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발리(Bali)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휴양지로만 알려져 있지만, 발리 섬은 8개가 되는 왕국이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발리 역사를 보면, 발리는 작은 섬나라임에도 여러 왕조가 부침을 거듭한다. 발리의 중세시대를 통치하던 겔겔(Gelgel) 왕조는 17세기 말에 발리의 동쪽지역인 클룬쿵(Klungkung)에 수도를 옮기고 클룬쿵 왕조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에 발리는 8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클룬쿵 왕조의 권력이 쇠약해지면서 클룬쿵 왕국 이외의 지역에서 거점을 구축한 유력한 귀족들이 권력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클룬쿵 왕조는 정통을 자랑하는 권위 있는 왕조로서 20세기 초까지 계속 발리섬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클룬쿵 왕조는 발리섬에 왕조문화를 전파시켰을 뿐 아니라 오늘날 발리의 무용, 미술, 음악, 연극 등의 양식이 모두 이 클룬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아내와 함께 과거의 영화를 자랑하는 클룬쿵이라는 고도(古都)를 찾아가기로 했다. 클룬쿵으로 이동하는 길, 수많은 집들과 시장 그리고 작은 힌두교 사원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렇게 힌두교 사원들이 많으니 가히 발리를 신들의 섬이라고 할 만하다.

클룬쿵 왕조의 재판정으로 이용되었다.
▲ 크르따고사 클룬쿵 왕조의 재판정으로 이용되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클룬쿵은 1995년 이후 스마라푸라(Semarapura)라는 공식지명이 생겼지만 아직도 발리 사람들은 이곳을 클룬쿵이라고 부른다. 발리 중앙부의 우붓(Ubud)에서 차를 이용해 발리 가장 동쪽에 있는 클룬쿵까지는 50분 정도 걸렸다.

공식 명칭이 스마라푸라 궁전(Puri Semarapura)인 클룬쿵 왕궁의 출입구 앞에서 그리 비싸지 않은 입장권을 샀다. 스마라푸라 궁전은 발리의 다른 관광지에 비해 관람객들이 그리 많지 않아서 한적하다. 나는 편안하고 조용히 옛 왕궁을 관람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발리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왕궁이라 왕궁 안으로 들어가려면 정숙한 복장을 유지해야 한다. 왕궁 입구에서 보니 반바지를 입은 여행자들은 사롱(sarong)을 입고 들어가야 한단다. 하지만 나와 아내는 다리를 완전히 가리는 긴 바지를 입고 있어서 누가 제지를 하지는 않는다. 왕궁 입구에는 생리 중인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안내문도 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싶다. 나는 묘한 적막감이 감도는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발리의 파란 하늘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구름이 해를 가려주어서 그리 덥지는 않다. 

스마라푸라 왕궁은 왕궁터라고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되고 몇 개의 건물들만이 남아 있다. 흡사 일제 때 우리나라 경복궁이 경회루와 근정전 등 몇 개의 전각만을 남기고 깡그리 파괴되었던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현재 스마라푸라 왕궁은 크르따고사(Kertagosa)라고 불리는 재판소, 연못 위의 왕실 휴식 누각인 발레 깜방(Bale Kambang), 왕조시대의 번영을 보여주는 유물을 간직한 박물관, 그리고 클룬쿵 왕조의 수많은 전각으로 들어가던 벽돌문 만이 왕궁터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한 왕조가 자리했던 곳이기에 왕궁 터는 작지 않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볼 만한 곳이 많다.

사원의 수호신인 나가가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다.
▲ 크르따고사 나가 사원의 수호신인 나가가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크르따고사(Kertagosa)는 이 왕궁을 찾은 이들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다. 크르따고사는 클룬쿵 왕국 당시에 죄 지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법원 기능을 하던 곳이었다. 워낙 이 재판소가 유명하여 이 왕궁은 스마라푸라 왕궁이라는 이름보다는 크르따고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스마라푸라 왕궁의 동쪽에 자리 잡은 크르따고사는 18세기에 지어졌고 1942년까지 실제로 사용되었다.

산스크리트어로 '끄르따'란 '자리잡다'라는 의미이고 '고사'는 집회소라는 뜻이니, '크르따고사'는 '재판소'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왕이 다스리던 왕국에서 정식 재판을 통해 죄인을 다스리는 재판소가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발리인들에게도 존중되어지는 인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힌두교 사원을 지키는 수호자인 나가(Naga) 석상이 장식된 계단을 통해 크르따고사 위로 올라섰다. 나가는 튀어나올 듯한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런데 나가가 워낙 귀엽게 생겨서 두려움이 생기기보다는 웃음이 나온다. 사면이 뚫린 누각 같이 생긴 크르따고사 내부는 내가 좋아하는 고색창연함을 가지고 있다.

