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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무궁화, 대한민국의 국화다. 쉼없이 은은한 아름다움을 전한다.
 무궁화, 대한민국의 국화다. 쉼없이 은은한 아름다움을 전한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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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다

나라가 망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 왕조는 27대 왕과 519년을 이어 오다가 순종 4년 경술년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한일병합'으로 그 막을 내렸다. 사실은 이미 그 일 주일 전인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사이에 8개조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그날이 조선의 망국일이었다.

일제는 이 조약 사실을 일 주일간 극비에 부쳤다. 조선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폭동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병합조약 공포를 앞두고 완전무장한 헌병들로 서울 거리를 에워쌌고, 그래도 못 미더워 기마대가 서울 시내 골목을 쉴 새 없이 순찰케 했다.

하지만 조선의 마지막 날인 1910년 8월 29일은 매우 평온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마침내 경복궁 근정전 정문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대형 일장기 두 개가 내려졌다. "한국 황제는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게 양여"하였다.

오백 년 왕조의 망국일치고는 온 나라가 너무 조용했다. 다만 경복궁 일대의 매미들만이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듯 울부짖었다. 아마도 강화도조약 이래 35년간 일본에게 계속 일방적으로 무수히 맞은 잽에 기력을 다 잃은 때문이었나 보다. 이 날부터 조선인들은 나라 잃은 망국인이 되는 동시에 식민지 백성으로 악랄한 일제강점기를 맞았다.

1910년 8월 29일의 경복궁 근정전 정문에 내걸린 일장기로 조선의 멸망을 상징하고 있다.
 1910년 8월 29일의 경복궁 근정전 정문에 내걸린 일장기로 조선의 멸망을 상징하고 있다.
ⓒ 눈빛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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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朝鮮)'은 건국 이래 중국의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받들고는 스스로 '소중화(小中華)'에 자족하면서 오랫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 지냈다. 그러면서 오직 봉건주의와 유교사상을 신주처럼 받든 채 줄곧 변화와 개혁을 거부해 왔다.

지구의 반대편 서구 여러 나라는 18세기부터 시민혁명으로 공화제 국가를 만들고,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이들 열강들은 자원의 확보와 상품의 수출을 위해 식민지가 필요했다. 이들은 무력을 앞세워 약소국가를 침략하여 영토를 넓히는 제국주의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대륙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의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인 일본은 부국강병을 이루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영토 확보를 목적으로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나라는 바다 건너 이웃인 조선이었다. 아니 그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대륙정벌을 꿈을 키워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그 첫 시도였다. 하지만 그때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수군, 그리고 명군의 개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 정벌에서 후퇴한 일본은 3백여 년을 절치부심하며 재침공의 날을 기다려 왔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의 속내를 모른 채 여전히 일본을 업신여기거나 깔본 채 등한시해 왔다.

마침내 1875년 부국강병을 이룬 일본은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앞세워 조선을 위협한 뒤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런데도 조선지도층은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하는 거대한 해일 속에서 세계 조류의 큰 흐름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변화와 내부 개혁을 무시한 채, 나라의 문을 꽁꽁 닫고는 정권 유지와 백성 수탈에만 여념이 없었다.

이에 전국 곳곳에서 탐관오리의 수탈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키자, 조선 정부는 이를 진압치 못하고 마침내 청국 군대를 끌어들였다. 그러자 일본은 청국보다 더 많은 군대를 조선에 보내 서울을 장악한 뒤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 러일전쟁

