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이 흔들리는 시대에 자신의 말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현 정부도 '증세 없는 복지 확대'를 공약(公約)했지만 공약(空約)이 돼버린 지 오래다. 차마 증세란 말도 못하고 국민건강 증진 꼼수로 세수 확대에 나서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 주소다.

취임 기자회견(9월 8일)을 한 지 불과 145일 만에 자신의 대국민 약속을 지킨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슈틸리케 감독과는 대조적이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대표팀의 충격적인 2014 월드컵 예선 탈락 직후 긴급 구원투수로 한국 대표팀을 맡았다. 그로부터 불과 145일. 한국에 27년 만의 준우승컵을 안기면서 그는 호주 언론이 선정한 2015 호주 아시안컵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됐다. 슈틸리케 감독의 비결은 뭘까? 부임 당시 기자화견에 다 있었다. 부임 당시 첫 기자회견 내용과 슈틸리케 감독의 성과를 비교해 보자.

"최대한 결과를 뽑는 게 감독의 능력이다. 어떻게 이끌고, 부족한 선수들을 어떻게 올리는지가 더 중요하다."

골키퍼 김진현은 아시안컵에서 무려 4경기 390분 동안 무실점 '짠물 수비'로 아시아 최고 수문장 반열에 올랐다. 슈틸리케 감독 부임 이전까지만 해도 '거미손' 김진현은 후보 선수에 불과했다. 지난해 열린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인천 아시안게임에도 나서지 않았다. 왼쪽 풀백 김진수는 '포스트 이영표'라는 수식어와 함께 왼쪽 측면을 담당할 적임자로 급부상했다.

'군데렐라.' 무명 선수였던 이정협이 호주 아시안컵에서 2골로 얻은 별명이다. 당초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정협이 향후 한국의 최전방을 이끌어갈 차세대 공격수로 주목받게 됐다. 공격수 이정협은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K리그를 유심히 보는 팬들이 아닌 이상 이름조차 몰랐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이 이정협의 대표팀 발탁에 깜짝 놀랐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김진현, 김진수, 이정협의 공통점은 아시안컵 이전까지 모두 주목을 받지 못했던 선수들이란 점이다. 취임 기자회견 당시 슈틸리케가 말했던 선수들의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끌어 올리는지가 중요하단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브라질 월드컵서 알제리에 지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부분이 부족했다. 어려운 결과를 어떻게 극복할지를 잘 준비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호주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축구 팬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전반 45분 선제 실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 종료 불과 2분을 남겨놓고 기어이 극적인 만회골을 터뜨렸다. 이 득점은 한국 아시안컵 통산 100호골이 됐다. 슈틸리케 감독의 파격적인 용병술 덕분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0-1로 뒤지던 후반전에 박주호와 남태희 대신 이근호와 한국영을 교체 투입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던 기성용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섰다. 경기 상황은 달라졌다. 호주의 선제골로 어려운 상황에서 후반 종료 직전 곽태휘의 헤딩 경합에서 시작된 볼이 한국영에게 이어진 것이다. 한국영이 기성용에게 패스한 볼이 그대로 손흥민의 왼발 슈팅으로 연결돼 호주의 골망을 흔들었다. 기적적인 동점골이었다.

위기의 순간은 이번만이 아니다. 아시안컵 조별예선리그 A조 2차전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한국은 불안한 경기력을 보였다. 한국 수비의 핵인 이청용과 구자철의 부상으로 주전 선수들이 아시안컵 출전 명단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플랜 B를 실험했던 쿠웨이트전에서 슈틸리케 감독은 "우리는 더 이상 우승후보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어려운 결과를 어떻게 극복할지 잘 준비하면 도움이 될 거란 말은 바로 다음 호주와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 현실이 됐다. 전반부터 선제골을 넣으며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호주 아시안컵 조별예선리그 A조 최종전에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유력 우승 후보이자 개최국인 호주를 상대로 1대0, 무실점 승리를 거뒀다. 한국은 조별 예선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한 경기의 스타일만으로 성공할 것이라 보지 않는다. 경기가 끝나고 점유율이 몇인지 패스 몇 번했는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큰 경기도 뛰어봤다. 유럽챔피언스리그 등 어려운 경기 뛰었다. 기대치가 높다. 승리가 중요하다. 어떤 날에는 티키타카가 승리의 요인이 될 수 있고, 어느 날에는 공중볼이 중요하다. 이기는 경기를 해야 하는게 중요하다."

슈틸리케 감독은 취임 이후 단 한 번도 똑같은 스타일로 경기를 선보인 적이 없다. 4-2-3-1, 4-1-4-1. 4-4-2 등 여러 포메이션을 실험했다. 명확한 원톱을 두면서 스트라이커까지 가세한 투톱으로 승리를 거머쥐거나 측면 포함 전방의 공격수가 자리를 바꾸는 제로톱 전술도 활용했다.

심지어는 경기 도중에 전술이 바꼈다. 우즈벡과의 8강전 경기에서 슈틸리케 감독은 후반 25분 먼저 김창수를 빼고 차두리를 넣어 경기 스타일의 변화를 주문했다. 지친 상대 수비수를 상대로 후반전에 차두리를 내세워 오른쪽 측면 돌파를 노린 것이다. 81%의 패스 성공률을 자랑하는 기성용은 전략에 따라 공격수와 수비수를 오갔다. 슈틸리케의 다양한 전략은 최장 기간 무실점 승리란 새 역사를 쓰는 데 큰 힘이 됐다.

