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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앞에 있는 삼도. 무인도 세 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삼도라 한다.
 송도 앞에 있는 삼도. 무인도 세 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삼도라 한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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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도로를 두고 왜 험한 뱃길로 가냐고 했다. 차타면 금방인데 왜 배를 탔냐고 했다. 하기야 요즘 신안군 송도까지 배를 타고 드나드는 이들은 조업하는 어민들이나 병풍도 등 근처 섬사람들뿐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증도까지 이어진 도로를 타고 송도를 찾는다. 자동차로 목포에서 송도까지는 천천히 가도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서울역에서 자동차로 출발해도 약 4시간이면 송도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니 압해도 송공항에서 아침 6시에 첫배를 타서 오전 7시 10여 분 경에 병풍도에 도착했다가, 다시 병풍도에서 오전 9시 50분 경에 출항하는 배를 타고 송도로 오는 여정을 어느 섬사람이 이해하겠는가. 한 시간 안팎이면 족할 소요시간이 네 시간이 넘게 걸렸다. 배 타는 것이 오살 맞게 지겨운 섬사람들이 봤을 때 이것은 분명 미친 짓이었다.

일반여객선으로 다섯 시간 이상, 쾌속선으로 두 시간을 달려야 이를 수 있는 절해고도에서 나고 자란 탓일까. 아무리 연육이 되어 섬 같지 않은 섬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섬에 쉽게 가고 싶지 않았다. 차가 아니고 배로 갈 수 있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가급적 배를 타고 가고 싶다는 생각에 억지 아닌 억지를 부린 것이다.

여객선이 무인도 세 개로 이어진 삼도(三島)를 지나 송도에 닿는다. 송도는 말 그대로 '솔섬'이다. 그러나 지금은 솔보다 수산물 거래가 이뤄지는 '위판장'으로 더 유명하다. 병어, 민어, 새우젓갈 등이 송도위판장의 대표 선수들이다.

병어, 민어, 새우젓갈... '송도 위판장 대표 선수'

송도위판장은 병어, 민어, 새우젓으로 유명하다. 덩치 큰 민어를 말리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송도위판장은 병어, 민어, 새우젓으로 유명하다. 덩치 큰 민어를 말리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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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엔 병어 축제가 열리고, 7~8월엔 여름 보양식으로 사람들이 즐겨 찾는 횟감인 민어가 전국으로 팔려간다. 겨울엔 말린 민어가 많이 거래되는데 여기저기 덩치 큰 민어를 말리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한국 전통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양념 구실을 하는 새우젓갈을 구하러 사람들은 사시사철 송도위판장을 찾는다. 송도 인근의 임자도 등에서 민어가 잘 잡히는 이유는 민어가 새우를 좋아해 새우어장을 쫓아다니기 때문이다. 민어가 많다는 것은 곧 새우어장이 풍성하다는 얘기다.

젓갈 담글 때 쓰는 새우를 '젓새우'라 한다. 새우로 담근 젓갈은 담근 시기에 따라 달리 불린다. 봄에 담그는 새우젓갈을 봄 춘(春)자를 써 '춘젓'이라 하고, 음력 오월에 담그는 젓갈은 '오젓', 음력 유월에 담그는 젓갈은 '육젓', 가을에 담그는 것은 가을 추(秋)를 써서 '추젓'이라 한다. 이 중 육젓을 최고로 치는데 산란 전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이라 씨알이 굵고 살이 뽀얗기 때문이다.

새우어장에서 거둬온 짐들을 정리하는 어선 두 척이 드나드는 것 말고는 평일 오전 송도는 한산했다. 그런데 위판장 바로 앞에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유명한 홍어장수 문순득의 동상이다. 송도 사람이 아닌 우이도 사람 문순득의 동상을 송도위판장 앞에 세운 까닭은 그가 요즘으로 치면 중간상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순득(文淳得, 1777-1847)은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서 영산포에 내다파는 중간상인이었다. 1801년 12월, 문순득은 흑산도 남쪽에 있는 태사도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어느 날 운명처럼 시작된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는 1805년 1월 8일 고향에 돌아오기까지 만 3년 2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가 표류해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유구국(琉球國), 지금의 오키나와다.

우이도 사람 문순득의 동상이 송도에 서 있다. 홍어장수였던 그의 생애와 수산물을 위판하는 송도위판장이 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우이도 사람 문순득의 동상이 송도에 서 있다. 홍어장수였던 그의 생애와 수산물을 위판하는 송도위판장이 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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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득의 생사를 넘나드는 표류기

오키나와에서 8개월을 지낸 문순득은 중국을 거쳐 귀국하기 위해 1802년 10월 7일 출항하지만 다시 풍랑을 만나 표류하고 만다. 그렇게 파도에 밀려 도착한 곳이 여송(呂宋), 지금의 필리핀이다. 필리핀에서 9개월 이상을 머물던 문순득은 해류 때를 잘 살펴 천신만고 끝에 마카오 등지를 거쳐 중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국에 도착했다는 것은 육로를 통한 안정적인 귀로가 확보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순득의 드라마 같은 표류기를 정리해서 기록한 책이 있는데 <표해시말>이다. 흑산도와 우이도 등지에서 유배를 살았던 손암 정약전이 문순득의 구술을 정리해 기록했고, 이를 다시 그의 제자 이강회가 보완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엔 112개의 우리말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각각 오키나와어, 필리핀어로 번역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문순득이 정리한 것이다. 이는 홍어장수 문순득이 표류 기간 동안 중국어와 오키나와어, 필리핀어를 어느 정도 습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순조 7년(1807년) 8월, 제주목사 한정운은 제주에 표류했던 이들을 필리핀으로 송환시켜 달라고 임금에게 편지를 쓴다. 제주도에 표류한 이들이 필리핀 사람임을 밝혀낸 것은 문순득의 통역을 통해서였다. '홍어장수 문순득'이 '동시통역사 문순득'으로 활약한 것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표류의 순간에도 문순득은 상인으로서의 현실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표류해서 흘러간 이국이었지만 그는 그 나라의 언어와 풍습, 문화를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당시 조선의 시대정신이었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문순득의 표류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문순득은 절망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낯섦을 오히려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삼았다. 문순득은 긍정적이고, 긍정적이고 한없이 긍정적이었다. 한없는 긍정이 문순득을 살아남을 수 있게 했고, 그를 일개 홍어장수가 아닌 세상에 이바지하는 사람으로 운명을 바꿔버렸다. 그것은 모두 '국제 플랫폼' 구실을 했던 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송도항과 송도위판장 전경.
 송도항과 송도위판장 전경.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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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안군 작은섬, #홍어, #오키나와, #문순득,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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