서구 열강들의 예상과는 달리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청국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청일전쟁을 지켜보던 러시아가 견제에 나섰다. 일본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독일 등 삼국간섭으로 청일전쟁에서 얻은 요동반도를 되돌려 놓게 되었다. 또한 조선 정부가 일본의 침략을 저지코자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 하자, 일본은 그간 한국에서 확보한 지위마저 잃게 될 것을 우려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신변 보호를 구하는 아관파천을 하자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그런 가운데 러시아가 의화단 사건으로 만주를 점령하자, 1903년에 일본은 러시아에게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인정하기를 요구하였다. 러시아가 이를 거절하자,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기로 결정하고, 1904년 중립을 선언한 조선에 대규모의 군대를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 점령군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 해 2월 국권피탈의 단초가 되는 '한일의정서' 조인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일본은 미국이 중재한 포츠머스조약에서 러시아에게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인정케 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미국과도 '카츠라·태프트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 골자는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조선침략 대외 정지작업이 끝나자, 곧바로 일왕의 특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서울로 건너와서 무력을 앞세운 위협과 회유로 1905년 11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제이차한일협약'인 이른바 을사늑약을 체결시켰다.

이에 격분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고종은 이 협약이 강제된 것으로 효력이 없다는 친서를 각국 원수들에게 보냈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낸 것에 대해 그 책임을 물어 퇴위를 강요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와 동시에 '한일신협약'인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은 조선 내정도 손아귀에 넣었다. 이미 한일의정서(1904. 2.) 한일협약(제일차한일협약, 1904. 8.) 을사늑약(제이차한일협약, 1905. 11.)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1907. 7.) 등 네 차례의 강압적인 조약으로 조선은 야금야금 국권을 송두리째 잃어 버렸다.

경술국치 전후 조선에 파견된 일본 헌병들
 경술국치 전후 조선에 파견된 일본 헌병들
ⓒ 눈빛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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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독립기지 건설

나라가 망하자 일제는 전국 주요지에 헌병분견소를 457개소나 설치하고 헌병, 경찰, 헌병보조원을 주둔케 하여 주민들을 감시케 했다. 일제는 조선반도 전체를 창살 없는 감옥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항일의병이 출현한 곳이나 의병장 근거지는 헌병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나라는 망했지만 그래도 뜻있는 지사들은 나라를 되찾고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망명, 곧 항일독립운동자의 해외 이주가 모색되었다. 만주와 연해주(러시아 극동지방), 북경, 상해, 하와이 등지에 독립기지 건설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들은 홍범도와 같은 무장의병 계열과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계몽활동을 하던 인사들 이동녕, 이회영, 박은식, 신채호, 신규식,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이었다. 그즈음 이들은 국외에 독립기지 건설에 바빴다.

김해에 살던 허돈(許暾)이 족친 네 가구와 구미 임은동에 정착한 이후 3, 4대 내려오는 동안 20여 가구로 불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임은동에 거주하며 집성마을을 이루었다. 그래서 촌수가 4촌 8촌이지 한 핏줄로 모두 한 형제나 다름이 없었다.

시인 이육사, 임은 허씨의 외손이다.
 시인 이육사, 임은 허씨의 외손이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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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를 잃은 구미 임은 허씨 집안은 기둥이 쓰러진 데다가 나라마저 망하자 부평초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왕산의 죽음으로 임은 허씨 집안은 항일명문가로 태어났다.

왕산의 맏형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은 경북 청송 진보에서 창의하는 등 아우 왕산과 성산에게 군자금으로 3천여 두락을 제공하면서 후견인으로 집안을 시켰다.

왕산의 셋째 형 성산(性山) 허겸(許蒹, 1851~1940)은 아우 왕산과 함께 맹렬한 의병을 활동을 벌였다. 오적척살사건과 을사늑약 반대상소로 투옥당하기도 했다.

망국 후 안동의 김동삼(金東三), 이상룡(李相龍), 유인식(柳寅植) 등과 같이 만주로 망명하여 초대 부민단(扶民團) 단장으로 광복운동에 앞장섰다.

또 사촌형 범산(凡山) 허형(許蘅, 1843~1922)의 두 아들 허발(許坺), 허규(許珪)의 항일운동도 조국 광복에 거름이 되었다. 허형의 따님 허길(許佶)의 둘째아들이 이원록(李源祿), 곧 이육사 시인이다. 왕산의 사촌 아우 시산(是山) 허필(許苾, 1855~1932)의 둘째아들은 허형식(許亨植, 1909~1942)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으로 만주벌판을 누볐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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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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