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내 동생 이름이 뭔 줄 알아요? 한별이요. 근데 넓은 세상에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하고 우리 엄마 밖에 없어. 아이가 죽는다는 건 그래서 억울한 거예요. 기억해 줄 사람이 너무 적어서, 죽어서 묻힐 수 있는 곳이 고작 엄마 가슴 밖에 없어서. 근데 누군가의 힘 때문에, 누군가의 욕심 때문에, 누군가의 무책임 때문에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이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면 그럼 너무 가엽잖아요."

드라마 <오만과 편견> 속 검사인 한열무(백진희 분)의 말이다. 어느덧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8개월이 지났다. 8개월이 지나면서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법도 통과되고 진도 앞바다의 수색작업도 중단되어 이젠 뉴스에서 세월호 보도는 찾아 보기가 힘들다.

"잊지 않고 함께 하겠다"던 국민들도 세월호를 잊어가고 있다. 때문에 유가족들의 마음은 한열무와 같지 않을까. 현재 유가족들은 서울 광화문에만 농성장을 남겨두었다. 광화문 농성장을 지켜온 세월호 희생자 고 이민우군의 아버지 이종철씨를 지난 15일 광화문 광장에서 만났다. 다음은 이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세월호 희생자 고 이민우군의 아버지 이종철씨
 세월호 희생자 고 이민우군의 아버지 이종철씨
ⓒ 이영광

관련사진보기


- 지난 12일 새누리당에서 특별조사위원으로 발표한 인사가 친박계거나 극우인사로 채워져 논란인데 어떻게 보세요?
"그래도 야당과 저희 쪽 진상조사 위원회 위원들이 제대로만 해준다면 어느 정도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까 싶어요. 정치적 이유에서인지 정부는 처음부터 세월호 사건을 해결할 마음이 없었어요. 하지만 저희들이 투쟁을 해서라도 더 알아낼 거예요."

- 하지만 그 사람들은 세월호에 대해 악의적으로 말해 왔는데요.
"정부에서 이렇게 나올 걸 저희도 뻔히 알고 있었어요. 위원장을 저희 쪽으로 하려고 했던 것도 그래서였어요. 다만 아쉬운 건 사무처장을 저희 쪽으로 못하고 넘긴 거예요. 그래도 저희는 이 일이 잘 해결될 수 있도록 국민들과 함께 지켜볼 수밖에 없죠. 국민의 힘을 보여줘서 최대한 끌어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 세월호 보도 횟수가 줄어들면서 국민들의 관심도가 낮아지는 것 같은데요.
"언론이야 처음부터 보도를 제대로 안했죠. 언론이 자본에 휘둘리다 보니까 속보를 띄우려는 마음에 대충 전화해서 '전원구조'라는 오보나 냈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언론을 믿지 않아요. 그래서 유가족들은 직접 언론인이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알리고 있어요. 전 국민을 만나서라도 진상조사가 다 될 때까지 저희가 알릴 겁니다. 그리고 국민들 마음 속에는 세월호가 있기 때문에 저희는 관심도가 떨어졌다고 생각 안해요. 날씨도 춥고 그들도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저희가 어떻게 해서든 국민들 마음 돌려서 잘해 나가는 수밖에 없죠.'

- 8개월이 지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유가족들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한데요. 
"당연히 유가족이 앞장서서 국민과 함께 해야죠. 부모는 자식이 왜 죽어야 했는지는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절대 타협도 없고 포기도 없어요.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우리는 포기 안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국민들 앞에 설 것이고 끝까지 국민과 함께 할 거예요. 물론 관심이 낮은 사람들도 계세요. 그것까지도 좋은데 저희를 뒤로 당기지만 않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갈 수 있는데 국민들이 뒤에서 당기면 가질 못하잖아요. 때문에 반대만 안하신다면 저희는 끝까지 갈 거니까 그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 수색 중단 후 범정부사고대책본부(아래 범대본)가 해체할 즈음 '인양 반대론'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어요. 인양 문제는 결론이 났나요?
"지금 정부는 '인양엔 돈이 많이 든다'고 포기한 상태잖아요. 때문에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진도에 나려가 지키면서 '인양해라'고 항의하는 거죠. 그 안에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저희들은 무조건 인양을 해야 하고 실종자 가족들도 배를 인양했을 경우에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인양을 원하죠. 그런 마음으로 진도를 지키고 있으니까 인양은 무조건 할 거예요."