내부의 바닥 면적은 매우 좁고 그 한가운데에 목제 책상이 있으며,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자가 3개씩 총 6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한쪽 의자는 장식이 많고 현란한데 비해 한쪽 의자는 아주 평범하다. 아마도 화려한 의자 쪽에는 당시 재판을 주재했던 재판관인 3명의 브라만 계급 승려가 앉았을 것이다. 재판정의 탁자와 의자는 현재 아무도 앉는 이 없어 썰렁해 보이지만 당시 발리의 사회상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이 재판정의 지옥도 밑에서 재판을 받았다.
▲ 재판정 죄를 지은 사람들은 이 재판정의 지옥도 밑에서 재판을 받았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나는 재판장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클룬쿵 왕궁의 유적을 감상했다. 이곳에 올라선 여행객들은 재판정보다는 그 위쪽으로 자연스럽게 얼굴을 들게 된다. 크르따고사 지붕 안쪽 천장이 온통 천장화로 도배가 되듯이 가득 차 있고,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독특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이 동행한 발리 친구, 아롬에게 물으니 이 회화들은 전체가 지옥도(地獄圖)였다.

당시 이곳에서 진행된 재판은 무척 엄했고, 힌두교의 지옥을 묘사한 그림 아래에서 죄 지은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힌두교도인 죄인들은 자연스럽게 천장화를 보게 되는데 천장화가 힘을 발휘해서 죄인 대부분이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성기를 태우거나 잘라버린다.
▲ 지옥도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성기를 태우거나 잘라버린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생전에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사람들이 지옥에 가면 어떻게 되는지가 힌두교식으로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만화같이 그려진 그림은 보기만 해도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바로 눈치 챌 수 있다.

재판소 천장 위에 그려진 그림은 상상이 가능한 모든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생전에 음란하거나 성범죄를 지은 남자들은 생식기가 공격을 받고 있는데, 생식기가 불에 태워지기도 하고 개가 달려들어 생식기를 잘라 버리기도 한다. 음란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불 끓는 욕조 속에 넣어 태워 죽인다. 회화의 내용들이 너무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고 신기해서 눈길을 확 잡아끈다.

비둘기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다음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다.
▲ 천상의 비둘기 비둘기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다음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크르따고사 천장의 꼭대기에는 지옥도를 초월한 세계가 그려져 있다. 금빛 화려한 비둘기 4마리가 천장 중심의 가장 높은 정점을 향하여 날고 있다. 비둘기들이 향하는 곳은 인간의 영혼이 가는 곳이다. 윤회사상을 믿는 힌두교에서 이 비둘기들은 인간의 영혼을 인도하고 다음 세상을 안내하고 있다. 비둘기들이 향하는 세상으로 묘사된 천장의 꼭대기는 불교의 연꽃 대좌와도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천장에 그려진 힌두교 신화의 세계는 재미있고 활기가 넘친다. 인도에서 발생한 같은 뿌리의 종교여서인지 이 힌두교 회화들은 마치 우리나라 불교 사찰 불화들과 그림의 구도와 문양이 유사하다. 다신교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신화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참 많다. 그리고 고대의 신화 속에 탄생한 종교이기 때문에 창과 칼을 들고 상대를 위협하는 그림들이 많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한 힌두교 회화여서 그림을 보면 어디가 선이고 어디가 악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멀리서 천장화를 한눈에 보면 이 그림들이 아주 우아한 궁정미술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지옥도 속의 인간과 악마들을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면 모두 만화같이 우스꽝스럽고 괴기영화 속에서 나온 것같이 생겼다. 이들 그림은 모두 서양 회화의 영향을 받기 전에 만들어진 발리 고유의 그림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 스타일의 그림을 클룬쿵 양식이라고도 하고, 클룬쿵 근교의 까마산(Kamasan)이라는 마을에서 주로 이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서 까마산 양식이라고도 한다.

클룬쿵 양식의 그림들은 흑색과 백색 외에 빨강, 초록, 노랑, 갈색, 살색과 같은 전통 색상 4가지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따뜻한 느낌이 든다. 마치 발리의 한 정글 속에 들어와 있는 분위기가 난다. 이 그림들은 잘 갈아진 먹을 이용하여 대나무 펜으로 우선 윤곽을 그린 후 그 위에 여러 색상을 입혀서 완성된다.

자세히 보면 사람의 얼굴은 정면을 보지 않고 모두 비스듬하게 옆에서 본 방향에서 그려져 있다. 그림 위에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는데 자바섬에 힌두교가 융성할 당시에 사용되던 자바 섬의 궁중용어이다. 이는 발리섬 힌두교 왕족들의 근원이 바로 옆 거대한 섬, 자바섬의 왕족에서 왔기 때문이다.

