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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후 7시. 수림(樹林) 민명수 선생의 1주기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28일 오후 7시. 수림(樹林) 민명수 선생의 1주기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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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후 7시. 수림(樹林) 민명수 선생의 1주기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28일 오후 7시. 수림(樹林) 민명수 선생의 1주기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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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오후 7시입니다. 대전 둔산 한밭생협 강당에 1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수림(樹林) 민명수 선생의 1주기 추모제입니다. 강당 앞에는 민 선생님의 환한 얼굴이 꽉 차 있습니다. 하얀 국화꽃이 놓여 있습니다. 일 년이 지났지만 서글픈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무면서도 목소리는 낮고 자꾸만 잦아듭니다.

민 선생님(1936~2013)은 살림의 집, 대전여민회 공동대표, 한밭생협이사장, 대전환경운동연합이사장, 대전참여자치연대 공도의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생협, 여성, 환경, 권력 감시 분야 등 대전지역 시민운동 모든 분야에 족적을 남겼습니다.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이 대전지역 시민사회 영역에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분들인 까닭을 알게 합니다.

김원순 무지개공동체 교우님이 민 선생님의 삶의 이력을 소개합니다. 그는 민 선생님에 대해 "평범했지만 비범한 분이었다"며 "늦깎이로 시민운동에 뛰어들어 척박한 대전지역 시민운동의 씨앗을 뿌리고 든든한 나무, 수림(樹林)으로 성장하도록 힘쓰셨다"고 회고합니다. 이어 "자상하시고 어머니 같았던 선생이 가시니 아직도 마음이 허전하고 그립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추도사를 한 이정순 대전여성단체연합고문과 정지강 목사의 추도사를 하자 간간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민 선생님과 대한 즐거운 기억, 재미있는 이야기가 자꾸만 떠오른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민 선생님에 대해 "가는 곳마다 일구고 주변사람들을 격려하는 분이었다"며 "민 선생님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8일 오후 7시. 수림(樹林) 민명수 선생의 1주기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28일 오후 7시. 수림(樹林) 민명수 선생의 1주기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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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수 목사의 '추모시'는 특별했습니다. 운율과 댓구로 민 선생님과의 추억을 표현했습니다. 한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중촌동/ 중촌초교/ 모퉁이길/ 대전천/ 가차이에/ 사단법인/ 한밭생협/힘을모아/ 생산자와/ 소비자가/ 상생하는/공존사회/만들고자/세번째 만남/이뤄졌다"

한밭아이쿱생협 중창단의 추모공연은 서글프면서도 그리움을 연상하는 노래들로 채워졌습니다.

이날 민 선생님에 대한 추모문집이 나왔습니다. 문집의 이름은 민 선생님의 호를 넣은 '수림의 향기'입니다. 김선건 충남대 명예교수와 김조년 한남대명예교수는 이날 문집 발간사를 통해 "나눔과 배려가 무엇인지 몸으로 체득하게 해주신 분, 사람과 사람이 이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가신 분"이라고 평하였습니다.

28일 오후 7시. 수림(樹林) 민명수 선생의 1주기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28일 오후 7시. 수림(樹林) 민명수 선생의 1주기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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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에는 선생의발자취와 유작 글과 그림, 사진 그리고 선생을 그리워하는 22명의 추모 글이 실려 있습니다. 추모 문집은 김광식(충남인재육성재단 상임이사), 금홍섭(전 대전참여자치연대 사무처장), 김원순(무지개공동체 교우), 김제선(풀뿌리사람들 상임이사), 김종남(환경운동연합 전 사무총장), 박종만(문화비젼 대표), 최공숙(한밭생협 이사장) 님의 수고로 이루어졌습니다.

추모제가 끝난 뒤 참석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사진 속 얼굴은 모두 표정이 밝습니다. 추모제의 시작은 서글펐지만 웃음으로 마무리된 것은 민 선생님이 평소 청량제 역할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한 참석자는 이날 민 선생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와줘서, 꿈꾸게 해줘서 고마워요. '우리'라는 선물을 준 그대, 사랑해요"

'안 식구'손 감싸며 다독여주던 민 의장님

(**이 글은 당초 고 민명수 선생의 문집에 넣기 위해 작성된 글입니다. 편집위원회와 혼선으로 누락됐습니다. 기회에 함께 소개합니다) 
고 민명수 선생님 추모문집 '수림의 향기'
 고 민명수 선생님 추모문집 '수림의 향기'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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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아니 1999년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대전참여자치연대 기획실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안식구와 두 아이를 데리고 민명수 의장 댁을 방문했다. 몸담고 있던 참여자치연대 식구들과는 자주 댁을 찾았지만 가족들과는 처음이었다. 민 의장은 어린 딸아이를 안아보기도 하고,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아빠를 빼 닮았네. 아빠 생각해서 아프지만 말고 잘 커다오, 알았지?"

그러면서 안식구에게 아이들 이름을 부르면서 당부했다.