- 청운동주민센터와 국회 농성장은 정리하고 이곳 광화문만 남았는데 이유가 있나요?
"저는 광화문 농성장이 생길 때부터 있었어요. 여기는 국민과 소통하기 가장 좋은 장소고 어느 누구도 함께 할 수 있는 곳이에요. 또 청와대도 가장 가까워서 눈엣가시 같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로서는 가장 압박하기 좋은 장소가 이곳이지 싶어요. 그래서 저희가 이곳으로 왔고 마지막으로 남겨둔 곳도 이곳입니다.

청운동동사무소 같은 경우에는 청와대 옆에 있긴 하지만 거기서 딱히 할 게 없어요. 매일 청와대 가서 면담 요청해야 들어주지도 않고 대통령은 쳐다도 안 볼 거예요. 그러느니 아예 국민과 함께 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으로 나와서 유지하는 거죠. 국회 농성장은 닫힌 공간이기 때문에 어느 누가 찾아와서 방송을 해줄 리도 없어요. 또 국민들이 같이 모여 있을 수도 없는 자리여서 가장 좋은 자리인 여기로 옮긴 거죠."

- 광화문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150여 일이 되었어요. 광화문에 상주하면서 사람들도 많이 만났을 텐데 반응은 어떤가요?
"여기 오시면 많이 아파하시죠. 저희들이 항상 있어서 간담회도 하기 때문에 광화문광장은 다른 데서 만나는 것과 차이가 있어요. 여기에 오면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고 저희가 왜 이렇게 하는지도 아시게 돼요. 그러다 보면 너무 아파 하시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이 자원봉사를 아주 많이 하세요. 저희들보다도 더 아파하고 열심히 하시기 때문에 반응 자체는 뜨겁고 좋아요."

-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몇몇 자원봉사자들 중에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 두셨어요. 저희들이야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여기 있지만 그 분들은 생계까지 그만두고 여기 나오셔서 저희보다 더 열심히 하시거든요. 어떤 때 보면 너무 가슴 아프고 우리나라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게 슬프죠. 그분들에겐 너무 감사해요."

- 일부는 '광화문 광장은 시민들의 것인데 유가족이 점거해서 불편을 주냐'고도 하던데.
"말같지도 않은 소리입니다. 우리가 점거를 한 것도 아니고 불편을 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아이를 잃은 슬픔과 억울함을 호소하러 왔습니다. 여기에서 문화제를 열고 시민들과 함께하면서 이 정부가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줬다고 생각합니다."

-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와 충돌도 간혹 있는 것 같은데.
"어버이연합분들이 나이가 많으시더라고요. 예전 같았다면 저희를 비판하니까 무조건 싸우라고 했을 것 같은데 아품을 겪다 보니까 그사람들이 너무 안 돼 보이는 거예요. 그들도 이 시대가 낳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잖아요. 그들도 빨리 치료해 줘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일간 베스트 회원들은 20살 정도로 우리 아이들보다 두 살 많은데 그들 역시 시대가 낳은 아픔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치료해 줘야 해요. 그 사람들도 우리나라 국민이잖아요. 저희는 안전한 나라에서 다같이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 마음을 가진 저희가 어떻게 그들을 적으로만 보겠어요. 그들도 치료해 줘야 할 환자라고 생각해요."

- 농성장 유지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만만치 않습니다만 가족대책위와 국민대책회의, 시민들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 언제까지 유지하실 거예요?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자 합니다. 유가족들이 최종 결정하기 전까지는 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겠습니다."

