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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을 잠깐 다녀온 사이 처형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분위기 좋았는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난 아내에게 눈짓을 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명절마다 엄마 고생한 게 생각난다고 울고 있어.'

장모님, 처남댁, 처형과 처제의 가족들이 모여서 밀린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 저녁식사는 2시간을 넘기고 2차로 처남집에서 다시 모였다. 이렇게라도 대한민국의 여성들이 편히 지낼 곳이 있다면 스트레스 해소에 그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 설 저녁에 친정에 모인 가족들 장모님, 처남댁, 처형과 처제의 가족들이 모여서 밀린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 저녁식사는 2시간을 넘기고 2차로 처남집에서 다시 모였다. 이렇게라도 대한민국의 여성들이 편히 지낼 곳이 있다면 스트레스 해소에 그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 김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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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애애한 술자리 갑자기 울먹이는 처형

​옆에서 처제와 작은 동서가 토닥거리며 물 한 잔을 갖다 준다. 처형은 멈추지 않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내고 있다. 장모님까지 오셔서 위로하고 계신다. 우리는 지난 설 저녁(19일) 처가에서 저녁식사 후 처남 집에서 2차로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런데 내가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처형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난 엄마​가 힘들 거라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몰랐어. 시아버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이제는 거의 손 놓으셨어. 형님도 음식 만드는 걸 잘 몰라. 아버님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명절인데 너무 힘든 거야. 스트레스도 장난 아니고. 근데 엄마는 40년을 그래왔잖아. 엄마가 너무 불쌍해."

장모님도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으신다. 갑작스러운 첫째 ​딸의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어지신 거다. 아내와 처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몰라 그저 쳐다보고만 있다.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고 생활력이 강했던 처형은 직장생활하며 번 돈을 모두 가족에게 썼다. 찢어지게 힘든 가정에 첫째 딸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번 돈은 엄마와 아빠에게 동생들에게 다 빠져나가고 정작 본인의 취미생활이나 결혼 준비에는 신경을 많이 못썼다. 결혼하기 전 장인어른에게 가게 하나 차리라고 제법 큰돈을 쾌척하고 출가외인이 되었다. 처형은 친정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 자체였다.

그러다 결혼 후 수도권으로 이사하고, 야심차게 추진했던 일들이 틀어지고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웠다. 힘들다는 내색도 못하고 아내로, 엄마로, 명절에는 며느리로 살아왔던 날들이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첫 명절을 맞아 깊은 회한에 잠긴 것 같았다.

대한민국의 딸은 누군가의 며느리로 산다​

처형은 현재 딸 하나를 키우고 있다. 경기도 용인에서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며 설이나 추석이 되면 전날 밤 대전의 시댁에 내려와 제사음식을 만든다. 올해는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손위 형님이 계시지만 ​거의 음식 준비는 처형이 한단다. 저녁부터 다음날 오후까지 제사음식을 만들고 설 아침 차례가 끝나면 설거지에 남은 음식 뒤치다꺼리까지. 몸도 맘도 지쳤나 보다. 처형에게는 대한민국의 모든 며느리들이 그렇듯이 시댁의 제사가 끝나고 나면 친정으로 향하는 것이 명절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낙일 것이다.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명절에 빠질 수 없는 야채 무침. 한 그릇에 담긴  이 음식은 서로의 맛을 떨어뜨리지 않고 색감의 조화를 이룬다. 대한민국의 딸로, 어머니로, 며느리로 사는 것이 너무 힘에 겨운 일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처형의 눈물을 보며 이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로 인해 이득을 보는 대상이 무얼까, 과연 이득을 보는 대상이 있기는 한 걸까? 생각도 해 본다.
▲ 고사리 시금치 숙주나물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명절에 빠질 수 없는 야채 무침. 한 그릇에 담긴 이 음식은 서로의 맛을 떨어뜨리지 않고 색감의 조화를 이룬다. 대한민국의 딸로, 어머니로, 며느리로 사는 것이 너무 힘에 겨운 일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처형의 눈물을 보며 이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로 인해 이득을 보는 대상이 무얼까, 과연 이득을 보는 대상이 있기는 한 걸까? 생각도 해 본다.
ⓒ 김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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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의 부유한 집안에 막내딸로 태어나 부족함없이 살아오신 장모님. 무주에 계시던 장인어른과 결혼을 하셨고, 현재 연세는 60대 중반이다. 20대 초반에 시집와서 40년간을 집안의 큰 며느리로 온갖 제사와 집안 대소사를 다 치러 오셨다.

이제는 가족이 많지 않다. 장인어른과 장모님 그리고 결혼한 막내아들 세 식구가 전부이고 출가한 딸이 셋이다. 장모님은 당신 댁 제사가 끝나면 명절 오후에 처가를 찾는 딸들과 사위 세 식구를 위해 또 다른 음식을 장만하신다.

사위 사랑은 장모사랑이라고 했다. 나도 처가에 가면 끊이지 않는 음식 공세에 도망 다니기 바쁘다. 뭐라도 하나 더 먹이려고 분주히 움직이시는 장모님. 명절이 지나고 떠나는 딸자식 식구들을 위해 비닐봉지와 각종 음식통을 구해다가 바리바리 싸서 차에 밀어 넣으신다. 전형적인 우리네 어머님 상이다.

내게 '아들'이라 부르는 장모님

처형 가족이 친정에 왔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세배하고는 아래로 남동생 부부, 둘째 셋째 여동생 네 식구와 밀린 얘기를 하고 있다. 6시 정도에 시작된 저녁식사는 소주가 곁들여지자 2시간을 넘겼다. 소주 5병이 비워졌다. 술을 마시는 사람은 서너 명 밖에 안 되는지라 두어 시간 만에 식사자리가 기분좋게 무르익었다. 그리고는 처남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근처 감자탕 집에서 뼈다귀탕을 사오고 아이들을 위해 치킨도 시켰다. 시간이 밤 11시를 향해 간다. 소주병 6개가 나란히 서 있다. 첫째와 막내 사위는 방에 들어가 누웠다. 둘째 사위인 나와 처형, 처제 그리고 아내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처형은 눈가에 눈물 자욱이 그득하다. 처형과 나는 다시 한 잔씩 주고받았다. 난 아내의 무서운 눈초리를 애써 외면하고 한잔 털어 넣었다.

"아들!"

장모님이 부르신다. 장모님은 내게 '사위'말고 '아들' 하라며 요즘엔 '아들'이라고 부르신다.

"우리 첫째 아들, 감자탕 더 시켜줄까?"

내게 '아들'이라 부르는 것을 본 처형이 내게 말을 던진다.

"아들? 그럼 내 동생이네요?"
"​음……. 내가 오빠하면 안 될까요?"

내가 반격했다. ​

"안 되지요. 내가 손윗사람인데. 누나라고 해요."

난 살짝 고민했다. 사실 뭐 손해 볼 것도 없다. 누나라고 부르고 용돈 받으면 되지 뭐.

"누나, 누나, 돈 줘."

다들 빵 터진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딸로 산다는 것은 무언가? 며느리로 가는 수순이 아닌가? 남편과 자식 뒤치다꺼리에 명절이면 남편 조상들에게 바칠 음식을 위해 분주한 어머니, 시댁에서 기름 냄새 맡고 온 사랑하는 내 딸에게 무어라도 먹이고 싶어 안달 난 어머니! 대한민국의 어머니는 그렇게 대물림된다.


태그:#명절 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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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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