨어지면 좋겠지만 바람 때문에 덜 익어 떨어진 경우 껄끄러운 껍질까지 붙어 있어 일일이 사람 손으로 벗겨내야 합니다. 칼을 껍질의 벌어진 틈새에 쑤셔 넣어 하나씩 벗기다보니 손아귀가 아파옵니다.

그렇게 알마다 정성을 다해 매끄러운 상수리 포대를 쌓아 갔습니다. 아내는 쌓여가는 상수리를 보고 탄성을 질렀지만 저는 너무 힘든 나머지 "아니올시다!"이었지요. 그렇게 고생해서 벗긴 상수리인데…. 아내가 갑자기 변덕을 부렸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주신 묵은 진짜 맛있던데, 혹시 스스로 맛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요?

처음은 직장 동료 어머니의 솜씨가 좋다고 가져갔습니다. 두 번째는 집에 놀러 온 제 옛 동료를 주었고요, 그런데 세 번째, 며칠 전 처형내외에게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몽땅 내주대요. 처형의 "정말 좋다!" 한 마디에 말입니다. 진짜 어이 상실입니다. 그렇게 겨울 내내 먹는다며 죽도록 고생시켜놓고는…. 제 묵 맛은 언제 볼 수는 있을까요? 그러다 세 군데서 한꺼번에 맛보라고 주시면 곤란하겠지요? 그것 참, 별 걱정을 다 하고 있네요.

겨울이 코 앞인데도 아직 묵 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 안에 묵 맛을 볼 수는 있을까요.


태그:#산골편지, #상수리와 묵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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