- 민우는 어떤 아이였나요?
"인터뷰하다 보면 민우를 묻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직장생활 하는 아버지들 같은 경우는 애가 잘 때 나가서 잘 때 들어와요. 때문에 뭐했나 싶을 정도로 18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너무 기억이 없어요. 너무 그게 안타까워요. 중간중간 생각 나는 것이라곤, 저희 아버지가 배를 해서 민우가 시골에서 1년 동안 살면서 아침 5시에 일어났어요. 이번 세월호 사건 있고 나서 처음엔 무조건 나올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아침 5시에 일어나 할아버지에게 가면 눈깔 사탕 등을 주어서 얘가 길들여져 있었어요. 그래서 5시면 무조건 일어나요. 부지런했거든요. 그래서 세월호가 넘어갈 때면 놀 시간이니까요. 그리고 추위에 강해서 최소 3일 정도는 버텨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수온에서는 두시간 이상 못 산다고 하더라고요. 또 에어포켓 자체도 없었고....."

- '그 수온에서는 2시간 이상 못 산다고 하더라'고 하셨지만 다른 부모님들 얘기를 들으면 아이들이 며칠 지나서 죽은 것 같다라고 하시던데.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아이가 나오기 전까지는 살아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우리 아이는 무조건 살아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

- 수학여행 가기 전 얘기 좀 해주세요.
"가기 전에 저희 아이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어요. 저 같은 경우는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시골에서 지내고 주말이나 한 달에 한 번씩 안산에 올라왔는데 3월 중순 즈음 민우에게 '시골 내려가서 아빠랑 살면 안 될까?'라고 전화가 왔어요. 그런데 상황이 안 되니까 졸업하면 같이 있자 했어요. 다른 아이들 얘기를 들어보면 수학여행 가기 전 한 달 동안 슬픈 음악만 듣는다든지 했대요. 아이들이 몸으로는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얘기 듣고 너무 많이 울었어요."

- 사고 소식은 어떻게 들었어요?
"시골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민우 다니는 학교 아니냐'고 깨우셔서 알았어요. 저는 단원고로 바로 올라와서 아침 7시까지 있으면서 진도쪽 병원들에 전화를 해보는데도 '아직 확실한 게 나오지 않았다. 기다려 보라'해서 기다리다 7시쯤 제 차 운전해서 진도로 내려갔죠."

- 민우는 언제 나왔어요?
"22일 아침 6시 43분에 인근 해역 바지선 옆에서 떠올랐어요. 떠올랐는데도 나중에 국회에서 진상조사위 TF가 꾸려지고 진도에 가 브리핑 하는데 해경에서는 '구조'로 되어 있더라고요. 당시 남학생 둘 여학생 둘 해서 네 명이 나왔는데 그랬어요.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어서 그런 것까지 감추고... 4월 22일부터 5월 16일까지 시체 부양이 2구로 되어 있는데 22~23일까지 72구로 돼 있어요. 그런데 그게 다이버가 들어가서 꺼내올 수 없는 숫자거든요. 해경 일지를 보니 그날 다이버들이 잠수를 안했어요."

- 지금 가장 힘든 건 뭐예요?
"날씨도 춥고 광화문광장에 국민들도 덜 오시니까 사실 '이러다 국민들에게 잊혀지는 건 아닐까' 두렵기도 해요. 그래서 그 외에 힘든 건 없고 여기서 5개월 이상 살다 보니까 모든게 적응되어 상관 없을 것 같아요. 다 괜찮아요."

- 생계는 어떻게 하나요?
"생계는 포기한 상태입니다. "

- 어느덧 한해를 정리하는 12월입니다. 가족들에게 2014년은 다시 떠올리기 싫은 시간이었을 것 같은데.
"제가 2014년을 생각하기 싫다고 해서 생각이 안나는 것도 아니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2014년은 항상 제 머리 속에 있어야 해요. 2014년 4월 16일은 죽을 때까지 가슴속에 기억을 해야죠."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시면 해주세요.
"저희 힘만으로는 부족해요. 유가족만의 일이 아니고 국민 전체의 일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함께 나오셔서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2014년 4월 16일을 잊지 않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이같은 일이 없어야 하고 일어나서도 안 됩니다. 국민들께 부탁드리는 건 함께 해 주시고 잊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영광 시민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영광의 언론, 그리고 방송이야기'(http://blog.daum.net/lightsorikwan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민으, #이종철, #세월호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와 이영광의 '온에어'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