 "권용이, 유나 영양제 먹여? 안 먹인다구? 안 돼!. 요즘 애들 키 크는 게 다 이유가 있어. 다른 건 몰라도 영양제는 먹어야 돼"

민 의장은 나처럼 아이들이 커서도 키가 작을까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당시에도 나와 안식구는 양육에 대한 기본 지식이 태부족이었다. 준비가 덜된 부모들이었다. 불과 15년 전이지만 지금처럼 인터넷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때도 아니었다.           

큰애가 어렸을 때는 하루에도 열 댓번 설사를 해도 변을 잘 보는 것이라고 좋아했다. 아이가 맥가리가 없고 의식이 혼미할 때쯤에서야 놀라 병원응급실로 달려갔다. 소아과 여의사가 '애가 탈진해 죽을 뻔 하지 않았냐, 정신이 있느냐'며 혼쭐을 냈다. 큰애는 걷기시작하자 현관문만 열어 놓으면 차가 오가는 도로변으로 뛰어나가 뒤도 안돌아보며 내달렸다. 영화 '프레스토검프' 주인공과 다를 바 없었다. 눈만 뜨면 애엄마 속이 새맣게 타들어갈 때였다.

작은 애는 유치원을 다닐 때까지도 먹은 것의 대부분을 토해냈다. 하두 토하기를 잘해 농담처럼 "만원어치를 먹이면 9천원 어치를 토하는데 먹여야 하느냐'고 타박을 했을 정도였다. 딸아이는 어려서 시도 때도 없이 칭얼대고 울었다. 뒤에 생각해보니 먹는 대부분을 토해 내 항상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는 부부가 그런 소견머리도 없었다.

민 의장은 한참동안 아이들을 지켜보더니 철딱서니 없는 부모의 사정을 꿰뚫어 보셨다.  안식구의 손을 감싸주었다. 남편이 변변한 수입이 없어 두 살배기 애를 떼놓고 맞벌이를 해야 하는 답답한 속내도 어루만졌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서 손자들이 먹던 영양제를 가져야 아이들에게 먹였다. 그리고는 안식구에게 '이런 어린애들에게는 무슨무슨 영양제가 좋다'며 받아 적도록 했다.

이어 이것저것 아이들의 먹을 거리에 대해 설명했다. 다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만은 지금까지도 또렷하다.

"다른 건 몰라도 간장만큼은 양조간장 먹으면 안 돼. 내가 얘기해 놓을 테니 간장 하나라도 꼭 생협 것 챙겨먹어!"

민 의장은 생협의 전신인 '살림의 집'에서 일했다. 족보를 따지자면 대전지역 생협의 시조다. 친정어머니 같은 마음씀씀이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먼저 빠져든 건 안사람이었다. 그동안 애를 키우고 살림을 하며 궁금했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훌쩍 두서너 시간을 지체하다 나왔다. 나오는 길에 애들 손에는 용돈을, 나와 안사람의 손에는 이것저것 먹을 거리를 챙겨 주셨다.  아파트 주차장까지 마중 나온 민의장님이 애들에게 당부했다.

"자주 놀러와, 알았지?"

이후부터 안식구는 내게 습관처럼 민의장님의 안부를 묻곤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는 가족들과는 민의장님 댁을 찾아뵙지 못했다.   

민 의장을 만난 건 주로 촛불집회나 시민단체 행사 때였다. 특히 민 의장은 2000년 총선연대' 활동과 '대통령탄핵반대 운동'때 하루도 빠짐없이 대전역 광장을 지켰다. 집회장에 나온 안식구와 애들을 친손주처럼 안아주셨다. 민 의장은 써온 글을 읽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도란도란 당신의 경험을 섞어 대화하듯 연설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면서도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을 훈계할 때는 강단 있게 언성을 높였다.

민 의장은 늘 앞에 서기보다 목동처럼 뒤에서 지켜보는 걸 원하셨다. 자신을 내세워 끌고 가기보다 잘 가고 있는지 지켜보며 뒤를 살피는 것을 의장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세심한 감성이 배어 있는 여성리더쉽의 전형을 보여줬다.

언젠가 행사장을 취재하다 민 의장을 대하며 '흐르는 물줄기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날 민 의장은 "의장을 너무 오래했다"며 "단체에 민폐만 끼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물줄기는 천천히 부드럽게 대지를 적신다. 흙속에 스며든다. 민의장도 사람들의 마음을 그렇게 편안하게 적셨다. 물줄기는 때론 고요하다 때론 폭포수처럼 강하다. 물줄기는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 민 의장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몸도, 마음도 그렇게 아래로만 향했다.

그런 민 의장은 지금 곁에 없다. 집회장에서 까치발을 하고 휘둘러보아도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지금도 두 아이를 만나면 "아빠보다는 키가 커서 천만다행이다"며 웃으실 게 뻔하다.   

지난 2006년, 민 의장은 11년 만에 의장직을 털어내며 "시민 운동했던 60대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했다. 가장 행복해 하던 '그 때' 나와  우리 가족이 민 의장님과 함께 했다는 게 덩달아 행복하다. 나에게 민명수 선생님은 늘 '의장님'으로 남아 있다.

민 의장님!



태그:#고 민명수, #한밭생협, #추모제, #1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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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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