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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그 날, 그녀는 마치 내가 돌아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만나자는 이야기에 겨우 대답을 한 그녀의 목소리는 공중전화에 동전을 밀어 넣는 것보다도 더 낯설었다.

눈바람이 휘날리는 날, 커다란 배낭을 두 개나 맨 채 옛 추억이 깃든 동네를 서성이다 쳐다보는 시선이 뜸해질 늦은 밤, 겨우 마주친 그녀는 기어이 이별을 토해냈다. 순간 어두운 밤바다에 몸이 내팽겨쳐지는 상상을 했다.

그 공포감 때문인지, 내 몸은 움직이지도 눈물을 쏟아내지도 못했다. 이제 그만하자고 한들, 쉽게 버릴 수 있는 마음이던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기이한 신음소리만이 가까스로 흘러나왔다.

마치 어제까지 누군가 있었던 것처럼 잘 정돈되어 있던 방과, 그리다 만 세계지도.
 마치 어제까지 누군가 있었던 것처럼 잘 정돈되어 있던 방과, 그리다 만 세계지도.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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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른 채 들어선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세계지도에는, 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된 지난 7개월의 여행이 칠해져 있었다. 내가 기뻤던 일, 슬펐던 일이 고스란히 그려진 그 지도는 중앙 아메리카의 어딘가에서 멈추었다. 그때가 아마, 해를 막 넘기고 외로움에 지쳐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던 즈음이다. 참았던 눈물이 그제야 쏟아져 나왔다. 당신은 외로웠을까. 그리다가 멈춰 서고, 다시 그리다가 멈춰 서는 당신. 뼛속까지 외로웠을까.

눈이 많이 오면 밖을 향해 그저 고개를 돌리면 되었고, 외로울 때면 그리운 이에게 쓸 엽서 한 장 집어 들면 되었지만, 더 이상 그녀가 오지 않는 건 도무지 황망한 노릇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수백의 도시를 휘젓고 다니던 나는 정작 집으로 돌아와서는 길을 잃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아졌고(어차피 할 일도 없었다) 예전보다 눈물이 부쩍 많아졌다. 나의 귀국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지인들은 내가 지나쳐 온 그 무수한 모험담보다도 '그녀'의 소식을 더 궁금해 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단 한 마디의 말은 '잘 다녀왔어'였지만, 내가 들었던 대부분의 말은 '그럴 줄 알았다'였다. 그들은 호기롭게 사표를 던지고 세계일주를 떠났다 돌아온 사람이, 눈물 어린 밤을 지새우고 있다는 말에 역으로 위안을 얻는 듯 보였다. 그렇게 지난 7개월간을 뒹굴고 사랑하고 울었던 세상과의 추억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그 순간이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가 소중하지 않아서 떠난 것은 아니었다.

세계일주 후 죽음을 생각하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더니 같은 해 5월, 여행에서 돌아온 지 석 달째에 나는 전세 집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여행을 하던 도중에 벌어진 일이지만, 신탁경매사건에 휘말려 법정다툼까지 갔던 그 일은, 결국 변호사 선임료라는 빚만 남긴 채 패소로 막을 내렸다(관련기사 : "이 집 전세계약 사기래" 7천만원 날리고 쫓겨났습니다).

전 재산까지 날리고 고향에 내려갔을 때, 부모님은 다 큰 아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어 하셨다. 찜질방을 전전하던 그 즈음, 나는 한동안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하루 종일 잊어도 생각이 났고, 나는 내가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도,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이야기도, 남의 물건을 훔쳐서 가지고 있는 좀도둑마냥 감히 드러내지 못했다. 그것은 누가 내 마음을 몰라주는 답답함이 아니라 누가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더 외롭고 목이 마른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사람들이 말하던 '무모한 여행' 때문인 것만 같았다.

정말로 심각하게 죽음을 생각했다. 거창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로 아슬아슬한 시점까지 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슬아슬한 끝자락까지 가서 안을 들여다본 그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이 궁색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당신은요? 하고 말이다.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일깨워 준 세계일주

결국 <오마이뉴스>에 ' 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라는 이름으로 첫 회가 나갔을 때, 수없이 많은 비난과 악성 댓글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뻤다. 누군가는 박수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내 지난날이 그렇게 바깥으로 튀어나왔다는 사실이 기뻤다.