단 한 번도 똑같은 스타일로 경기를 한 적이 없는 슈틸리케의 경기 방식에 축구 팬들이 붙인 별명이 있다. 바로 '늪축구'다. '늪축구'는 늪에 빠진 것처럼 상대를 허우적거리게 한단 뜻이다. 특히 쿠웨이트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보인 플랜B에서 '늪축구'가 회자됐다. 화려한 경기력을 펼치지 못한 경기에 실망감을 드러낸 표현이었다.

호주와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 플랜 B를 폐기하고 이정협을 최전방 공격수로 내세우는 새전략을 펼쳤다. 한국은 1-0으로 승리, 무실점으로 3연승으로 8강에 오르자 '늪축구'는 실리를 추구한다는 뜻의 '실학 축구'란 별명으로 변했다. 한국을 만나면 상대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늪에 빠진 듯 묶인단 의미로 '늪축구'를 사용한 것이다. 대표팀이 한 골씩만 넣으며 연승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자 축구팬들은 아슬아슬하지만 다양한 전술로 결국엔 승리로 이끄는 축구를 구사한단 것이다.

"한국이 축구 강국으로 갈 수 있는 희망이 없었으면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수 경험 상 22~23세는 잘하는 축구를 했고, 26~27세 때는 더 나은 축구를 했다. 어린 시절에는 무의식 중에 했고 나이 들면 생각하는 축구를 했다. 독일 대표팀과 비교하면 2006, 2010년은 강하지 않았다. 같은 구성으로 했는데 8년 뒤 우승했다. 경험이 큰 역할 했다."

차두리는 애초 작년을 마지막으로 태극마크를 반납하려 했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의 요청으로 이번 대회까지 뛰기로 결심했다. 차두리는 만 34세의 나이로 은퇴를 염두해 두고 이번 호주 아시안컵에 출전했다. 슈틸리케가 취임 기자회견에서 한 말에 따르면 차두리의 나이는 '더 나은 축구를 할 나이'인 셈이다.

그런 차두리가 아시안컵에서 최고령자임에도 불구하고 전성기 못지않은 실력을 보였다. 차두리는 쿠웨이트전에서 맹렬한 돌파에 이은 오버래핑으로 남태희의 선제골에 일조하면서 '차미네이터'란 별명도 얻었다. 지난 22일 우즈벡과 아시안컵 8강전에서도 무려 70m의 거리를 단독 드리블로 질주하며 상대 진영을 뚫고 손흥민에게 찬스골의 기회를 제공했다.

결승전에서도 차두리의 활약은 변함이 없었다. 이날 전후반 90분을 지나 연장전까지 120분 풀타임을 뛰며 자신의 마지막 경기를 불태웠다. 슈틸리케의 말대로 차두리는 은퇴를 앞둔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점점 성장하는 축구를 보여줬다.

"아직 협회와 결정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수석코치 카를로스 아르모아와 함께 6년간 함께 했다. 다른 감독은 4~5명의 스태프를 대동하지만 2~3명의 한국 코치만을 요청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카를로스 아르모아 수석코치 외에 국내 코치를 선임했다. 신태용 코치와 함께 박건하 코치, 김봉수 골키퍼 코치다. 신태용 코치는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감독 대행을 지냈다. 이렇게 취임 145일이 지난 슈틸리케 감독은 말의 무게를 몸소 보여주며 27년 만에 호주아시안컵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설레발 없는 슈틸리케의 묵묵한 말 한마디가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어질 수 있단 점은 오늘날 현 정치권에서 다시 새겨볼 만한 일이다.

"외국인이 오면 편견이 있다. 대부분 돈이나 명예 때문에 다른 나라에 온다. 나는 매경기 이길 것이라 약속할 수 없다. 하지만 경험을 토대로 열심히 할 것을 약속한다."

슈틸리케 감독의 말이 경기 전 이기겠단 약속을 하는 그 어떤 말보다 신뢰를 준다. 이행 불가능한 공약을 하기에 앞서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현실을 정확하게 털어 놓는 것이다. 말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있는 오늘날 슈틸리케 감독의 말의 무게가 승리보다 더한 묵직한 감동을 선사한다.

슈틸리케 감독 취임 145일 전적

2014년 10월 10일 파라과이전 2 :0 승리
2014년 10월 14일 코스타리카전 1 : 3 패배
2014년 11월 14일 요르단전 1 :0 승리
2014년 11월 18일 이란전 0 : 1 패배
2015년 1월 4일 사우디아라비아전 2 :0 승리
2015년 1월 10일 2015년 AFC 아시안컵 조별 예선 오만전 1 : 0 승리
2015년 1월 13일 2015년 AFC 아시안컵 조별 예선 쿠웨이트전 1 : 0 승리
2015년 1월 17일 2015년 AFC 아시안컵 조별 예선 호주전 1 : 0 승리
2015년 1월 22일 2015년 AFC 아시안컵 8강 토너먼트 우즈벡전 2 : 0 승리
2015년 1월 26일 2015년 AFC 아시안컵 4강 토너먼트 이라크전 2 : 0 승리
2015년 1월 26일 2015년 AFC 아시안컵 2강 토너먼트 호주전 2 : 1 패배

[2015년 1월 31일 현재 통산 11전 8승 3패 14득점 6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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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 취임 기자회견 호주 아시안컵 슈틸리케 공약 구원투수 말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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