스마라푸라 왕궁에서 왕이 의식을 거행하던 아름다운 전각이다.
▲ 발레 깜방 스마라푸라 왕궁에서 왕이 의식을 거행하던 아름다운 전각이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클룬쿵 왕조 재판정의 천장화를 흥미 있게 둘러본 우리들은 바로 옆의 궁전 건물, 발레 깜방(Bale Kambang)으로 향했다. 스마라푸라 왕궁의 무너진 왕궁지에서 크르따고사 외에 유일하게 남은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전각의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사면이 넓은 연못으로 시원스럽게 둘러싸여 있어서'물 위에 떠오른 궁전'이라고 불린다. 당시 클룬쿵의 왕족들은 이곳에서 왕실의 의식을 거행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열대의 나라에서 큰 연못 한복판에 자리한 발레 깜방은 사방이 툭 터진 클룬쿵 양식 건물이라서 내부가 상당히 시원하다.

다리를 건너는 여행자들을 보호하려는 듯 하다.
▲ 석상 다리를 건너는 여행자들을 보호하려는 듯 하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발레 깜방을 정문 앞에서 바라보면 정문의 좁은 틈 사이로 묘하게 발레 깜방 만이 시야에 들어온다. 연못을 건너는 다리에는 힌두교 신상들이 무릎을 구부리고 서서 긴장감을 연출하고 있다. 신상들은 연못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흡사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호위하고 있는 듯 하다. 자세히 보면 이 호위신상들은 전각 건물의 4면에 가득 배치되어서 결연한 자세로 전각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전각과 연못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먼 길을 와서 본 유적이 가치 있고 아름다우니 마음은 뿌듯하다.

아내는 나보다 더 앞장서서 전각 위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다.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뒤로 하고 전각에 먼저 올라서 전각 위의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발리 친구 아롬이 호기심 있게 전각의 화려한 회화를 둘러보는 아내에게 친절하게 발리의 신화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도 얼른 계단을 올라 전각에 들어서는데 천장과 이어지는 기둥의 조각들도 섬세하고 화려하다. 투각으로 장식한 금색과 녹색의 나무 기둥에서 꽃문양이 꿈틀거리며 마치 천장으로 올라가는 것 같다.

라마야나 신화의 전투도가 천장화를 장식하고 있다.
▲ 라마야나 신화 라마야나 신화의 전투도가 천장화를 장식하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발레 깜방의 천장에도 클룬쿵 양식의 천장화들이 한 가득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크르따고사와는 달리 힌두교 경전인 라마야나(Ramayana) 신화와 관련된 독특한 그림이 많다. 라마야나 신화에 나오는 전투도가 화려하게 천장의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 위쪽에는 힌두교의 신들과 상상의 동물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천장과 기둥 사이에는 상상의 새, 가루다(Garuda)가 입을 벌리고 날아오르려 하고 있다.

상상의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려 하고 있다.
▲ 가루다 상상의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려 하고 있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놀랍게도 천장이 온톤 천장화이다. 세밀하게 그려진 천장화 안에 담긴 의미를 모두 다 되새김질하려니 고개가 아프다. 나는 발리 친구 아롬의 설명을 찬찬히 듣고 다시 고개를 들어 천장화를 보았다. 천장화 속에는 당시 발리인들의 일상생활도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현대의 발리인들도 돼지고기를 가장 즐겨먹듯이, 천장화 속의 발리인들도 돼지를 잡아 고기를 굽고 칼로 음식을 조리해서 접시에 담고 있다. 그리고 천장화 속의 이들도 지금처럼 힌두교 사원에 음식을 바치고 복을 빌고 있다. 발리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종교 앞에 참으로 경건하다는 생각이 든다.

연못과 연못 위의 수련이 발레 깜방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 발레 깜방 연못 연못과 연못 위의 수련이 발레 깜방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 노시경

관련사진보기


발레 깜방을 둘러싼 진녹색 연못 위에서는 수련이 가득 피어 있다. 연꽃은 혼탁한 물위에 고고히 떠 있어서 더 고귀해 보인다. 연못과 연꽃이 있어서 발레 깜방과 천장화는 더 아름답게 빛난다. 연못의 작은 분수 물줄기는 청량감으로 우리를 달래고 있었다. 해는 계속 구름 뒤에 숨어 있었다. 구름 뒤에 숨은 해가 나오면 발리의 강더위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이 여행기는 2014년 6월19일~6월 24일의 인도네시아 발리 여행 기록입니다.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400 편이 있습니다.



태그:#인도네시아 여행, #발리, #크르따고사, #스마라푸라 왕궁, #발레 깜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