연락이 뜸했던 지인, 친구, 선후배들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나는 그 중 한 친구의 집에 거처를 정했다. 기사에 등장한 장소를 여행했던 사람들, 그곳에 사는 현지인, 여행을 가고 싶은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즈음 나의 특이한 이력을 눈 여겨 보았다는 회사에 취업을 했다. 요컨대 나와 전 세계 스물네 개의 나라는 어떻게든 이어져 있는 것이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어느 카페에서 한 달간 진행되었던 '우연히 세계일주' 사진전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어느 카페에서 한 달간 진행되었던 '우연히 세계일주' 사진전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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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사진전도 열었다. 그동안 내 이야기를 들었던 몇몇 사람들이 여행을 떠났고 나에게 엽서를 보내왔다. 다시 시작한 회사 일은 썩 즐거웠다. 나는 분명히 예전과 같은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즐겁게 일을 해 나갔다.

2014년 2월, 법원으로부터 편지가 날아들었다. 경매가 종료되어 배분을 하니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잃었던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은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꼭 1년째가 되던 그 날, 함께 추억할 것이 아무것도 없던 내 지난 날에게 그제야 순수한 마음으로 감사할 수 있었다. 그것이 결국 너무도 쓸쓸해서 가슴을 치게 되는 회한의 기억일지라도 먼 훗날의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 여행은 삶의 구심점을 찾게 도와주고 견문을 넓혀주며, 많은 것들에 도전하게 해준다.
▲ 7개월간 뒹굴고, 사랑하고, 울었던 세상 ? 여행은 삶의 구심점을 찾게 도와주고 견문을 넓혀주며, 많은 것들에 도전하게 해준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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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수많은 나라를 거치면서 크고 작은 세상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았다. 비서에 운전기사까지 대동하며 여행하던 멕시코의 한 노부부도, 황량한 모래사막에서 바게트 빵으로 끼니를 때우던 유학생도, 모두 각자의 고민과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산다. 그런 세상을 한 바퀴 돌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더 나은 것을 찾지 않는 것'이다.

그 혹독하고 긴 과정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버리는 법'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지고 산다. 필요 없거나 나쁜 것들을 하나씩 비우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긴 여행을 떠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잊혀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더 길고 긴 여행을 떠날수록 여행은 삶에 애착을 갖게 할 것이다.

 어찌 보면 내가 세계일주를 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엄마찾아 삼만리를 즐겨보던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어찌 보면 내가 세계일주를 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엄마찾아 삼만리를 즐겨보던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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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 문명을 거슬러 오래도록 간직되어온 푸른 세상, 골목에서 마주친 아이들 덕에 길을 걷는 내내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고 다녀야 했던 수많은 도시들,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기웃거리면 그만이었던 동화 속 나라 같은 시간여행.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순간에도 그런 신비로운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감사하고 소중했던 시간들. 배꼽 잡게 웃을 일도, 눈물 쏙 빠지게 아픈 일도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내 삶에 더 애착을 가지게 만든다.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 그 의미가 이 긴 여행이 가져다 준 짐이자 축복이다.

어쩌면 미래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뭔가 확신이 필요한 그 순간에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펼쳐진 여행 책을 보게 되었고, 그 순간 나의 미래가 결정되었다. 무려 7개월의 일요일을 만들겠다던 나를 두고 미쳤다고 했던 사람들은 이제는 고작 7개월로 무슨 세계일주냐며 나를 타박한다.

그러니 괜찮다. 방향타도 없이 떠밀려 가는 듯이 빠르기만 한 삶을 벗어나고 싶을 때, 새로운 길을 가기에는 늦은 것 같고 그냥 가던 길을 가기에는 왠지 억울할 순간, 방황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세상을 벗어나 '고작 7개월' 즈음, 길을 잃고 헤매어 봐도 괜찮다. 아직 당신의 심장이 뛴다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그 동안 '사표쓰고떠난세계일주'를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7개월의 여행기를 털어놓는 데 1년이 더 걸렸네요. 여러분들의 응원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제 글이 왜 인생이 여행에 비유되는지, 우리가 우리의 인생 어디쯤에서 미소 짓고 울음을 삼키며 여행하고 있는지를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또 어디서 어떤 식으로든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태그:#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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